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여행기: 논리 언어술사의 공간

(1) 타인의 추억을 사랑한다는 것

by Travis and Johnnie

내가 무엇을 추구하건 그것은 내가 가진 근면의 절반만큼만, 내가 행하는 성실을 넘어서는 모든 갈망은 예외 없이 나를 갉아먹는 욕심과 집착으로 변질된다는 것, 가르침대로 이미 수습한 사실이지만 머릿속에서 내가 원하는 시나리오를 쓰고야 마는 순간에는 선망후실 하고야 만다. 허튼 이상은 시야를 극도로 협소하게 만들기 때문에 내가 이미 누리고 있는 아홉 가지 축복보다 내게 불리한 한 가지 것에만 온 신경이 집중되게 만든다. 그것은 터무니없고 이기적인 요구나 바람으로 변질되어 드러나기도 하고, 그것 없이 나는 어쩌면 영영 만족을 채울 수 없을 것 같은 이상한 착각에 일순 빠지기도 한다.

독서는 그런 나를 다스리는 동시에 이성의 표층이 아닌 내적 공간에서 받아들이는 타인과 세계를 증험하는 여행길이다. 드문드문 외부와 비교의 차원을 넘어서는 독립성이 현존하고, 그 국외적 입지에서 이문목견하여 축조된 세계관을 드러내는 개성이 실재한다. 내게 있어서 그러한 주체와 조우되는 것은 값진 일인 한편 그가 지닌 내면적 공식을 이해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가령 자신의 내적 자존을 건드릴 가능성이 있는 모든 것에 본능적으로 투쟁해온 사람의 공식이 독창적이고 난해한 영감으로 드러나 있는 출력적 결과를 오직 표의적으로만 받아들일수록, 내게는 도무지 불가해한 것으로 현상화된다. 이는 내가 이면에 숨은 진실을 바라보고자 하지 않기 때문인데, 본질은 개인의 투쟁이 탄생한 순간에 촉발된 <통증>을 통해서 내비친다는 것을 교만으로 굴절된 시야에서는 미처 관망할 수 없기 때문이다. 타인의 내밀한 궤적이 담긴 작품을 현상에 머무른 채 감상할수록 여러 명분의 가치와 통념적 조건이 의무가 되어 따라붙고, '가능성'이 아닌 '한계점'의 잣대를 끄집어내어 대상체를 객관화한다. 다시 말해, 한 독립적인 개성이 지닌 내력을 절대다수의 객체 간 비교 및 경쟁이 가능한 영역에서 주목하고 평가하는 것에 억지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비교 불가침의 영역이 있다. 타고난 성정 그대로의 개별적 통증과 그로 인한 투쟁의 과정, 번민이 여물어 수확된 <기쁨>과 <자족>도 마찬가지이다. 타인의 내적 충만감과 온전히 공명할 수 있는 힘은 자아 간의 대립을 위해 경쟁으로 분리된 자아망의 벽을 허물어 내 것도 아닌 비밀을 순수하게 사랑하도록 만든다. 아무렴, 본능 영역에 새겨진 모든 노력은 그 어떤 것도 예외 없이 추억이 되어 남는 법이거늘. 내게 몰이해한 투쟁의 공식이 설령 피곤하도록 비효율적이거나 아리도록 가슴 아픈 호전성으로 느껴질지 몰라도 그 반항의 역사의 길에 선 장본인의 내면에는 얼마나 알알이 빼곡하게 들어찬 추억으로 승화되어 있을까. 한 주체의 독립된 자아 방향성을 위해서 현실의 유혹에 머무르지 않고자 노력하는 것이 얼마나 당위적인 절실함인지 상기하면 모든 두려움은 곧 기회이고, 기회로 삼는 과정은 승리의 공식으로 획을 그었다. 왜냐하면 모든 추억의 장치는 총체의 섭리가 주관하는 감각 아래 융통되는 것이니까, 개인의 개념적 이해의 여부로 그 가치가 논해지거나 소통의 가능성이 판별될 수는 없다. 더 낮은 자리에 위치할수록 우주는 더 잘 보일 것이라는 명제는 그러므로 참이다.

내 소중한 삶의 발자취에 부여하는 경쟁심은 허무토록 공회전하는 자부심이 되어 본질이 비어버린 공간을 떠돈다. 타인의 유별난 추억을 애써 쓴웃음 지으며 "유니크"하다고 인정할지언정 내가 만들어 온 이 전리품들이 훨씬 더 따뜻하고 감성적인 것이라고, 고독한 반항심보다는 온유한 평화가 깃들어 한껏 몽글몽글하게 만들어졌고, 손쉽게 편안한 공감을 유도하여 누구라도 금방 미소 짓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유년기에 가지고 놀던 물체 주머니 속 투명한 유리구슬처럼 사랑스럽지 아니하냐고, 여러분 보세요, 행복을 품은 기억의 편린을 팝니다, 아니 자선합니다, 그 당위성을 주장하는 나의 추억의 자산들이, 변화를 갈망하여 투쟁하는 사람들보다 작금의 세상이 태평성대하다고 믿거나 적어도 그러길 맹목적으로 바라는 사람들 쪽이 훨씬 우세한 비율만큼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싶은 그런 오류가, 이윽고 나를 비교의 노예가 된 장님으로 만든다. 화평함으로 온당했던 내 추억이 뜻깊은 만큼 누군가의 치열했던 싸움의 추억도 아픔을 딛고 넘어선 기쁨의 공식이다. 간단한 이야기, 내 것이 중한만큼 남의 것도 중하다. 내 것이 귀여운 만큼 남의 것도 귀엽다. 같은 차원의 시공간, 같은 섭리 아래서 공명정대하게, 그것을 깨우칠 수 있다는 것이 곧 축복이다.

타인의 본질을 이해하고 수용하며 더 나아가 공감하고 소통하고자 기울이는 노력에 근면할 자신이 없다면 그 이상의 것을 바라지 말 것, 내가 실제로 행하고 있는 성실의 절반만큼만 소망할 것,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만큼 더 노력하며 체득의 바퀴가 내 입장에 쉬이 만족스럽고 유리 한대로 쾌적하게 굴러갈 것이라 착각하지 말 것. 그리하여 나는 흑막을 두르고 연금술의 수수께끼를 던지는 논리 언어술사의 기상천외한 추억을 읽으며 그들의 공간을 유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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