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갑지도 뜨겁지도 아니한 자
(1) 딜레마
일견 너무도 당연하지만 우리가 삶에서 놓쳐버리기 일쑤인 핵심 진리에 귀를 가만히 기울인다. 반드시 두 세계에 모두 소속되어 있는 운명을 타고난 우리 인간은 그 경계에서 본능적으로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는데, 그 목적은 어떻게 해서든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싶은 욕심으로부터 연유한다. 두 세계가 각각 어느 곳을 일컫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엄밀함은 구태여 불요하다. 각자의 개성과 환경에 따라서 그 철리(哲理)를 체감하는 방식도, 판단하는 방식도, 개념을 구획하는 방식도 서로 다르게 표현할 테니 말이다. 게다가 그 아웃풋 또한 각양각색의 궁지에 몰린 모양새만큼 혹은 저울에 올린 고뇌의 근 어치에 따라서 일구어낸 유레카의 명도와 채도만큼 무수할 것임에 틀림없다. 보편 섭리의 법칙에 따르는 핵심이란 대개 본질적으로 타고난 자아의 방향성과 현실 안에서 성장하며 형성된 자아의 괴리에서 빚어지는 갈등으로 귀결된다. 자존의 역점을 국외적이고 독립적인 행복의 추구에 둘 것인가, 시스템에 소속된 자로써 사회적 증명의 욕구에 둘 것인가, 그 사이 어느 마디에서 유한한 생이라는 노무 계약서를 체결할 것인가, 문제는 그뿐이다.
허락된 차원의 시공간 그 어디에서도 동일하게 온전하고 확고한 한 갈래 답은 반드시 미궁에 부쳐져 있고 우리를 에워싼 모든 현상적 요소로부터 '동시성'의 수수께끼를 부여받은 우리들이다. 양다리를 걸친 두 세계 중 어느 한쪽으로 조금의 유격 없이 전적으로 조여진 결단을 내리기에는 타고난 불완전성으로부터 기인된 여러 고충과 진통을 겪는다. 우리는 지저스 크라이스트와 같은 존재가 아닌 바 속인과 초인 그 어느 쪽에도 완전하게 부합될 수 없는 인과로 갈무리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 사이에서 평생토록 균형과 중용의 미덕을 알아가는 순례자의 운명이 마지막 순간까지 간구하고 용쓰며 고군분투하게 만드는 동력원이 된다. 물론 그 미덕을 추구하기 이전에 선차적으로 현혹되기 쉬운 미망의 구렁텅이는 '탐욕'이라는 죄악이다. 내 생각에, 서로 상반되는 양극단으로부터 두 가지 양태의 가능성이 동시에 인지되었을 때 좀처럼 어느 쪽도 포기하지 못하고 모두 쟁취하고픈 욕심은 인간의 타고난 본성인 것 같다. 하나를 선택했을 때 기어이 놓아버린 다른 한쪽에 대해 맹렬하게 끓어오르는 상실감. 그래서 인간의 언어 개념 안에서 '딜레마(dilemma)'라는 말이 탄생한 것이리라.
어쨌든 우리에게 이렇게 결정적 덫의 숙제가 놓인 이유는 뚜렷하게 존재할 것이다. 단지 괴롭히려는 심산 따위가 아니라, 결코 둘 모두 손에 넣을 수는 없다는 것, 반드시 한 가지를 포기해야만 다른 한 가지를 얻을 수 있다는 것, 하나를 얻고자 한다면 다른 하나를 대가로 지불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지불은 종국에는 손해가 될 수 없다는 깨달음까지 포함하여, 스스로 힌트를 찾아서 끝없이 기웃거리고 연이은 시행착오로 허덕거리는 인고의 연단에서 비로소 체감해가는 가치가 곧 구원의 기쁨이자 행복임을 회오토록 인도되고자. 둘 모두를 가지려 드는 자여, 어느 쪽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허망하게 사라질 것임을 부디 지각할 수 있길 바라는 심산에서.
(2) 회색 지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아니하고 미지근함으로 어중간하게 미적거리는 자들의 우매함에 대해서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게 된 데는 내가 그려온 자화상에서 우연히 발견한 거대한 오류로부터 비롯되었다. 코 앞에서 볼 때는 전혀 몰랐던 형태의 치명적인 일그러짐이 두어 발짝 뒤로 물러나자 비로소 보이게 된 것이다. 미지근함을 일종의 혜안이며 명철함이라고 착각하던 때가 있었다. 상기 언급된 양극단의 '두 마리 토끼'를 겉보기에 얼추 모두 손에 넣은 듯한 모양새를 시늉하기에는, 일단 온도를 얼추 중간 정도로 '안전 범위'에 맞추고 고개를 좌우로 번갈아 돌리며 잠깐 뜨겁게 올렸다가 다시 차갑게 내렸다가 끊임없이 유리한 형세를 살피며 조절하는 것이 꽤 그럴듯한 사리 명분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를 버리듯이 무언가에 완전히 내던지기에는 소중한 내가 아깝지만 그렇다고 나의 내면을 잡아끄는 알 수 없는 힘에 모른 척 초연하기에는 파수꾼 같은 양심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인 처세이다. 그렇게 미지근함의 유혹에서 시작과 끝을 모르는 미로 속을 헤매듯이 표류하다 보면 이윽고 나 자신을 감쪽같이 속이기에 가장 효과적인 상태가 된다. 그러한 회색 지대에서 사람은 가장 악취가 나는 법이라는 묵직한 말을 들었다. 하물며 음식도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미지근한 상온에서 가장 쉽게 부패하는 이치를 떠올리며 나는 금세 수긍했다.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그 어딘가, 이롭지도 않지만 해롭지도 않은 존재로써, 열망은 없지만 부단히도 굴러가는 톱니바퀴처럼, 모든 중간점에서 눈치를 보고, 에너지 소진에 대한 검약 정신을 발휘하고 ― 도대체 무엇을 위하여? ―, 염려에 염려를 거듭하며 제 자리 그대로 머무르기. 때로는 선택의 여지없이 부득이하게 허락된 삶이라면 그 시간을 어떻게든 살아내기에 가장 영리하고 손쉬운 생존법이라고 믿었던 사람들 중 그 일부가 막다른 길로 내몰리기도 한다. 내 얼굴을 참 못나게도 그려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내가 그러했듯이. 어쨌든 천만다행이지 않을 수 없다. 태릉촌에서만 해당되는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내가 나를 넘어서기 위한 도정에서 미지근함은 결코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다.
피보나치의 수열 그래프가 나타내는 유전자의 농간에 따라서 변화하는 소수가 되는 것이 어려운 섭리 위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이다. 때로는 허물을 벗는 통증에 깜짝 놀라 곡소리를 내며 불평하지만 아무런 대책 없이 궁지로 내모는 몰인정함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나에게 알려줄 수 있는 것들이 너무도 많다. 평생에 걸쳐 깨워도 시간이 모자랄 만큼의 본능이 대기되어 있다. 단지 아직 눈이 멀고 귀가 어두워 생각의 활로가 경화된 바람에 미처 내면에 스며들지 않았을 뿐, 거저로 누릴 수 있는 가호가 내려지고 나도 모르는 새에 이미 마음껏 누리고 있는 자유가 도처에 무궁무진하게 주어져 있음이 감각된다면 도망가는 '두 마리 토끼'의 뒷모습으로부터 어느 쪽이 내가 쫓아야 할 궁극의 방향인지 그 생의 윤곽이 생생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