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여행기: 논리 언어술사의 공간

(2) 혼돈을 대하는 법

by Travis and Johnnie

타고난 연구자의 기질이 다분하여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논리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 창작의 궁극적 목표가 되는 사람을 내 시선에서 보자면 마치 연금술처럼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신비한 논리 언어의 술사이다. 현상의 이면에 있는 본질을 자기 논리적 출력 프로세스에 여과시킨 만큼만 흡수하여, 타고난 성정에 특화된 연구 테마로부터 모종의 독창성을 발명해내는 것으로부터 자신이 가진 재능을 스스로에게 증명하는 힘에 경외심을 가진다. 어둠 속에서만 도사리던 것을 양지로 끌어내 형상을 밝히듯 기존에 부재하던 독립적 개념의 제시 그리고 이를 조직화하는 구조의 시현, 그 자체를 궁구의 목적으로 삼는 유사 계열 스타일의 창작자들의 작품은 늘 파격적인 구조의 아름다움이 있다.

다만 나의 경우, 술사들과 동일한 관심사를 포착하고 같은 자리에서 출발했다손 치더라도 자극을 해석하고 처리하는 방식에 있어서만큼은 양극단으로 판이하여 그들 고유의 출력 방식을 이해하는 데 매우 큰 난항을 겪는다. 나는 정반대로 현상의 이면에 있는 본질을 여과 없이 통째로 수신받아 그로부터 유의미한 진실을 읽어내고 자기표현으로 치환하여 타인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중간 메신저의 역할을 창작의 의무로 삼는다. 그런 나에게 소통을 방해하는 외골수적 난해함은 내 방어기제를 자극하는 적과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평생 나와 닮은 모습의 작품, 더 닮고 싶어 흠모하는 작품 등 내 개성에 유리하고 쾌적한 감상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던 터라 나는 술사들의 작품이 대단히 인상적이라고 내심 점쳐두긴 했지만 제대로 읽는 것은 항상 꺼렸다. 직관을 최대치로 활용하여 가능한 표면만을 훑은 후 실전적인 기지와 꼼수를 속된 말로 영혼까지 끌어오면, 실상은 적당히 둘러대는 것에 불과하지만 제법 심층적인 투시와 관찰의 감상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포장할 수가 있다. 이제껏 상대방이 얼마나 속아주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의 내면이 속지 않았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언제까지고 엉큼한 어린애인 양 신랄한 순수함을 위장하고, 얼핏 보기에는 그럴듯한 현상 유지를 위해서 재기와 순발력으로 카드 돌려막기만 하는, 지조도 줏대도 없는 허세를 고발하는 양심의 가책이 어느 순간 폭발한 것을 보면 말이다. 이제는 쌓인 빚을 청산하고 나를 스스로 불편하게 만드는 실체 없는 적을 깨부수는 독서를 도전한 이래 조금씩 시야가 확장되고 내적 수용의 범주가 늘어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한번 굳어진 인지 습관은 시시때때로 나를 어처구니없는 가공의 위기의식으로 몰고 가기도 한다.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직면을 거부하여 기존 습성의 고착을 유도하는 유전자의 방해공작은 당연한 것이기에 진작에 단단히 각오해두었다. 한 꺼풀 막이 드리워진 탁한 시선을 걷어내고 낮고 허물없는 마음을 되찾는 노력을 긴 시간 공을 들여 꿋꿋하게 이어가는 것은 불변으로 전제된 노정이다. 다만 그 과정이 쥐어짜 내는 인내가 되지 않고 술사들이 제공하는 유희에 빠져들어 흠뻑 몰입하는 시간으로 이끌기 위한 모색이 부족했다는 것을 책임감으로 무겁게 찍힌 발자국마다 깨닫는다.

우선, 나는 상기의 유형과 같은 작품을 직면할 때, 상대방의 작품이 내가 가지는 역할성과는 전혀 다른 것을 목표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꾸 망각한다. 그리고 이 작품이 가지는 진실성에는 피차 무의미한 행위로써, 내 천성에 노련하고 능란한 대로 가시적 표현 이면에서 드러나지 않는 모종의 메시지를 읽어내고 점지된 숙명적 연결점을 찾기에 열중하고 몰입하고 만다. 그러다 보면 매우 아리송한 혼돈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고 마는데, 그것은 필시 작품 속에 담긴 작자의 영혼을 있는 그대로 보려 하기보다는 내가 보고 싶은 대로의 모습을 확인하고자 없는 것을 찾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기어이 콧대 높으신 <거부감>이라는 귀족적 정서가 행차하면 자기애의 부정 직관이 제멋대로 사주한 통로대로 불편한 예감과 상상력이 흐르는 것은 명약관화이다.

하지만 그렇게 흐트러진 집중력 속에서도 한편으로 내게 주어진 개성의 몫이 할 수 있는 일까지 생판 몰수되지는 않은 탓인지 작품을 감상하며 새로이 전달되어 수신되는 입력값으로부터 내가 출력할 수 있는 이야기의 소재 또한 얻게 되기 때문에 나의 도구적 가능성 또한 함께 엿보게 된다.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유일무이한 가치를 지니는 시선과 교감하는 사회적 역할성이 첫째 의무요, 내게 허락된 모양새대로 어려움을 중재하는 매개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고유 개성의 역할성이 둘째 의무인 바. 이로써 나는 타인을 겸허히 수용하되 자신을 묵살하지 않을 수 있고, 자기애의 장벽을 넘어선 소통의 자유를 누리되 자존적으로 독립적일 수 있다.

나는 이제껏 타인의 작품을 감상하면서 이 두 가지 역할성을 모두 인지하고 서로 엉켜버리지 않도록 분리해야 할 필요성을 조금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만큼 울타리를 쳐놓고 좁은 세계에서만 머무르기를 자처하고 있었다는 반증일 것이다. 세밀하고도 무한하게 펼쳐지는 실제적 감각의 세계 안에서 이러한 깨달음이 적용되고 체득되기까지는 분명 많은 시간과 시행착오가 필요하겠지만 실수로부터 배우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혼돈은 위기의 상황이 아닌 성장의 발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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