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한밤 중인 것 같은데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어머니가 일어나셨다. 알람 소리가 울리면 어머니는 창문을 열고 TV를 켜셨다. 나와 아내, 아이는 아직 침대에 누워 꿈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부둥 거리는 사이 어머니는 테이블을 치우고 호텔 조식을 받아주셨다. 여행 내내 어머니는 묵묵히 잘 걷고,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아이를 맡아서 돌보고 해 주셨다. 남들이 볼 땐 할머니인데 우리들은 그러한 어머니와 함께하는 여행에서 모신다는 생각보다는 우리와 함께하는 여행자라는 생각이 있어서 어머니는 같이 여행 고생을 하는 일원으로 애쓰셨다. 여행 내내 든든하게 아침을 열어주었기 때문에 계획한 일정을 모두 소화할 수 있었다.
가격은 이아마을보다 비쌌지만 피라마을 호텔 역시 이아마을 호텔 못지않게 너무 좋았다. 실내는 이곳이 약간 더 넓었는데 테이블도 크게 있어서 조식 먹기에 불편함이 없었다. 어젯밤에 아이는 잠이 안 온다고 자꾸 내가 자는 침대에 와서 장난치고 놀다가 밤 12시가 다 되어 잠들었다. 오늘은 어제보다 살짝 흐려 보이는 날씨여서 어제 내내 티 없이 청량했던 날씨에 다시 한번 다들 감사했다. 조식은 호텔에서 방으로 가져주었는데 어른 3명과 아이 1명이 먹기에 넘치는 양이었다. 다들 배불리 먹고 호텔 테라스로 올라가 마지막으로 짙고 푸른 바다와 하늘을 가로지르는 수평선, 그에 맞춰진 하얗다 못해 눈부신 절벽의 집들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마지막 감상을 하고 짐을 챙겨 호텔을 나왔다.
공중부양
피라마을 중심가 카페에 들어가 어른들은 커피, 아이는 아이스크림을 주문했다. 아이는 본인이 직접 주문하려고 아이스크림을 계속 외쳤다. 나는 어제 아이를 안고 피라마을 끝까지 걸어간 것 때문에 손이 붓고 머리가 조금 아팠다. 더블 에스프레소로 정신을 조금 차리고 기념 셀카를 찍었는데 사진을 본 아내는 피곤의 끝에 찍은 셀카도 아기 피부로 나오는 산토리니의 하늘에 감탄했다. 피라마을에서 버스를 타고 산토리니 공항으로 갔다. 들어올 땐 몰랐는데 공항도 하얀색에 파란색이 포인트로 페인트가 칠해져 있어 산토리니 공항다웠다. 밤이 되어 다시 아테네로 돌아왔는데 어디 둘러볼 시간은 안되어 아테네 공항 근처에 집을 하나 빌려서 잤다. 그리고 우릴 오늘, 내일 이동을 책임져줄 기사님을 만났는데 그분에게 여쭈어 보아 저녁식사를 할 식당을 추천받았다.
바닷가에 있는 멋진 식당이었는데 밤이라서 바다가 잘 안 보여 아쉬웠다. 건물이 바로 백사장 옆에 있어서 테이블 옆 통유리를 통해 파도를 볼 수는 있었다. 그리스에서 마지막으로 하는 식사이기에 정석대로 수블라키, 그릭 요거트와 샐러드, 해산물 튀김을 시켰다. 역시나 해산물 튀김의 양은 어마어마했다. 아테네 시내에서 먹었던 그 집이 생각나게 할 정도였다. 수블라키는 신기하게 세로로 매달려 나왔는데 빼먹는 재미가 있었다. 식사가 끝나면 자신에게 연락 주라고 기사님이 말씀하셔서 식사가 거의 끝났을 때 연락을 드려 오시라고 했다. 결제를 하고 나가려고 하니 레스토랑 지배인이 오셔서 아직 디저트가 안 나왔다는 것이다. 우린 디저트를 시킨 적이 없는데 서비스로 주시는 거였다.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 디저트를 내왔다.
