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결
8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정말. ”
다시 현실의 의식을 되찾은 강인이 최초로 들은 말이었다.
“강윤, 부모님이랑 아직도 연락 안 돼?”
“두 분 다 지방 출장 중이라 지금 올라오시고 계신대.”
“도대체 술 마시다 말고 그 멀리 떨어진 K클럽까지 뭐하러 간 건지 알 수가 없어.”
“L씨 말로는 사보 갖다주러 왔다던데. 아마 취해서 그랬던 거 같아."
“별 짓을 다 하는군. 술 취하면 돌아 다니는 희한한 술버릇 있는 거 오늘 처음 알았다고 이 녀석 깨어나거든 누가 말 좀 하라구.”
눈을 뜬 강인을 처음으로 내려다 본 것은 민효였다.
“강인! 정신 들어?”
순식간에 강인의 눈 앞에 그가 익히 아는 얼굴들이 한꺼번에 나타났다.
“쨔샤? 너 돌았었냐?”
“느닷없이 행방불명되더니 왜 K클럽에서 발견된 거냐?”
“야, 이 녀석 혹시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린 거 아니야? 눈이 멍해.”
강인은 잘 돌아가지 않는 혀로 입을 열었다.
“나 어떻게 된 거야?”
“L씨한테나 물어봐 임마. 너 K클럽 지하 창고에서 머리 깨져서 쓰러져 있는 걸 지배인 아저씨랑 L씨가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어. 네가 죽은 줄 알았단다. 네가 사보 갖다 놓겠다길래 그러라고 해놓고 잊어버렸다는데 나중에 문 잠그려고 내려가보니까 난리도 아니더라고. 도대체 혼자 뭐하러 거기까지 간 거냐? 그것도 술 마시다 말고.”
진호가 숨가쁘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잠시 후 투덜거리며 칠득이와 용환이가 들어왔다.
“도대체 어떤 놈들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아?”
“평소 강인한테 원한 있던 놈들 있었던 거 아니야? 넌 혹시 짚히는 거 없냐?”
“별로요.”
여기서부터는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간단히 이야기하기로 한다. 지배인 아저씨가 경찰에 신고한 후 L씨는 즉각 용환이의 핸드폰에 연락을 취했다. 강인은 인근 병원의 응급실로 옮겨졌고 다시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무엇인가 둔중한 흉기로 얻어맞은 듯 두피가 갈라지고 머리뼈 역시 손상을 입었으나 천만다행으로 치명적인 뇌진탕은 면했다고 했다.
5시간 이상을 DICE EL멤버들과 칠득이 및 강인의 친구들은 수술실로 중환자실로 자리를 옮겨가며 병실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급기야 그들의 극성에 손을 든 의사와 간호사들이 면회를 허용한 덕택에 그들은 병실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강인은 아침이 다 되어서야 깨어났다. 그나마 머리를 다친 사람으로서는 기적에 가깝게 일찍 깨어난 것이었다.
“정말, 앰뷸런스로 응급실까지 실려가는데 난리도 아니었다. 눈물을 줄줄 흘리질 않나, 미안하다느니 사랑한다느니 이상한 헛소리를 해대질 않나. 뭐 기억나는 거 있냐?”
“아니 아무것도.”
“그럼 누가 네 머릴 갈겼는지도 모르겠군. 지배인 말이 일전에 K클럽 뒤집었던 고딩 깡패들 짓거리가 아닌가 하던데. 어쨌건 큰일날 뻔했어.”
“그래서, 모두들 집에도 안 가고 여기서 밤을 샌 거야?”
“그래 임마. 좀 미안하지? 오늘 밤 샌 값은 다음에 꼭 받아먹고 말 테다.”
“다음부턴 너랑은 안 마셔. 알았어? 안, 마, 셔. 또 취해서 돌아다니다 사고칠려구?”
한바탕 벌어진 소동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후 민효는 병원 복도에 있는 의자에 조용히 앉아 피곤한 몸을 달래고 있었다.
“많이 놀랐지?”
