일어나서 바로 짐을 싸기 시작했다. 널어놨던 빨래들도 걷어서 개고 캐리어에 담았다. 아테네를 떠나 산토리니에 가는 날이기 때문에 비행시간이 오후여도 오전에는 아테네 시내를 나가기 위해 부지런히 준비했다. 아이는 아침마다 숙소에 있는 TV로 알아듣지 못하는 그리스 만화에 빠져있었다. 캐릭터들의 동작만으로도 깔깔 웃으면서 열심히 봤다. 덕분에 아침에 일어나서 준비하는 게 수월해지긴 했다. 그렇게 아침에 짐을 싸서 나왔다.
먼저 숙소가 있는 신타그마 광장에 가서 국회의사당 근위대 교대식을 구경하기로 했다. 신타그마 광장은 아테네 중심으로 서울로 치면 종로, 명동에 해당되는 지역의 중심이라 할 수 있다. 아테네의 거리는 이곳을 기점으로 삼는다고 하는데 신타그마(Syntagma)라는 뜻은 헌법의 광장이라는 뜻이다. 1843년 이곳에서 최초의 그리스 헌법이 공포되었기 때문이다. 아테네 최고 번화가이기 때문에 주변에 빌딩도 많고 관공서, 호텔, 여행사, 쇼핑 가게도 많이 있다. 뒤에 바로 국회의사당이 있는데 광장에는 전통 복장을 입은 근위병이 1명씩 서있었다. 서로 30분마다 자리를 바꾸며 1시간이 지나면 근위병 교대식을 하는데 그것을 보러 광장으로 왔다. 밤에 잠깐 비가 내렸는지 살짝 젖은 광장은 교대식을 보러 몇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앞코에 검은 털이 달린 신발을 신고 바지로는 하얀 타이즈를 입고 무릎에는 검은 솔이 달린 띠를 두르고 위에는 단추가 달린 반코트를 입고 있었다. 모자는 붉은색으로 챙이 없고 오른쪽으로 길게 솔이 있었다. 솔은 거의 허리까지 내려왔다. 이윽고 교대하기 위한 병사가 왔고 천천히 그러면서 절도 있는 제식으로 교대식을 마쳤다.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아서 금방 끝났다. 익히 들어온 영국의 왕실 근위대와는 차이가 많이 있었지만 그리스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다.
신타그마 광장에서 비둘기와 함께
점심으로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다가 일단 공항으로 가야 해서 시간이 많지 않았기에 두리번거리다 이탈리아 레스토랑이 보이길래 그리로 들어갔다. 사실 매번 그리스 식당에 가면 그릭 샐러드, 수블라키, 요거트 등을 주문하는 게 일상이어서 익숙하지만 눈에 보이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먼저 커피 3잔과 오렌지 주스를 시키고 음식이 나오길 기다렸다. 바질 페스토 파스타와 치즈피자, 꼬치구이는 평범한 익히 아는 맛으로 다소 있던 가격에 비해서 조금 아쉬움이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기차를 이용해 아테네 공항으로 갔다. 저번에 받았던 바우처로 결제를 하긴 했지만 뭔가 쓸 수 있는 잔액이 많이 남았는데 다시는 쓸 일이 없으니 강제로 기부하는 느낌이었다. 공항에 도착해서 수속을 무사히 밟고 비행기에 탔다. 개인당 짐이 들고 있는 것도 포함해 무조건 1개만 되고 검사가 조금 깐깐해서 유럽 저가 항공이라 그런가 싶었다. 그래도 우리의 길잡이가 되어 안전하게 데려다 줄 비행기였다.
오후 3시 35분에 비행기에 올라 산토리니로 출발했다. 이날 바람이 너무 세차게 불어서 도착할 수 있을지 염려가 되는 상황이었다. 비용 때문에 나와 어머니는 각자 따로 앉고 아내는 아이와 함께 앉았다. 지정 좌석을 신청하면 비용이 올라가니 두 자리만 붙이고 나머지는 지정하지 않았다. 출발하자마자 나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간간히 기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고개를 숙이고 단잠에 빠졌고 갑자기 박수소리에 눈을 떴다. 둘러보니 공항에 도착했는데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고 손뼉 치고 있는 게 웬일인가 싶었다. 내려서 어머니에게 물어보니 엄청 바람이 심하게 불고 기체가 떨었다고 그래서 착륙했을 때 무사히 도착해서 조종사에게 감사와 안도의 박수를 사람들이 보낸 거라고 하셔서 그때 나는 자느라 몰라서 어느 정도인지 체감이 나질 않았다. 산토리니 공항은 작았고 바람은 굉장히 심하게 불고 있었다. 이래서 비행기가 착륙 못할 수도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리 픽업 예약을 해서 나오신 기사님이 오늘 비행기 안 뜰 줄 알았다고 바람이 엄청 심하게 불어서 착륙한 게 신기하다고 하셨다. 자동차를 타고 북쪽에 있는 이아마을을 향해 갔다. 절벽 사이로 도로가 나있고 좁은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이곳이 화산 폭발로 만들어진 섬다웠다.
