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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avis and Johnnie Dec 01. 2022

조여진 나사와 풀린 나사(1)

#organizing  #유레카는 설계도를 위한 것

#organizing


  삶의 '우선순위'에 대해서는 있는 힘껏 자의식의 나사를 조일 것, 주어진 오성적 범주 안에서는 최선을 다해 사유하고 고뇌하여 내게 주어진 자존적 개성과 색채를 뿜어내고 터트릴 수 있는 어떤 분출구를 발견하고 그 방향대로 실행해 나간다. '살아지는 것'이 아닌 '살아가는 것'이 될 수 있도록 해주는 활력소가 되어주는 영역에서는 괜한 겸양도 눈치도 경쟁도 비교도 필요가 없다. 공동 일반이 구축한 시스템에 편승하지 않는 주체성의 자기 함몰적 열정과 독립적인 몰입을 불편해하면서 흘깃거리거나 뒷말을 흘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 또한 그의 과제로 주어진 몫이 될 뿐, 그것을 핑계로 내 본질의 코어에서 열망하는 소신과 중심을 쾌적하게 타협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뚜렷한 '테마'가 설정된 삶, 운명에 소진되기를 주저하지 않는 삶, 미지근했던 물이 펄펄 끓기 시작하는 특이점을 넘어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 이것이 각자에게 마련된 물리성 안에서 언제 어떻게 단절되어 버릴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에너지와 시간 즉 '인간적 소멸'에 대비하는 유일한 방법이자 생을 온전하게 구현하는 자세일 터이니.

  반대로 그 외 중요하지 않은 모든 것에 대해서는 완전히 나사를 풀어버릴 것, 왜냐하면 나머지 것들은 염려하고 시달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저 누리고 즐기라고 주어진 '여분'의 행운이니까. 하지만 나와 같이 사회적 입지는 최소한으로, 되도록이면 방만한 무개념을 기본 값으로 하여 국외적인 삶의 디테일한 재미에 인식의 초점을 맞춰 살아온 사람에게는 어떤 것이 중요한 것이고 그렇지 않은지 분별하는 일이 매우 어려웠다. 각성의 촉구를 받게 된 이래 A부터 Z까지 모든 것이 변화되어야만 도생할 수 있다는 생각에 내 자아 방향성과 전혀 무관한 영역에조차 나사를 조이고 무조건적인 책임감과 사회적 명분을 스스로에게 훈계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고, 애쓸수록 도리어 내 본연의 색과 멀어지는 듯한 자책과 시행착오의 피로함 속에서 점차 우선순위를 정제하는 미학을 배우고 있다.


#유레카는 설계도를 위한 것


  이를 위해서 유념할 것은 맞닥뜨리는 각 상황 별로 판이하게 와닿는 사건성과 자극에 따라 내 본질과의 관계성을 읽어낼 것. 나열된 현상적 요소로부터 본질적 핵심 요소를 추출해내지 않으면 자극은 단지 평범한 스트레스가 되어 버린다. 미묘한 시그널을 포착하여 숨겨진 가능성을 발굴하는 일에는 예리한 편이지만 상황을 논리적으로 구조화하여 파악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내게 지극히 직관적인 예감만이 주어졌을 때 그 관념적 이해를 '긍정 유보'라는 태만함으로 치환하여 나의 행동적 투쟁 가능성과 등가 교환 하기에는 직무 유기라는 찜찜함이 남는다. 만약 반복적으로 직면하여 돌파했을 경우 내면에 기어이 무엇이 체득되어 어떤 공식이 남게 되었을지 그 의안을 스스로 부결시켰기 때문이다.

  본디 나의 행동력이란 '좋은 예감'이라는 믿음의 물질로 채워진 성정에서 탄생하는 것이라 해도 무방한 자존적 공식을 가지고 있다. 혼란에 빠진 상태에서 일시적으로 그 기능이 멈췄을 때 스트레스에 대한 회피나 유보의 유혹을 이겨내고, 상실된 믿음을 재발견하기 위한 대안을 모색하고 마련하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는 것은 내게 직관적으로 이해된 아이디어나 영감을 현실적으로 구조화시키기 위한 설계도를 그리는 것과 같다는 것의 유레카의 정체는 곧 구체화된 소망이었다. 이 시안에 의지하여 잠시 흔들린 방향성을 재정비한다. 설계도를 무용지물의 종잇장으로 만들지 않으려면 건물을 직접 지어야만 하듯이, 그 끝없는 실행과 연습의 과정에 몰입할수록 실존적 반복을 거듭한 누적치만큼 소망을 구현하는 시간들에 영속적인 사랑이 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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