바닐라 아이스크림과 뜨거운 초콜릿 케이크였는데 평소 같았으면 맛있게 먹었겠지만 기사님을 부른 상황이라 나와 아내는 조금 안절부절못했다. 일단 음식이 나왔으니 빨리 먹고 있는데 기사님이 오셔서 나와 아내는 먼저 나가 있기로 했다. 디저트에 잔뜩 기대에 찬 아이가 마음에 걸려 일단 어머니에게 아이랑 드시고 나오라고 해서 먼저 나와 아내는 나와서 기사님과 이야기를 했는데 아이가 어머니랑 바로 따라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먹지 왜 나왔냐고 하니 어머니가 아빠랑 엄마가 나가니까 상황이 안 좋아 보였는지 자기는 안 먹어도 된다고 하면서 나가자고 했다는 것이다. 아이의 생각에 미안하면서도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 마음 씀씀이에 놀랐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아이의 성장에 깜짝 놀라는 순간이 있는데 이때도 그런 순간이었다. 기사님은 우리가 묵을 집으로 안전하게 데려다주시고 다음날 아침에 오시겠다고 하고 가셨다. 숙소는 넓고 괜찮았다. 아침에 먹을 수 있는 빵, 잼, 버터도 있어서 자고 일어나서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짐을 싸서 나왔다.
아내의 큰 짐
공항 가는 길에 기사님에게 서양 역사의 근원인 그리스 아테네에 정말 와보고 싶었는데 올 수 있어서 좋았고 행복했다고 말했는데 좋아하시면서 아테네라는 말을 잘 못 알아듣는 것이었다. 그게 아테네라고 하는 발음이 그리스 사람에게는 안 들렸던 거다. 기사님이 '아티(시)나'와 비슷하게 발음을 해서 또 하나 배웠다. 어쨌든 그런 이야기를 하니 무척 좋아하셨다. 친절한 기사님 덕분에 무사히 아테네 국제공항에 도착해 출국 수속을 밟았다. 짐 검사를 할 때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는데 선물로 줄 그리스 술 우조를 다 뺏긴 것이다. 큰 병이 아니고 작은 병으로 여러 개를 샀는데 짐 검사를 하면서 내 가방에 액체류가 잔뜩 있어서 열어보니 우조가 여러 병 있어서 그 자리에서 다 버렸다. 기념품이라고 해도 전혀 통하지 않아 결국 다 버린 채로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오후 1시 25분 출발로 저번에 탔던 프로펠러 달린 작은 비행기를 타고 다시 터키 아타튀르크 공항으로 갔다. 기내 간식으로 햄치즈 바게트를 줘서 맛있게 먹으며 버려진 술 생각에 쓰린 속을 달랬다. 아테네에도 한국으로 가는 직항이 있으면 좋으련만 직항이 없어서 이동하는 데 비효율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집으로 갈 준비
1시간 30분을 비행해 이스탄불에 도착했고, 다시 1시간 정도 입국 수속을 밟아 공항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아직 출국 수속이 안 열려 카페에서 앉아 기다렸다. 아이가 자고 있어 한 시간 넘게 안고 있었더니 어깨와 눈꺼풀이 무거웠다. 터키에 바로 입국해서 2시간 있다가 출국하는 것이 괜찮을까 싶었는데 아무 문제없이 통과되었다. 1시간 비행기 지연으로 인해 일단 출국 수속을 밟고 안에 들어가 저녁 식사를 했다. 면세점에서 여행 기간 내내 아프지 않고 잘 다녀 준 아이에게 고마움으로 작은 레고 블록을 사줬다. 연착되어 밤 10시 45분에 대한민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고 또 12시간의 비행을 했다. 아이는 비행기 자리에 앉자마자 어린이 헤드셋을 달라고 한 다음 능숙하게 화면을 켜고 만화 시청을 했다. 그러다 졸길래 눕혔더니 짜증을 내서 안아주고 나와 아내, 어머니가 교대로 보면서 갔다. 그렇게 버티다시피 하며 무사히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 안에서 날은 바뀌어 1월 22일 오후 3시가 되었다. 이렇게 긴 여행은 처음이라 어서 집으로 가서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면도도 깨끗이 한 다음 자고 싶었다. 사실 이번 여행하면서 면도기를 안 가지고 가서 얼굴은 날것 그대로 변해갔다. 다음부터는 면도도 잘하고 옷도 패딩만 가져가서 실용성만 챙기기보단 조금 신경을 써서 입고 싶었다. 어머니와 헤어진 다음 아이는 다시 호텔 가자고 울먹거렸지만 집에 가서는 새로 산 레고 블록과 집에 숨겨 두었던 다른 장난감을 보고 이내 마음이 돌아와 가지고 놀았다. 나와 아내는 라면을 3개 끓여먹고 짐을 정리하고 빨래를 하고 사진을 정리했다. 그렇게 꿈같던 지구 반대편 여행을 마치고 이 세상 유일한 곳,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