이아마을 골목길 산책
산토리니를 오게 된 것은 전적으로 아내의 의견이 컸다. 신혼여행지로 유명한 이곳을 겨울에 오게 된 것도 그리스에 온 김에 꼭 가보고 싶다고 해서 왔는데 그림과 엽서, 사진으로만 보던 장소에 직접 눈에 담아 가니 아내는 무척 기대감에 부풀어 올랐다. 바람이 세찬 날씨와는 별개로 말이다. 산토리니 섬은 본래 지중해의 큰 섬이었는데 기원전 1,500년경 화산 폭발로 인해 섬 대부분이 바다에 잠기고 남이 있는 부분이 지금의 섬이 되었다고 한다. 가장 큰 섬인 티라 섬도 크기가 제주도보다 훨씬 작다. 이곳에 공항이 있는 것은 하얀 벽과 푸른 지붕을 보기 위한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의 경계선에 쭉 늘어진 하얀 집들은 그리스에 대한 낭만을 품기에 충분했다. 이아마을에 도착해서 택시에서 내려 호텔 안내인을 만났다. 어디가 호텔인지 집인지 모르는 형태이기에 안내인이 꼭 필요했다. 아직까지 우리에게 산토리니는 허락되지 않는 땅이었다. 바람은 불고 계단은 많아 캐리어는 반 들다시피 가지고 다니고 아이는 매서운 바람에 눈을 못 떠 한 손으로 안고 다녀야 하는 곤욕이 있었지만 호텔 방을 안내받자 우리는 눈이 휘둥그레 졌다. 회칠한 벽으로 둘러싸인 방은 크고 넓었으며 신혼여행으로 온 부부들이 즐기기에 완벽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다들 시설에 대해 만족스러워했다. 비성수기라서 상당히 큰 숙소를 저렴한 가격에 빌릴 수 있기 때문에 가격 대비에도 만족했다. 짐을 풀고 나서 바람은 불지만 마침 노을이 지고 있는 석양이라 다들 수평선을 보러 나갔다. 해가 저무는 일몰에 내일은 바람이 불지 않고 화창하기를 기도했다. 저녁을 먹어야 하는데 바람도 불고 식당도 알지 못해서 어차피 물을 사야 했기에 근처 마트에서 간단하게 장을 보기로 했다. 마트 가는 내내 바람이 불어서 돌아올 때 힘들었지만 무사히 소박한 저녁 식사를 마쳤다. 아이에게는 달걀찜을 해주려고 오븐이 있길래 써봤는데 잘 안돼서 반절은 죽 같은 달걀찜이 되어 김을 넣고 먹었다.
바다를 보며 장난감을 생각하는 아이
다음날 아침 일어나서는 구운 식빵과 그릭 요거트, 햄, 잼과 드립 커피로 즐겼다. 창밖으로 보이는 산토리니 바다는 매끈한 얼굴을 자랑하며 우리를 반겼다. 드디어 이곳을 즐길 수 있는 문이 열린 것이다.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문을 나섰다. 어디가 바다이고 하늘인지 모를 정도로 새파란 날씨였다. 세상에는 흰색과 파란색만 존재한다는 듯이 최고의 날씨였다. 이아마을을 배경으로 아내는 모델처럼 사진을 찍어보기도 했다. 겨울이라 옷이 두텁다는 게 아쉬운 거라면 아쉬웠다. 오전에는 이아마을을 구경하고 짐을 챙겨 피라마을로 갔다. 버스를 타고 이동했는데 우리처럼 피라마을로 가려는 사람들이 여럿 있어서 심심하지는 않았다. 호텔 숙소는 바로 못 들어가고 일단 짐만 맡기고 점심을 먹으러 갔다. 길을 걷는데 이곳 명물인 당나귀들이 지나가고 있어서 아이는 타고 싶다고 했지만 바삐 가는 당나귀를 막을 수 없었다. 피라마을 중심가에 있는 한 식당으로 들어가서 볕이 좋으니 밖에 앉아 먹기로 했다. 처음 종업원이 그날 잡은 생선이라며 물고기들을 보여줬는데 신선해 보이긴 하지만 다들 물고기보단 다른 게 먹고 싶어 닭고기 필렛과 새우구이, 삶은 문어를 주문했다. 기억에 남는 것은 문어가 우리나라와 전혀 식감이 달라 먹는 방식이 다르다는 걸 느꼈다. 우리나라는 문어를 살짝 데쳐서 쫄깃쫄깃하게 먹는데 이곳에서는 더 삶아 부드럽게 녹듯이 씹히게 하는 맛이 있었다. 처음 먹어보고는 이게 맞는 건가 싶은 맛이었다.
피라마을은 산토리니의 중심이라 그런지 이아마을보다 훨씬 큰 크기를 자랑했다. 비도 안 내리고 날씨가 정말 좋아 코린토스 갔을 때와 더불어 최고의 날씨를 자랑했다. 어머니는 본인 어릴 때 날씨 같다며 좋아하셨다. 종일 골목길을 뛰어다닌 아이는 졸린지 내 품에서 계속 잤다. 그런 아이를 안고 제일 높은 곳까지 올라가서 노을을 보았다. 사진으로는 담을 수 없는 정말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안고 가는 도중 팔도 저리고 땀도 많이 났지만 그렇게 함께 보는 노을은 그리스 바다의 낭만을 보여주기 충분했다. 내려오는 길에는 호텔에서 추천해 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는데 거대한 티본스테이크와 와인도 주문해 끝나가는 여행을 즐겼다. 이렇게 여행의 마지막 밤이 저물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