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iginal
36. 유수연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는 데만 정신을 집중한 나머지, 안전장치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무리 방아쇠를 당겨도, 딸그락거리는 소리만 날 뿐 총알은 발사되지 않았다. 박영민이 내게 정말로 엉터리 장난감 권총을 선물했단 말인가. 뒤늦게 안전장치를 생각해내고 안전장치를 풀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어느 새 내 앞으로 다가온 그가,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아 권총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아이구 우리 애기 귀엽기도 해라. 어디서 요런 장난감 권총을 구했노?”
그는 권총을 휙 밀어 내 손이 전혀 닿지 않을 방 끝으로 밀쳐냈다. 권총은 방바닥을 빙글빙글 돌며 방 모퉁이에 맞고는 그대로 멈추었다. 내 마지막 희망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하기야 요새 아가씨들이 가스총이다 뭐다 해서 저런 거 잘 갖꼬 댕기데. 내 아까부터 네 젖가슴 한쪽이 볼록한 걸 유심히 봤다 아이가.”
역한 냄새를 풍기는 입과는 반대로 눈처럼 하얀, 아니 희다 못해 파란 이를 내보이며 웃는 그를 보며 나는 어디에서 솟아났는지 모를 증오로 이를 갈았다. 단 한번도, 이처럼 무섭게 그에게 분노했던 기억이 없다.
그의 앞에서 나는 철저하게 약자였다. 그를 무서워하기만 했고, 피하기만 했고, 도망치기만 했다. 단 한번도 그와 맞서 싸울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요런 앙큼한 년을 봤나.”
그가 내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오냐오냐 해주니 끝까지 지가 공주인 줄 알지. 내가 오늘 새벽까지는 기다릴려고 했는데, 바람이 기똥차게 신음소리 내는 발안 땅의 새벽이 올 때까지 내가 참고 기다릴라 했는데. 안 되겠다. 이 X같은 년. 감히 나한테서 도망을 쳤어. 감히.”
내 머리 위에 세워져 있던 링거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손등에 꽂힌 바늘을 따라 피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그가 내 옷을 걷어올렸다. 있는 힘껏 저항하는 동안 손등에 꽂힌 바늘이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운 통증으로 내 신경을 쑤셨지만 그래도 저항했다. 그는 내 위로 올라타더니, 내 치마를 걷어올리고 그때까지 한번도 하지 않은 짓을 했다.
내 팬티를 벗겼다.
그 순간, 나는 기억해냈다. 강태석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그는 내 몸을 탐했던 적이 없었다. 그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내가 하도록 강요했을 뿐이다. 그는 원래 여자를 안지 못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와 정상적인 성관계를 가졌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물론, 시도때도 없이 발가벗겨진 건 맞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다. 절대로 여느 남자들이 하는 식으로 그는 내 옷을 벗긴 적이 없다.
그랬던 그가, 여느 남자들처럼 내 몸을 탐하려 하고 있었다. 뭐가 잘못된 걸까.
자꾸만 힘이 빠져가는 가운데서도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강태석이 소리를 지르며 나를 놓고 자신의 뒤통수를 움켜쥐었다.
운명이 어쩌면 이다지도 얄궂은지 모르겠다.
내가 그렇게도 보고 싶어했던 그 얼굴이, 그 눈가의 흉터가, 나만큼이나 초췌하고 창백해진 모습으로 나와 강태석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강태석의 머리를 맞고 바닥에 떨어진 크리스털 재떨이는 곧추서서 빙글빙글 돌다가 마침내 옆으로 툭 쓰러졌다. 그가 잠시 일어나지 못하는 사이, 세복이는 내가 그 얼굴을 제대로 볼 사이도 없이 날렵하게 내 손등에서 링거 바늘을 빼냈다.
“일어날 수 있겠어?”
“응.”
“가자. 시간 없어. 서둘러.”
“가긴 어딜 가?!”
그 순간 여자보다 더 앙칼진, 더 신경을 긁어대는 쇳소리로 강태석이 소리쳤다.
“발안 땅에서, 저 바람 소리 들으면서 여자 눕히고 그짓하는 게 내 평생 소원이었는데, 이제 그 소원을 풀 판에 가긴 어딜 간다고!”
강태석은 일어나 나를 향해 달려들었고 나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강태석이 달려든 것은 내가 아니라 세복이었다. 곧이어 세복이의 비명 소리가 방을 가득 울렸다. 강태석이 세복의 위에 올라타 그애의 목을 조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X년. 한줌거리도 안되는 중해방 애송이놈의 깔치년. 네년이 날 막았어?”
강태석이 무서운 악력으로 세복이의 목을 조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냥 있을 수 없었다.
나는 링거대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향해 사정없이 날렸다. 그제서야 그는 세복이의 목을 조르던 손을 놓고 나를 향해 돌아섰다. 그의 이마에서 피가 흘렀고 튀어나올 듯 부릅뜬 눈에서도 핏발이 섰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내 뺨을 내리쳤다. 순간 고막이 나갔다는 걸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갑자기 한쪽 귀로 들어오는 모든 소리들이 아득해지면서 이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곧이어 내 머리채를 잡더니, 내 머리를 잡아 벽에 대고 짓찧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강태석이 나를 놓았다. 그와 동시에 내 얼굴로 뭔가 뜨겁고 물컹한 것이 사정없이 튀었다. 무심결에 나는 내 얼굴로 튄 것을 손으로 닦아 내 눈 앞으로 가져온 후 손바닥을 펼쳤다.
피였다.
진득진득한 피였다.
내 옆을 비스듬히 지나쳐 비껴가는 듯한 자세로, 강태석은 고꾸라진 후 내 바로 앞의 벽에 머리를 박고 흐물흐물 무너져내렸다.
“이런......씨.....발.....년.....”
그게 강태석이 세상에서 한 마지막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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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앞에, 영민이가 내게 준 권총을 든 세복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강태석의 손에 떠밀려 저만치 방구석으로 나가떨어져 굴렀던 그 권총을, 나는 잊고 있었다.
그 권총은 진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