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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avis and Johnnie Jan 07. 2023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 미야케 쇼(三宅 唱), 2022

 16mm 필름으로 촬영되어 바랜 듯이 차분한 색감 안에서 표면은 무성 영화처럼 고요했지만 품어진 이야기의 힘이 내적 아우성을 소란스럽게 내지르던 영화.


  나는 이야기꾼 미야케 쇼 감독의 스토리 텔링 역량에 탄복했으며, 감동과 전율 속에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울 수 있음에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감독은 쉬운 길을 선택하지 않고, 현상을 다루기 위한 연출에 대해서는 거의 터치와 개입을 하지 않으며 오직 개인의 내면을 좇으며 드러내는 일에만 우직하고도 올곧게 집중했다. 감독이 철저한 원거리적 시야에 한정해서 도쿄라는 도시가 있는 그대로 흘러가는 모습을 아주 직설적이고 솔직하게 곳곳에 삽입하지 않았더라면 현실 공간감을 거의 느끼기 어려울 뻔했다. 왜냐하면 주인공은 청각 장애를 가진 프로 복서였고, 물리적으로 외부와 단절되어 왔던 자의 고립된 내면을 묘사하는 것에만 공을 들인다는 것은 소통적 재미에 관한 장치적 권리를 포기하는 리스크를 감수하더라도 핵심에서 눈을 돌리지 않겠다는 용기의 작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대신 감독은 복싱이 주는 리드미컬한 타격감의 사운드 속에서 '들리지 않는 대상을 시선으로만 좇으며 들여다보는 자'의 심리를 치밀하게 설계했다. 제목이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이다. 주인공 케이코를 지도하는 체육관 회장은 그녀에 대해서 복싱의 재능이 없다고 단언하지만 동시에 눈(시야와 시선)이 좋다고 말한다. 실제로 케이코는 상대방으로부터 미처 전달받을 수 없는 모든 정보를 눈으로 좇을 수밖에 없고, 복싱을 할 때도 그것은 아주 진솔하고 정직한 양상으로 드러나기에 케이코의 내면과 미야케 감독의 영화는 서로 한 몸으로 매우 닮아 있는 모습이다. 그 치열하고 고독한 눈을 통해서 한 사람의 귀한 내면적 고군분투에 동참할 수 있도록 들여다볼 자리를 마련해주는 이야기의 힘이 거대하다.

  다만 케이코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움직이는 소통의 멘토로써 인도주의적 역할을 맡은 인물인 '회장'에게 지워진 휴머니즘의 무게가 규격화된 사회성의 틀 안에서 다소 부자유하고 버겁게 느껴진다는 것이, 설령 주인공의 치열하고 고독한 내면의 전개에서 관객이 느낄 압중한 기분을 유하게 해소해 줄 유일한 창구의 균형점을 발휘한다는 임무 하에서라도, 아쉬웠다. 긴 세월을 살아온 회장의 켜켜이 깊어진 심중에서 스테레오타입을 비껴갔을 터인 개인성을 전혀 드러낼 수 없다는 사실은 철저히 케이코 중심으로 만들어진 구조 속에서 다소 허탈하고 박정하게 느껴진 까닭이다(유일하게 진짜 성격을 드러내준 것처럼 보였던 회장의 마지막 장면만이 그에 관해서 얻을 수 있었던 단 하나의 퍼즐 조각이다). 나머지 주변 인물의 배치는 소통의 코어에 힘 있게 닿을 수는 없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기에 부족할 것도 없는 대부분의 관계 속 양면성을 드러내기에 적절하게 부합된다.


 소통의 부재 속에서 한 주체성은 세상으로부터 아슬아슬한 인식의 경계에 내몰리지만, 고립무원에 놓인 자는 적어도 스스로를 속이지는 못하기에 투박하게 맞부딪치고 모든 생채기를 오롯이 책임진다. 복서 케이코는 그런 인간이었다. 슬쩍 덮어두고자 어떤 속임수도 허세도 쓰지 않고, 달콤한 위안이나 보상으로 자신의 본모습을 외면하지도 않는다. 그러기에는 진실됨이 간절하고, 생의 소통이 절박할 만큼 헐벗음이 아프다. 있는 대로의 허세를 끌어 모아 만들어낸 허상과 여유의 세계에서 자신을 잘도 속여내던 내 억압의 깊이를 가늠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어떤 다복한 주인공이 되어 어떤 영광된 시나리오를 연출하고 싶었길래 그리도 자신을 잘 속여냈을까. 잘 들리고 잘 보이는 것에 대한 감사를 모르고 양 쪽 모두 오만하게 닫아버렸던 사람을 향해 귀가 들리지 않기에 눈만큼은 결코 감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솔직하게 들여다볼 수 있도록 선사된 시간이 무척 값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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