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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avis and Johnnie Jan 17. 2023

어거스트 버진(La virgen de agosto)

호나스 트루에바(Jonas Trueba), 2022

  예부터 마드리드 사람들은 여름을 피해 도시를 떠난다. 도시는 휑해진다. 남은 이들은 정처 없는 관광객들뿐 이들은 야외 축제에 모여든다. 축제는 8월 첫째, 둘째 주에 도심에서 열린다. 성 카예탄 축일, 성 라우센시오 축일, 성모승천 대축일을 기념하는 축제이다. 이 영화는 이 기간 동안 진행된다. 이제 33살인 한 여자가 주인공이다. 그녀는 남들과 달리 도시에 남아 새로운 존재방식을 시도해보려 한다. 과연……



  선키스트 오렌지 빛 화면을 바탕으로 올라가는 올드 패션한 수기 자막이 영화 배경을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하며 유럽의 아주 정통적인 그 무엇을 암시하는 것만 같았던 시작점의 예상은 꼭 들어맞았다. 반대로 어거스트 버진이라는 제목에 걸맞도록 나지막한 일상은 소박하고 꿈결 같은 방황은 사치스러운 한 30대 여성을 다루고 있다는 선입견으로부터 만들어진 억측, 필연코 여성적 모순으로 채워진 배반의 잔은 속이 쓰리도록 들이키고 이를 조롱하듯 이야기는 깃털처럼 가볍게 흘러가리라 방심했던 것에 대해서는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다. 설령 이야기에서 남는 것이 없어도 마치 프레스코 벽화처럼 묘사되었다는 평이 자자한 마드리드를 만족스레 볼 요량이었으니 아무래도 괜찮았다. 그런데 아름다운 도시는 눈에 잘 들어오지 않을 만큼 주목성은 완전히 다른 곳에 있었다.

 감독은 이야기 구조를 완전히 개방해 둔 채 이곳은 볼거리가 꽤 많고, 마음껏 보는 것은 자유입니다만, 해석은 헤집고 들어올 수 있는 만큼 각자의 몫이라고 말하듯이 문을 활짝 열어젖혀 방문객들에게 거한 환영 인사를 건네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갖가지 은유와 암시의 소재들이 무책임하게 나열되어 보는 이가 알아서 가지고 놀라는 듯 게으르고 방종한 처세에 그쳤다는 말이 아니라 치밀한 계획 하에 여기저기 사유의 진창으로 빠져드는 구덩이를 파놓고 발을 헛디디기를 유도하는 판을 깔았다는 의미이고, 심지어 그 스케일이 결코 작지 않았다. 도생하는 냉혹한 직관의 세계에서 달리 누가 구덩이에서 빠져나가도록 도와주겠는가, 함정에서 언제까지고 산만하게 머무르지 않으려면 나 스스로 책임질밖에. 인색하고 교만한 방심 끝에 두들겨지는 인식의 가혹함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지리멸렬하게 가속되는 세상의 시스템 속에서 옳고 그름의 편을 새로 가르고, 가치관의 재분배가 이루어지고, 행복의 본을 뜨는 전사판이 변화하고, 그러한 프레임 안에서 활발하던 자의식의 시냅스가 엉기어 굳어버리거나 또는 놀라운 방식으로 새롭게 과열된다고는 하나, 여전히 저무는 잔양으로 남아 있는 인본적 정신은 말 그대로 고유의 빛을 내는 유러피안의 정신이었다. 하늘을 찌르도록 우뚝 선 인간에 대한 애정에 날이 바짝 선 도덕적 개인주의가 친밀하게 결탁해 왔던 세월의 교육적 배경 속에서 의심은 하되 경계하지는 않는 부류의 사람들이 탄생했다. 그들이 일생의 대가로 환산하는 소통의 값어치는 그 반대편의 사람들이 두드리는 계산법과는 사뭇 다르다. 여기서 소통이란 타인을 인식 범주의 대상으로 들이기 이전에 자아와 계약된 무의식과의 사이에서 거래될 수 있는 딜의 가치를 선제적 필수 조건으로 내건다. 관찰하는 시간이 늘어나고, 생각과 말이 많아지고, 몽상에 도취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뻗어나가는 직관을 경쟁하지 않고, 누구든 비판하되 아무도 비난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경계하는 사람은 반드시 세상도 경계함을 깨닫고 정신을 운용하는 일에 통달한 사람일수록 외부적 자극을 염려하지 않고 거대한 혼란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상생의 조화점을 찾는다. 나는 그것을 보편적 사회성으로부터 기인한 것을 넘어선 궁극적 의미에서 <공감>이라고 부른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나 자신으로 산다는 것은?"라는 원천적 질문을 던진다.

