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앓고 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질환이 있다. 하지불안증후군이다. 다리를 가만히 있으면 간질간질하고, 움직이고 싶은 충동이 이는 증상인데, 피곤해도 제대로 잠이 들 수 없어 상당히 괴로운 질환이다. 나는 꽤 어린 시절부터 이 질환을 앓고 있다. 한숨 자고 싶을 때 하지불안증이 발생하면, 내내 꼼지락거리느라 잠을 잘 수 없다. 일부러 잠이 부족한 상태에서 비행기를 타도, 일부러 술을 한 잔 마셔 봐도 마찬가지였다. 딱히 뚜렷한 치료 방법이 나와 있지 않은 듯해 몇 번의 시도 끝에 치료를 포기한 상태다.
그런 이유로 비행기에서 자면서 이동한다는 건 꿈도 못 꾸는 나인데, 딱 한 번. 정말 정신없이 잠들었던 여행이 있다. 교사로 근무하던 5월의 연휴. 대학 동기와 마닐라를 찾았다. 겁이 많은 둘은 그저 총이 무서워 패키지여행을 선택했다. 퇴근 후 잠을 몇 시간 못 잔 채로 새벽에 일어나 공항으로 향했다. 친구와 수다를 떨며 비행기에 앉은 건 기억이 나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하늘 위였다. 이륙도 전에 잠이 들어서 하늘을 한참 비행하던 중에 눈이 떠진 것이다. 살면서 처음 겪는 일이었다.
잠은 여행하는 내내 쏟아졌다. 나는 평소에 사람들 앞에서 설명하는 사람을 배려해 눈을 마주치고 리액션을 최대한 해주려 한다. 그러나 이때만은 예외였다. 버스에 탈 때마다 잠이 들었다.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싶어도 들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는 너무 자서 가이드한테 미안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감기는 눈꺼풀을 어찌하겠는가.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려는 자, 눈꺼풀의 무게를 견뎌야 한다. 나는 견디지 못하였다.
잠이 부족해도 앉아서는 못 자던 내가 차만 타면 잠이 들었던 유일한 여행. 나는 그 원인이 내가 신입 교사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오랜 기간 고시 공부를 하다가 다시 일을 시작한 터였다. 3, 4월을 긴장한 채로 교단에 서고, 안 해보던 일을 하니 알게 모르게 심신이 지쳐 있던 것이 아닐까. 그러니 의지와 달리 몸이 따라주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잠에 취한 여행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다.
그로부터 10년 뒤, 방콕 여행을 함께 한 다른 친구를 통해 이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금요일에 밤 비행기를 타는 일정이었다. 반차조차 내지 못했던 친구 한 명은 퇴근하자마자 집에 가서 짐을 챙겨 공항으로 왔다. 새벽 비행기에서 잠을 청하기는 했으나 비행기가 너무 추워 세 친구 모두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다. 방콕에 떨어진 건 아침 6시. 체크인도 안 되는 호텔에 짐을 맡긴 채 일정을 시작했다. 주말 아침 시장을 시작으로 하루 종일 걸어 다녔다. 해가 지기 전 호텔로 돌아가 체크인을 하고 잠깐 쉬다가 밤에 카오산 로드에 갈 예정이었다.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고 재정비를 하고 있는데, 친구 한 명이 조용했다. 퇴근하고 바로 여행을 온 그 친구였다. 방금까지 수다를 떨던 그녀가 갑자기 곯아떨어진 것이다. 잠든 그녀를 보다가 이상한 걸 발견했다. 그녀가 손에 무언가를 쥐고 있었다. 소중한 듯 쥐고 있는 그것은 오늘 하루 종일 신고 있던 양말 한 짝이었다. 나머지 한 짝은, 그녀의 한쪽 발에 곱게 신겨져 있었다. 그렇다. 놀랍게도 그녀는 양말을 벗다가 말고 기절하듯 잠이 들어버린 것이다.
아아, 이것이 K-직장인의 휴가다! 직장인에게 연휴는 오아시스 같은 것. 그 시간에 충분히 집에서 휴식을 취할 수도 있었지만, 여행을 택한 사람들. 그러나 금강산도 식후경이 아니라, 면(眠)후경이다. 우리는 잠깐의 오수가 친구의 체력을 회복시켜주길 바라며 일정을 조금 늦췄다. 일하는 사람의 발은 늘 안쓰럽다. 잠든 친구가, 친구의 손에 있는 양말이, 양말을 쥔 손이, 한쪽만 따뜻한 그 발이 짠했다.
그런데 여기까지다. 안쓰러운 건 안쓰러운 거고, 우리는 친구 아이가! 친구의 굴욕은 곧 우리의 행복. 코미디 속 주인공같이 잠든 그녀를 배경으로 우리는 기념사진을 남겼다. 일하고 와서 얼마나 피곤했니. 그래도 친구야, 조금만 자고 일어나야 해. 여긴 방콕이야. 긴 잠은 허락할 수 없단다. 우리는 기어코 달콤한 잠에 빠진 그녀를 깨워 화려한 카오산 로드로 향했다.
직장인의 여행이란 그렇다. 잠은 쏟아지지만, 마냥 자고 있을 수 없다. 돈과 시간을 들여 타국에 왔으니, 하나라도 더 보고 다녀야 하는 것. 그렇게 맥주 한 잔이라도 마시고 자야 덜 억울한 것. 굳이 밖으로 기어 나와 발 마사지라도 받고 들어가야 하는 것. 피곤을 견뎌내고서라도 하나라도 더 경험하려는 것. 부족한 잠이 아니라, 지친 마음을 충전하는 것이다.
그 맛을 모르는 누군가는 미련하다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행을 떠나본 이들은 안다. 때로는 편안한 잠이 아니라, 피곤한 여행이 재충전의 시간일 수 있다는 것을. 여행지에서 가득가득 채워가는 경험들이 현실을 버텨낼 힘이 된다는 것을 말이다. 힘이 들 때 여행의 추억들을 비타민처럼 꺼내 먹어보자. 효능은 영양제 그 이상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