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고, 기웃거리기
'본질'에 대해서 어느 때, 어느 누가 내게 은밀히 건넨 힌트가 하나 있다. 가령, 여기 사과가 하나 존재한다고 할 때, 우리가 이것에 대해서 보편적이고 통념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물리적으로 보자면 빨갛고, 둥그스름하고, 향긋하고 달콤하며, 과즙이 풍성해 시원하고, 어떤 나무의 과실이라는 식물계에 속하며, 각종 비타민과 무기질이 풍부하고 등……. 하지만 이 사과라는 대상의 본질이 지니는 어떤 형이상학적인 에너지가 있다. 누군가의 추억 속에서 이 사과와 무수히 연계되어 저장된 색인의 지도가 그려 주는 심상과 영화처럼 펼쳐지는 끝없는 이야기들, 맛을 보더라도 혀 끝에서 제멋대로 감돌며 우쭐대는 미각은 내가 아는 언어를 모두 동원해도 미처 전부 설명할 수 없는 오묘한 그 무엇, 어떤 이는 사과에 음감이 깃들어 있다고 감지하여 리듬과 선율과 화성을 붙일 수도 있고, 외형의 이면으로부터 전혀 사과처럼 보이지 않는 형태를 심미안적으로 읽어내고 회화나 조형으로 표현될 수도 있으며, 소쉬르의 기호학처럼 멋들어진 기표와 기의들로 기상천외하게 재탄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술이란 이렇게 인간의 차원에서 본질적 에너지를 미처 전부 파악할 수 없는 한계와 불완전성을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극복하기 위한 각 개성 간의 몸부림이다. 그것은 매우 보기 드물도록 특이하고 독창적일 수밖에 없다. 어릴 때는 불가해한 것들을 곧잘 수집했다. 마치 외계의 항성을 떠나 지구에 정착한 생명체가 다시 고향별로 되돌아가고픈 향수를 느끼기라도 하듯이. 하지만 성인이 되고 어느 때부터인가 내게 과중하도록 몰이해한 언어적 표현이 가지는 난해함에 대하여 소모적인 불편감으로 낙인을 찍어 회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의 쾌적을 보장하기 위한 당연한 권리가 두려움으로 진화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 순간까지 그러한 속임수의 시간은 꽤 오래 이어졌다. 불가해함이 더 이상 그리움이 아닌 공포라니, 괴로운 노릇이었다. 그런데 이 선물 같은 힌트를 계기로 현상 일반을 공유하기 위한 목적으로 드러내는 영역을 조금 더 벗어난 표현적 정수라는 것은 이면의 본질을 갈구하는 인간의 추구이자 노력이며 그것이 곧 창조성이자 동시에 장인 정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후로 내게 몰수된 공감의 통로가 조금씩 회생하고 거부감의 장벽은 점차 허물어질 수 있었고, 미지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열망과 호기심을 다시 찾는 계기가 되었다.
하물며 인간의 손에 의해 탄생한 인공지능조차 프로그래밍으로 입력된 연산 범주 외 영역의 가능성에 대해서 어딘가 기웃거리는 개체가 있다고 한다. 모든 지능이란 미지를 탐하고 쫓도록 설계된 것일까. 한 개인이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본질을 향해 뻗어나가는 몸부림은 이를 감상하는 세상 속 다른 이들에게 순수한 전구체, 선구 물질로 작용한다. 시야와 사고가 자유롭게 흐를 수 있도록 개방해두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 사람일수록 이러한 매개체에 이끌리고 매료되며 사회적 통념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영감으로 흡수한다. 현실로부터 주입된 틀을 벗어난 자아 본연의 순수성이 무엇인지, 다시 되찾을 수 있을지 고뇌하기 위한 자양분으로 빨아들이고자.
초현실적 이도록 아름다운 미술 작품을 감상했을 때, 기존 시스템의 부조리에 대한 반항을 강렬하게 승화한 음악을 들었을 때, 염려와 근심을 잊게 만들 정도로 몰입력과 감화력을 지닌 맑은 영혼의 이야기들, 한 점의 가식도 느껴지지 않는 솔직하고 순수한 표현들, 수없이 궁구의 노력을 거듭한 끝에 탄생한 장인의 첨예한 기술, 이러한 것들을 접한 순간 자 보시라, 저도 모르게 끓어오르는 어떤 향상심과 고양감의 물결, 도파민과 아드레날린, 나를 얽매는 것에 대한 투쟁 본능, 내 진짜 모습을 찾고 싶은 꿈, 더 소중한 것을 추구하고픈 갈망 같은 것들이 내면에서 용솟음치며 부추겨진다. 그런데 이러한 열정은 이내 월급 통장과 병원 건강검진 결과지와 세상에 대한 불신을 자극하는 사건사고들과 타인과의 경쟁에서 꼭 이겨야만 하는 상황과 나의 쾌적함을 방해하고 위기감을 고취시키는 모든 세상의 위험 요소들 앞에서 잠깐의 백일몽처럼 순식간에 사그라들고 만다. 물론 그런 괴리로부터 느껴지는 허탈과 우울의 심리를 기가 막히게 포착하여 활용하는 타고난 기지의 사업가들과 장사치들이 있고, 때로는 그들에게 내 열정을 전문적으로 의뢰하여, 때로는 그 속임수를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 슬며시, 그들이 제공해주는 것을 일시적인 위안과 위로로 삼아 소경의 연명치료를 아슬아슬하게 이어가기도 한다.
본질에 대한 책임감으로 무형의 가치를 유형으로 빚어내고자 혼신의 힘을 다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자. 그들의 작품은 쉽게 공감하고 소통하며 다가가기 어렵지만 이는 당연한 일이다. 한 영혼과 표면에서가 아닌 본질적 영역에서 소통한다는 것이 쉬우리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어떤 인과에서 온 당당한 오만함인가. 소중한 것은 결코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세상에 산재한 말초적이고 단말마적인 코드들이 얼마나 간편하고 쉽게 소비되고 또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가. '미지의 세계'란 기본적으로 까다롭다. 그렇기에 염려와 경계심보다는 호기심과 탐구정신이 요구되고, 미지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세상 일반으로부터 제공받지 못한 순수한 보람, 재미, 감동을 느끼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굳게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일부 예술가와 크리에이터들이 창조한 세계는 우리에게 어떤 것들을 전달한다.
나의 영혼이 원래 어떤 색과 모양을 하고 있었는지 탐구하는 것은 둘도 없이 재미난 모험이라는,
장인 정신은 고루한 것이 아니라 혁신적인 것이라는,
내가 의존으로 얽매여 있던 것으로부터 독립되어 나와도 괜찮다는,
미지는 위험한 것이 아니라 신비한 것이라는,
내 본능의 가능성을 믿고 나를 낯선 곳에 내던져도 괜찮다는,
그 도전 앞에서 개인의 쾌적함을 위한 조건은 그리 큰 가치를 가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그것이 본래의 순수함을 일깨우고 회귀하는 길이라는 그런 용기의 메시지들. 그것을 전달받은 우리는 가없이 무언가를 그리워하고 무언가를 회심하고 싶어 하며 때로는 변화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로부터 충만감과 함께 도무지 형언할 길 없는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무엇에 대한 사랑인지도 미처 모른 채. 어쩌면 이것이 예술과 창작의 섭리가 흐르도록 세계가 건설되었고, 이에 영혼을 바치는 자에 한하여 본질을 엿볼 수 있는 강한 영감이 수신되는 이유의 일부로 작용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