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iginal
20. 함세복
아마도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유수연을 만난 이후로 내가 제정신이었던 적은 별로 없었던 거라고 하는 게 맞겠다.
그날 밤에 그랬던 것처럼, 흔들며 뺨을 몇 번 두드리면 일어날 줄 알았다. 그러나 아무리 흔들어도 수연은 눈을 뜨지 않았다.
겁이 더럭 났다.
제발 눈 좀 뜨라고 외치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안 돼. 이대로 떠나지 마.
이렇게 허무하게 널 잃을 순 없어.
결국 나는 119를 불렀고, 뒤이어 담치 형의 전갈을 듣고 따라온 영민의 도움을 빌어 수연을 119 구급차에 실었다.
수연이 위세척을 하는 동안 영민이 내게 다가왔다.
"너부터 좀 진정해. 괜찮을 거야. 콜라 마실래?"
"의사가 뭐라고 해? 쟤 괜찮대?"
"죽지는 않을 건데, 죽을 고비는 넘겼대. 살아난 게 신기하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바보같이, 그 애가 내 곁을 떠날 가능성에 대해서는 단 일 퍼센트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그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전혀 못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서로에게 있어 언제든지 사라져도 상관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이제 수연은 내게 있어 그렇게 쉽게 없어져도 되는 사람이 아니었다.
벽에 머리를 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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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죽으려고 했지?"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앉은 수연을 본 순간, 내 입에서 그 말이 제일 먼저 튀어나왔다.
"죽으려고 빈 속에 깡소주를 그렇게 들이부었지. 아니야?"
대체 내 성질은 왜 이 모양인가. 마음은 그게 아닌데,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내가 들어도 화가 날 만큼 시니칼한 어조였다.
수연은 대답 대신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다가, 늘 그랬듯 부드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웃는 그애를 본 그 순간, 나는 그날 새벽, 가위에 눌렸다가 깨어난 그애가 내게서 무엇을 빼앗아갔는지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사실은, 짐작한 게 아니다. 내가 확인하기를 거부한 거다. 일단 확인하고 나면, 돌이킬 수 없으니까.
"그렇게 무서운 눈으로 보지 마."
수연이 나를 달래듯 입을 열었다. 그제서야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그애는 살아 있었고 아직은 나를 떠나지 않았다.
"진기 녀석, 그렇게 빨리 갈 줄 몰랐네."
"나도 몰랐어."
"문자라도 하지 그랬어."
"어차피 오지도 못했을 거야. 정말 갑자기 가 버렸거든."
"언제 간 거야? 혹시 네가 클럽으로 전화했던 날?"
"아마도."
미안하다고 말했어야 했다. 그날 영민이 녀석 친구 생일이어서, 라는 말이 입속에서 맴돌다가 사라지고 말았다. 그깟 게 뭐 어쨌다는 건가. 정작으로 내가 해야 할 말은 따로 있었다. 제발 부탁이니까, 떠나지 마. 나한테는 네가 필요해.
그러나 한 마디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수연은 배를 잡고 얼굴을 찡그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저기, 나.....나 물 좀 갖다 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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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잖아.”
영민이 녀석이 나 대신 수연의 병원비를 지불하러 원무과로 간 동안(물론 내가 부탁했다), 수연과 나는 환자와 보호자를 연기하며 마주앉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이 아니었다. 서로의 역할만 바뀌었을 뿐, 우리의 첫 만남도 이런 식이었다는 걸 뒤늦게 기억해냈다.
“나, 또 다른 이름이 있어.”
내가 듣고 있는지를 확인하려는 듯, 수연은 잠시 말을 끊었다.
“어릴 때 집에서 부르던 이름인데. ‘영’이야. 외자 이름이야. 유영.”
그닥 예쁜 이름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수연이 훨씬 낫다. 아무려면 어떤 이름인들 내 이름보다야 촌스러울 수 있겠는가.
수연은 계속해서 이야기했고, 나는 말없이 들었다. 아버지의 도박빚 때문에, 한밤중에 조폭들에게 납치당해 부산으로 끌려내려간 것. 그리고 도저히 인간이라 부르지 못할 괴물을 만난 이야기. 밤에는 노래방 도우미로, 또한 그 괴물의 성노예로 보냈던 일년 남짓한 지옥살이를.
“그자에게 내 본명 대신, 내가 아끼던 내 어릴 적 이름을 댔어. 그자는 아직도 내 이름을 영이라고 기억하겠지. 너무나 후회가 돼. 그 이름을 가르쳐 준 게 너무 후회가 되어서, 죽고 싶을 정도야. 머리카락을 다 쥐어뜯고 싶을 만큼.”
수연을 꼭 끌어안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애가 들려준 이야기 하나하나가, 내 혈관을 타고 흘러들어가 높은 고압 전류를 형성했다. 뇌세포며 말초신경 하나하나를 다 파괴할 기세로 달려든 전율이 온 몸을 훑고 지나갔다.
“아마 지금도 날 찾고 있을 거야.”
“못 찾아. 절대로.”
“무서운 사람이야.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사람이고. 언젠가는 다시 돌아갈 테고, 그 자의 손에 죽겠지. 그 전에, 그자의 손아귀에 다시 붙들리기 전에 죽으려고 거기까지 갔던 건데, 거기서.....”
수연은 갑자기 말을 끊었다. 그 순간 그애의 얼굴을 보는 게 두려웠다. 그러나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목에 가시가 걸리기라도 한 표정을 짓고, 수연은 포도알 같은 까만 눈으로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거기서, 널 본 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