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가 어려운 우리들에게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고 했나, 익숙함은 나로 하여금 모든 자극에 손익을 따지는 계산을 하게끔 유도하여 여기서 주인공이 자신임을 증명하려 든다. 종래에 형성되어 내게 익숙해진 기존 체계가 나의 절대적 명분이 되어 결단코 부서져서는 안 되는 유리 트로피인 양 소중하게 지키고 싶은 마음은 그 자체로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다. 우리가 이제껏 공히 사실이라 믿으며 사수해온 것의 뿌리가 흔들리는 일을 극히 두려워하는 이유는 마치 자신을 송두리째 잃어버릴 것만 같은 상실감을 터부시 하기 때문이다. 자기애란 곧 익숙함이 주는 안심감을 지반으로 삼아 세워지는 대들보이지 않은가. 따라서 변화를 갈구하고자 자신을 혼돈 속에 내던지는 길에 선 사람이 있다면, 나를 금지옥엽으로 아끼는 마음은 바닥에 길게 늘어져 질질 끌리며 내 발걸음마다 방해하는 꼬리표처럼 거추장스럽기 그지없는 것이 된다.
한편, 생의 차원을 관통하는 운명은 언제나 머무르기보다는 움직이는 자의 편을 들어, 우연을 가장한 '관계' 혹은 '발견'이라는 장치를 통해 모종의 새로운 입력값을 흘려보내는 은혜를 베푼다. 나의 영혼이 숨 쉬는 곳인 깊숙한 내면에서 이에 차마 거부할 수 없는 양심이 작용하여 강한 '통증'이 발생했다면 그것은 띠리링, 메시지가 제대로 수신되었다는 매우 긍정적인 신호이다. 하지만 기득적 이권을 우선시하는 자기애에게 설득당한 주체는 가치관의 변화와 전복을 극렬히 거부하고자 하는 경향의 흐름을 벗어나기 쉽지 않다.
자, 말하자면, 한쪽에는 내게 뻔하고 친근한 패러다임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미지의 미스터리에 대한 배움이 있다. 고인 물의 부패한 냄새가 슬슬 나기 시작한 습관이라도 꾹꾹 눌러 담아 가득 채워진 그릇과 앞으로 무엇이 채워질지 알 수 없는 텅 빈 그릇 중에 고르라면 결국 '이미 존재하는 것'의 유혹을 이겨내는 것이 쉽지 않다. 익숙함의 가두리가 내게 종용하는 한계점을 감지했기에 통증이 발생했지만 오류보다 공허에서 더 위기의식을 느끼고야 마는 인간이다. 하지만 그 지겨운 조건반사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이 내재되어 있기에 자각된 통증이며 이 통증이 곧 무언의 청유인 줄 깨달았다면, '빈 그릇'은 그저 '비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일까? 적어도 허무토록 빈궁하고 각박한 모습의 표상으로 보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필사적으로 기존의 공식들을 비워내는 견지에서만 이해와 수긍이 가능했던 기기묘묘한 통증들 때문에 어느덧 나는 비워지는 것을 많이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비워졌다고 해서 순시로 바로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 속도의 계기판은 변화를 통해서 스스로 '성장하는' 만큼, 혹은 '되찾는' 만큼의 가도를 따라 좌우되는데, 성장판도 닫힌 마당에 나를 일진월보로 성숙시키는 일도 감질나도록 느리고, 내 본래의 색과 조우하여 내면의 구성 요소를 재발견하는 일도 더디기 그지없다. 이는 모두 섭리가 녹아든 현상의 면면을 직접 체험하고 탐구하며, 본질과의 연결점으로 조화된 공식적 습관으로 굳어지는 데 <시간 단위의 영속적 흐름>이라는 물리적 인자의 지배를 필수적으로 받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특별한 아이라도 여덟 살짜리가 아홉 살을 폴짝 건너뛰고 바로 열 살이 되었다고 자랑할 수는 없는 것처럼, 자연의 이치는 편각에 그 성질이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기존의 통념적이고 부자유한 공식으로부터 파급되는 통증을 분별하고 모색하고자 꽤 많은 부분을 들어냈어도, 빈자리가 미처 채워지지 않는 공백의 타이밍이 발생한다. 우리는 그것을 '혼돈'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고착, 편협, 태만, 무분별, 무신경, 몰지각, 의존, 트라우마, 생채기, 굴욕, 적응 실패 이러한 해악한 것들 보다도 '혼돈'을 두려워하기에 종내 변화가 어려운 것일지 모른다.
어느덧 이해하고 수긍한 것을 실제적 변화를 위한 변곡점으로 만들기 위한 고뇌와 실행을 멈추지 않는 자일수록 삶은 이러한 혼돈의 연속이며 어쩌면 그것은 나귀처럼 등짝에 평생의 짐으로 지워진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불행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되려 그것은 감사하고 기쁜 일이다. 당초 혼돈을 느끼지 않으면 결코 패러다임에 갇힌 내 인식 범주의 빗장을 풀고 열 만큼의 용기를 내지 못하거니와, 하물며 나의 한계점 권외에 있는 자유의 대기권과 교류하여 공백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지 궁리할 수도 없을 것이다. 다만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 시간이라는 개념의 영속적 지배 안에서 흐르는 우리 삶의 전 과정이 그 자체로 향유되기에 더없이 유용한 재료가 될 수도 있었던 혼돈에 염려를 얹으면 모든 것은 이내 불안과 두려움으로 탈바꿈하고 만다.
나는 마침 '미래 기대'가 늘 '현재 몰입'을 견인하고 이에 보답하는 '현재 몰입'이 '미래 기대'를 성실하게 지지한다는 것을 선각자로부터 배웠다. 인간의 오성에 맞추어진 물리적 차원에서 입력은 언제나 출력을 앞서고, 직관적 예감은 실제적 구조화를 앞선다. 그러니 우주 속 성간을 유영하는 현재의 혼돈이 만드는 유유낙낙의 힘이 미래의 회심을 위한 알고리즘으로 성립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변화란 정해진 지점이나 구간을 통과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새롭게 작용하는 공식의 손길이 나를 스치는 모든 자극에 직접 닿아 화학반응을 일으킨 만큼 확장되는 파형을 가진 에너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선 사건 ― 후 시공간>이란 명제의 물리 법칙에 따라서 '미래'라는 시간관념의 패러다임도 그런 식으로 바꾸는 것처럼. 그 지평의 너머에 감히 실마리조차 파악하기 힘든 거대한 기획자의 의도가 있다면, 그 복선의 힌트를 혼돈의 미로를 찾는 열쇠로 제공받을 수 있음에 그저 깊이 감사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