  "떠났기 때문에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게 된 걸까 아니면 내가 원래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떠나게 된 걸까?"

  "익숙한 환경에서 자유를 찾는 건 대단한 용기야.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이 훨씬 자유롭잖아. 새로운 사람이 되기도 쉽고."

  "진정한 자신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 원래 있던 곳으로부터 독립되어 해방되지 못하면 어떻게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정해지지 않은 자신에게 동일한 질문을 피상적인 차원에서 던질수록 단순하고 뻔한 답이 드러나서 내 마음을 변두리에서 쾌적하게 만들고, 내면 깊은 곳을 두드려 던질수록 쉬이 나오지 않는 답이 파내는 혼돈의 구덩이는 깊어진다. 외부에 대한 통찰과 교감의 능력이 무척 뛰어난 주인공은 주변 사람들이 불가항력적으로 홀리듯이 혹은 강한 의지를 붙이고 선택하는 것들의 결과를 서로 대조하거나 후회하거나 만족하거나 속죄하는 모습에서 많은 상념을 품지만 정작 자신은 태어난 도시 밖으로 한 번도 벗어나본 적 없는 자의 고유성으로 얼어붙었고, 움직임이 동결되어 느슨하게 성기어진 시간들에 대해서 반추하는 법조차 쉽사리 알 수 없다.

  그녀로 말할 것 같으면, 늘 한결같이 몸 담고 있던 공간에서 휴가를 찾아 방문한 이의 행세를 하며 남의 아파트를 잠시 빌려 여행자의 쉼터를 마련하고, 호기롭게 관광버스를 타고 도시를 구경하고, 다른 관광객이 호기심 어린 눈길이 쫓는 대로 따라 시선을 두고, 틀에 박힌 일상을 벗어난 여행자가 허물어진 경계의 틈에서 배양한 자유와 호기심으로 나누는 친절한 모험까지 더한 후, 긴 남구의 오후 햇살에 한없이 늘어지는 모양새까지도 치밀하게 모방하여, 덧없이 지나는 8월의 하루하루로부터 극의 리얼리티를 구성하기 위해 이성이 아닌 본능의 역량으로 설정된 계산 속에서 움직이는 공을 들일 수 있는, 그런 사람이다. 그녀의 직업은 여배우이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뜨거운 마드리드에서 여름 내내 휴가를 떠난 자아를 쫓아서 찾아다니던 주인공은 영화의 후반부로 흐를수록 제목이 암시하던 종교적 색채의 신비감을 중의적으로 슬쩍 드러낸다. 도시에서는 계속해서 성 카예탄 축일, 성 라우센시오 축일, 성모승천 대축일의 연이어 대기된 불꽃의 화약처럼 사방으로 튀어나가 공중에서 터지고 생기로운 활력이 피어났다가 이내 사그라들어 흘러가기를 반복하는 중이다. 경축하고 기뻐하기 위한 축일이지만 동시에 모든 과거에 성인(聖人)들이 품었던 고난과 아픔에 대한 경외의 묵상을 가지기 위한 시간이기도 하며 지금 여기 내가 서 있는 모습과 그들의 뜻을 하나로 연결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그 아키타이프에 대한 필연적 몽상이 여름의 뭉근한 더위와 주변 모든 것과의 불특정한 관계성 속에서 지쳐가는 주인공의 정신을 점차 사로잡았다.


  따뜻하고 포근한 실재성과 청일하고 냉엄한 신비성이 혼합된 공존이 보이는 것을 끝으로 심어진 이야기의 줄기가 과실을 맺기도 전 중도에서 거두어지는 것은 분명 감독의 고의적인 착실함이다. 스케일이 큰 이야기꾼의 넉살에 대해서 연대적으로 만족하는 법에 대해서 생각한다. 어떤 이야기에 단지 탄복하거나 판단하거나 평가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연계된 책임을 진다는 것은 무엇일까. 마치 성 라우센시오 축일로부터 전형화된 아키타이프의 그 무엇이 다시 개인성의 표현으로 치환되어 주인공의 내면으로 흘러들어 간 것처럼, 한 사람이 축제의 불꽃을 제공했다면 이야기를 듣는 것에 그치는 청자에서 그 뒤를 이어서 말할 수 있는 화자가 된다는 것에는 어떤 겸양된 감사와 사랑의 책임이 필요한가. 우선 한 이야기에 대해서 이토록 오랫동안 집중하고 곱씹을 수 있는 행운이 허락된 필연성을 납작 숭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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