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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avis and Johnnie Mar 11. 2023

카뮈가 말했지,

삶에 대한 절망 없이는 삶에 대한 사랑도 없다고.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격원감을 가지던 카뮈Camus의 정신적 모험을 다시 마주하기 시작했다.

피할 수도 없지만 지나갈 수도 없어 일단 멈춰 선 교차 지점이 그어 놓은 근원적 경계선에 소환되어 서게 된 느낌이다.

  그야말로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자의식의 충만한 꿈에 겨워 곧 성인으로 넘어가는 문턱을 코 앞에서 기쁨으로 바라보던 어린 나를 기억해 냈다. 그리고 '헤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과는 또 전혀 다른 모종의 '필연적 회피'가 일찍이 있었음 또한 발견했다. 그 문턱은 곧 나의 운명을 좌우하는 '세계관'의 갈림길이기도 했던 것이다.


  내 정체성이 단지 '사실적인 신변'을 가지고 세속적인 이해관계의 일부를 구성할 부속 장치의 충성스러운 역할을 넘어서 그 이상의 무언가를 담아내는 하나의 그릇이 될 수도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심원한 빛의 세계를 향하기에 힘에 부쳐 검고 온후한 물 밑으로 한없이 가라앉는 스스로를 꿈꿨다.


  '지금의 내가 도무지 알 수 없고, 미처 다룰 수도 없는 새로운 세계가 있다면 그것은 곧 나 자신의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위한 끝을 암시하지 않을까.'


  설명할 길 없이 막막하고 거대한 행복을 품은 씨앗이 파종된 세계관에 한없이 도취됨과 동시에 느끼는 무력함으로부터 종말에 대한 예감을 소환하는 나의 전통은 압도된 자의 미봉책으로 시작된 해묵은 낭만이다.

조금도 두렵거나 염려하지는 않았던 이유는 아직 스스로를 방어하고 아낄 줄 모르는 동시에 세계와의 관계성을 깨우치기 어려운 백치성이 살아 숨 쉬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자신의 천성적 유약함과 반목하여 걷잡을 수 없이 날뛰는 기질에 대한 경계심과 부담감 때문에 투쟁으로 어떻게든 뚫어보기보다는, 반절 짜리 회피라는 통로 안에서 기질을 회유하여 재활용하는 법을 체득했다.


  하지만 그 희희낙락의 필연적 소산 역시 어떤 것을 얻고 어떤 것을 잃기 위한 수순대로 계획된 이끌림이었을 거라고 여겨진다. 시의적절한 타이밍이 만들어낸 모든 기억들로 내정된 풍요를 누리는 내 개성의 입체성에게 주어진 역할이 있을 것만 같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마음속의 무질서, 기질적 어려움에 대한 정면돌파의 고뇌와 투쟁은 일단 제쳐두고 백치성에 칼을 대기를 과단했다.

유대적 공감의 힘을 원천으로 하는 원거리적 수집과 흡수의 능력을 월등하게 하여, '비밀스러운 고립과 감각적 정동의 세계' 외에는 도통 무관심했던 내게 온갖 것을 연결시키고 배움의 행복을 맛보게 해 줌과 동시에 그 속에서 자기애라는 거대한 괴물을 키워냈다.

바야흐로 전환의 타이밍에서, 나는 잠시 단절되었던 세계 앞에 다시 섰고, 여태껏 전후무후했던 정신적 모험의 시대가 어김없이 도래하였다.


  반항의 대가였던 카뮈는 처녀작의 재출간 당시 쓴 서문에서 스스로의 태생에 관해 이러한 고백을 했다.

  "나의 타고난 선천적 불구인 무관심을 고칠 수 있도록 나는 빈곤과 태양의 중간에 놓였다."


  한 사람의 세계관이 변화하는 데 무엇이든 동시적으로 작용하지 않게끔 하시는 섭리가 있을까.

하나님께서는 기쁨과 슬픔은 완전한 하나이듯 갈망하는 자의 막막한 무력감과 희망찬 미래기대 역시 한 몸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심으로 여태껏 미봉책에 불과했던 행복의 공식으로부터 더 높은 희락으로 나를 끌어올리신다.

내가 가장 낮고 질척이는 자세로, 나를 감화시키는 그 어떤 대상도 나를 위해 취하는 자원으로 감각하지 않고, 도리어 감히 모든 것의 일부가 되는 데 조금도 아낌없이 바칠 작정으로 임할 때, 나 자신이 오직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랑의 뜻을 일조하는 자원이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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