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박영민
유수연은 그날의 일에 대해서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날의 일이라는 건, 진기가 자신의 생모인 수연의 계모를 따라 떠나버린 날이다. 고장난 오복이를 수리하는 통에 발이 묶인 세복이가 미처 수연에게 가보지 못한 사이, 진기의 생모가 막무가내로 진기를 데리고 떠나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세복이가 유수연에게 조금만 더 늦게 갔더라면 그애는 죽었을 것이다. 그리고 강태석을 제압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카드를 나는 허무하게 잃었을 것이다. 그애는 세복이를 위해서나 나를 위해서나 그런 식으로 죽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그랬다.
강태석이 내게 내민 것은 틀림없는 유수연의 사진이었다. 단지 강태석이 내게 댄 이름이 그 이름이 아니었을 뿐이다.
-유영이라. 성은 유씨고 이름은 외자로 영.
-아저씨하고 어떤 사인데요?
-말해봤자 머하겠노? 머, 굳이 말을 하자면은, 애인쯤 되겠지.
-에이, 애인쯤 되겠지라뇨. 별로 깊은 사이 아니신가 보네, 꼭 찾으셔야 해요?
물론 이것은 내가 작정하고 찔러 보느라 한 말이었다. 그러나 내 말에 대한 강태석의 반응은 가히 내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그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곧 눈을 부릅뜨고 나를 빤히 노려보며 이죽대기 시작했다.
-그 가시나가 어떤 가시나인가 알키 주까? 내 목숨이라. 그 가시나 없으면 내가 죽어. 그만큼 사랑하는 여자다 이거라. 애인쯤 되겠지 라고 한 거는, 말하자면 애인이라는 표현으로도 부족하다는 뜻이라. 단디 들으소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중해방의 애송이 보스, 박성택이 조카님 박영민이. 조심하라꼬. 그 가시나가 어떤 가시나인지는 몰라도 되니, 일단 찾아서 내한테 넴기야 돼. 안 그러면 내가 갖고 있는 네 삼촌 그 머냐, 유에스비? 그거는 바로 검찰한테 넘어가는 기라.
웃기고 자빠졌네,라고 나는 속으로 뇌까렸다. 네가 내 앞에서 눈을 부릅뜬 걸 보니, 그 여자가 네 아킬레스건이 맞긴 맞구나. 잘 알았어. 정확하게.
그 유영, 아니, 유수연이 병원에서 위세척을 받는 동안 세복이는 내내 의자에 앉아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입술을 깨문 채 하염없이 맞은편 벽을 응시했다. 졸릴 법도 하건만, 한숨도 자지 않고 새벽까지.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바보같이 유수연과 함세복이 그저 절친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완전히 상극인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죽이 잘 맞아서 다행이라고, 이제 우리 세복이도 다른 여자애들처럼 알콩달콩 우정을 나눌 또래의 계집애가 생겨서 참 다행이라고, 그렇게만 생각했던 거다.
그러나 병실 밖에서 수연을 기다리는 세복이를 지켜보는 동안, 가슴 속에서 불길한 예감이 소리없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걸 막을 길이 없었다. 나는 왜 이렇게 둔했던 걸까. 수연을 바라보는 세복이의 눈빛이 행복하고 온화해 보이는 눈빛이 아니었다는 걸 왜 몰랐을까. 놓쳐서는 안 될 존재를 바라보는 절박함이 깃든 그 눈빛을 왜 이렇게 늦게 봐 버린 건지. 나 자신의 한심함에 머리를 치고 싶었다.
문제는, 그 유수연의 정체였다.
단순히 서글픈 가정사를 가진 내 또래의 그리고 세복의 또래의 예쁜 여자라고만 생각했던 그 유수연이 왜 강태석의 표적이 되어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