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iginal
12. 유수연
진기는 요즘 아주 신이 났다.
내가 일을 하느라 집을 비우는 동안 함세복과 박영민이 번갈아 가며 진기를 돌봐주었기 때문이다. 매일 그럴 수는 없었지만, 그들은 거의 일주일에 두세 번 꼴로 번갈아 진기를 보러 와 주었다. 가끔은 둘이 함께 오기도 했다.
특히 일이 많아 바쁜데다 오랜 시간을 일해야 하는 주말이 되면, 그들의 존재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박영민이 진기를 보러 오는 건 순전히 함세복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발안이 원래 그런 동네지만.”
박영민이 어깨를 치켜들며 웃어 보였다.
“특히나 세복이랑 내가 사는 동네 부근은 워낙 깡촌이라, 일찍부터 수원이나 오산 쪽으로 자주 놀러다녔지. 좀 멀게는 용인이나 평택까지도 돌아다녔고. 그러니까, 여기까지 오는 게 그렇게 대단히 번거로운 건 아니야. 신경쓰지 마.”
세복이는 의외로 집중력이 있어서, 진기와 함께 몇 시간이고 앉아 보드게임을 하거나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보거나 참을성있게 난이도가 높은 레고블록을 조립하곤 했다. 그러나 아무리 밤늦은 시간에도 우리 집에서 자는 일은 없었다. 언제나 내가 돌아오면 내 뺨을 가볍게 꼬집고는 나가서 오복이의 시동을 걸었다.
어느 날, 집에 돌아오니 새엄마가 와 있었다. 당황한 나는 세복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며칠간은 새엄마가 집에 있으니 진기에게 오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을 문자로 전송했다. 다음날 밤, 밤늦게 집에 돌아온 나는 집 앞에 세워진 오복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 돌아보니 세복이가 서 있었다.
“놀랐잖아.”
“너, 오늘은 집에 안 들어가도 되지?”
“응?”
“진기 때문에 밤마다 집에 꼬박꼬박 들어갔던 거잖아. 오늘은 나 따라갈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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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오복이의 뒷자리에 앉아 세복의 허리를 부여잡고 귀곡성을 내지르는 바람을 맞으며 나는 발안으로 돌아왔다. ‘돌아왔다’고 생각하는 나 자신이 의아하고도 놀라웠지만, 그런 놀라움도 잠시였다.
발안 땅에서 부는 바람은,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과 아직 젊다는 사실을 일깨웠다. 내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에 생기를 돌게 했고, 더 이상 강태석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으로 들뜨게 했다. 다시 내 몸을 투명하게 만들고 질량과 밀도를 없애 바람이 통하는 길목이 된 기분은 상쾌하기 이를 데 없었다.
강태석.
여전히 내게는 소름끼치는 이름이다.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끔찍한 이름이다.
그러나 발안의 바람을 맞으면, 그 이름을 잠시 잊게 된다.
그로 인해 죽을 생각까지 했던 나 자신까지도 잊을 수 있다.
그리고.
세찬 바람 속에서 나는 세복이를 돌아보았다. 몇 번을 보아도 친숙해지지 않는 그 까칠함. 그 날카로운 표정. 그러나 내가 갖지 못한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섬세하고 정교한 이목구비를.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그애의 표정은 어쩐지 스산해 보였다.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뭘?”
“그렇게 가만히 서서 바람을 맞고 있는 네 모습 말이야. 보고 있으면 기분이 이상해져. 눈 속에 손을 파묻었을 때처럼, 가슴이 시려. 네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낄 때면, 그걸 볼 때면 더 그런 기분이 들어. 왜 그런지는 모르겠어.”
세복이가 하는 말에는, 어떤 다른 뜻도 담겨 있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저 그애의 순수하고 솔직한 생각일 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지만, 정리하고 싶지 않았다. 머릿속의 혼란이 정리되었을 때 그것이 어떤 형태로 정리가 되어 있을지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세복이의 보금자리는 여전히 아늑했지만, 전에 왔을 때와는 달리 뭔가 깔끔하게 정리가 된 느낌이었다. 전처럼 잡다한 세간살이나 아기자기한 생활용품들이 많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 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니면 이곳에서 일상적인 생활을 하지 않았거나.
“오늘도 바람이 불었으면 좋겠다.”
온기가 서서히 올라오는 전기장판 위에 깐 깔개 위에 눕고, 이불을 덮으며 내가 말했다.
“무슨 소리야?”
“지난번에 여기서 잘 때, 바람이 불었었거든. 내가 밤에 깨어났을 때.”
“아아.”
세복은 귀찮다는 듯 한 마디를 내뱉고는 내 옆에 드러누웠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몸을 내 쪽으로 돌려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엄청 미친 바람 소리였겠네?”
“맞아 그랬어. 미친 여자가 막 우는 것 같은 그런 소리. 그걸 들으면서, 생각했지. 이렇게 따뜻한 방에 누워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그런 걸 두고 흔히 하는 말이 있잖아. ‘이불 밖은 위험하다’고.”
“맞아. 그랬지.”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까르르 웃었다. 웃음을 멈추고 나니, 약간 당혹스러웠다. 그애와 이렇게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웃을 수 있다니. 그럴 수 있는 사이라니. 뭔가 어색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우리가 함께 웃었다는 사실을.
“너랑 잘 수 있어서 좋아.”
“알아. 혼자 자는 게 싫은 거지.”
“아니. 그런 거 아니야.”
세복이는 내게서 시선을 거두고 똑바로 누웠다. 그리고는 한 팔을 머리 위로 올려 베개 밑으로 집어 넣었다. 편안하고 여유로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너니까 좋은 거야. 다른 사람이 아니고 너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