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항상 직관적 느낌과 영감이 조달해 주는 이상을 피워내는 세계가 있었다.
하나 이 상념의 세계를 경유한 증험적 입체성이 실증하는 과정을 통과하지 못하고 마냥 도취된 상태에 머무른다면, 제아무리 강력한 예감 속에 있다 한들 알코올이나 약물에 의존한 환각 상태에서 꾸는 허황된 환상과 근본적으로 다를 바가 무엇이 있을까.
'유대인들의 메시아가 그저 피상적이고 이상적인 성질에 지나지 않는 상념으로 화석화되었다'는 진실은 내게도 동일한 경종으로 강하게 촉구한다.
가장 직접적으로 숱한 계시와 메시지를 전달받고 이를 연구해 온 유대인들이 정작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의 사역을 방해한다는 가장 역설적인 난센스는, 품어진 이상이 관념적 놀이에 그치지 않도록 분별하는 고뇌와 행함의 노력으로 예감이 실증되지 않으면 결국 자신의 안녕을 위해 왜곡된 그 무엇이 되어버린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직관적 이상'의 세계가 단지 한 개인의 비밀스러운 기쁨을 위한 우화 같은 알레고리로 머무르지 않고,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생명력을 지닌 리얼리티로 증명하는 현시성에 대해 역설적이게도 스스로 종말적 예감을 끌어올린다는 것을 나는 지난 글에서 이미 밝힌 바 있다.
이러한 모순된 감정은 '어처구니없고 터무니없으며 어안이 벙벙하고 얼토당토 말이 안 된다'라고 선을 긋는 비현실감 때문인데, 오랜 시간 동안 내면에서 이상과 현실의 두 세계는 서로 절대 합치될 수 없다는 '믿지 못함'을 열렬히 '믿어 왔던' 것에 의한 내적 무력감이 야기하는 혼란인 것이다.
우습기 그지없는 오랜 예시 하나가 떠오른다.
어린 시절 내가 가장 사랑하는 직업은 카레이서였고, 아일톤 세나를 지상 최고의 우상으로 흠모했으며, 도대체 왜 나는 지금 당장 그런 순도 높은 광기와 열락의 세계에 동참할 수 없는가 하는 부조리의 슬픔에 늘 사무쳤으며, 어쨌든 나다운 방식으로 그 특별한 영혼의 정신을 전승할 길에 대한 예감의 물색에 몰입했다.
한데 그런 생각들이 항상 달콤한 음식을 목구멍까지 차도록 꾸역꾸역 먹고, 잠에 물려 더 이상 누워 있을 수 없을 정도로 퍼질러지는 것이 행복인 자의 편안하고 안락한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곤 했다는 것이 볼만한 가관의 핵심이다.
기똥찬 예감이라는 숙원 사업은 예감으로만 즐기고 현실은 야무지게(라고 쓰고 '이기적이게' 혹은 '게으르게'라고 읽는다) 살아가야지, 생명을 얻지 못하고 퇴락한 예감의 잔물이 허망하게 쌓여가는 것 그 자체로 억압이 되는 줄도 모르고 저도 모르는 새 그렇게 믿었다.
믿음의 가성비를 따지는 문제는 일단 보류해 두고서라도, 품어진 믿음에 대한 실증적 체득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데, 그런 줄 모르고 있다는 것도 큰 죄였던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 구속된 자라는 사실에 완전히 도취되어 사로잡히지 않으면 아무리 성령께서 나를 올바른 예감으로 인도해 주신다 한들 그 운명에 자신을 온전해 내맡길 수 없다.
내게 은혜로 주어지는 모든 생의 퍼즐 조각은 어떠한 실수 없이 완벽하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현재 그리고 미래에 도래할 행복의 여부를 염려하고 두려워한다.
가장 근사한 예감이라도 막상 현실의 땅으로 이끌어오는 것에 대한 불신과 무력감 때문에 결단코 '대기 상태'를 벗어나지 않는 자의 알량한 담보물 같은 허무주의의 탈을 씌워 왔다면, 이제는 그 탈을 철저하게 깨부수는 것이 예감하는 이로서 누리는 진정한 자유의 첫출발이다.
나는 아마 앞으로도 셀 수 없을 만큼의 잦은 시험에 들면서 어떤 순간에도 현재에 몰입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실증하는 행동을 결코 멈추지 않게끔 부단히 유도되는 단련의 기회를 감사히 갖게 될 것이다.
유격의 틈새, 오직 그러한 기회의 순간에 주입하는 노력만이 즉효적으로 울리는 내면의 반향이라는 것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불완전 영위의 지평을 조금씩 더 열고 있는 단계에서, 하나의 사안이 반드시 함께 품고 있는 빛과 그림자를 넉넉하게 공존시킬 줄 아는 연습이 아주 조금씩 자연스러워지고 있다.
절반의 염려와 절반의 영위 사이에서, 때로는 우울하다고도 우울하지 않다고도 할 수 없는 낭만을 느끼거나, 두렵다고도 두렵지 않다고도 할 수 없는 용기를 느끼거나, 비현실적인 꿈같지만 그 어느 때보다 현실적이다는 신비감이 그 자체로 하나의 추동하는 에너지가 되어 낯선 열정을 자아낸다.
이분법으로 재단할 수 없는 섭리의 생태를 이해하는 내면의 자리가 조금은 넓어진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기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