칠득이였다. 민효는 웃어 보이려 했으나 워낙 놀란데다 피로가 겹쳐 웃을 힘조차 나지 않았다.
“강인한테 가보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부모님 와 계세요. 그리고 이젠 강인도 쉬어야 해요.”
민효는 움푹 꺼진 눈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피곤해 보이는데 자기도 그만 집에 가서 쉬지 그래. 강윤 녀석도......”
강윤 녀석도 걱정하고 있을 거야라고 말하려다 칠득이는 입을 다물었다.
“괜찮아요. 정말.........우리 집 사람들은 병원하고 인연이 깊은가 봐. 한동안 병원과 담쌓고 지냈는가 싶더니 또 이런 일이.......”
민효가 손으로 얼굴을 감싸자 칠득이는 당황했다.
“울지 마. 강인도 깨어났고 머리도 멀쩡하잖아. 기억상실증도 없고.”
그러나 민효는 우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손을 내리고 힘없이 말했다.
“다들 너무 고마워요. 남자들의 우정이 이렇게 대단한 건 줄 몰랐어요. 난 우왕좌왕 수선 떨며 징징거릴 줄이나 알지. 이렇게 신속하게 응급조치하고 조용히 지켜보고 하지는 못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 난 쓸모가 없어.”
“강인을 사랑하나 보지?”
“예?........예. 그래요. 당연하잖아요. 오빠나 다름없으니까.”
“그런 사랑 말고.”
“무슨 말씀이세요?”
“음, 아냐. 하긴 이런 상황에서 할 말은 아니군. 내 말은, 자기는 할 만큼 했으니까 괜히 비관하지 말라구.”
칠득이의 격의 없는 ‘자기’라는 호칭이 싫지 않았던지 민효는 방긋 웃었다.
“저, 그런데요.......”
“왜?”
“강인의 사고......이것도 그 애도인가 하는 노래의 저주를 받은 건가요?”
칠득이는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강인이 다쳤다는 데만 정신이 팔려 ‘애도’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가. 그럴 수도 있는 건가.
“글쎄. 아닌 것 같은데. 왜냐하면 강인은 깨어났잖아. 자기 말마따나 바보라서 사신(死神)이 비켜 간 건지. 아니면 죽을 걸 액땜으로 그친 건지. 그래. 머리를 얻어맞고도 멀쩡한 걸 보면 돌머리이긴 돌머리인가 부다. 그럼 바보란 얘기군. 바보 앞에서는 ‘애도’ 교향곡의 저주도 맥을 못 추는구나?”
“너스레 하고는.......그럼 형도 바보라서 안 죽은 거 아냐?”
언제 왔는지 용환이가 칠득이 앞에 서 있었다.
“아까부터 듣자듣자 하니 자기라고 부르질 않나. 위로를 해 주질 않나. 수상한데? 이걸 그냥 두고 봐야 하나?”
“수상하긴 뭐가 수상해? 늬들이 나 상대 안해 주니까 삐져서 얘한테 온 건데.”
“그런 변명은 안 통하네. 가만 있자. 누구한테 이를까. 강윤한테 일러바쳐야겠다. 강인은 누워 있고, 강윤 녀석 성질 더럽겠다, 좋았어. 그 녀석 어디 갔지?”
“야, 야. 아서라 말아라. 차라리 강인한테 일러바치라구.”
갑자기 민효가 벌떡 일어서는 통에 두 사람은 놀라 투닥거리기를 멈추었다.
“그래.......맞았어. 기억의 전이야. 그건.......”
“에?”
용환이와 칠득이는 얼굴을 마주 보았다.
“무슨 소리야?”
“여선생님이 돌아가시고......내가 애도한다고 말하고.......한낮에 녹은 아이스크림........그래, 기억의 전이가 일어난 거야. 강인에게 들은 게 아니었어. 강윤 지금 어디 있어요?”
칠득이와 용환이로서는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를 얘기였다.
“강윤이라면 강인 병실에서 새우잠 자고 있을 걸. ”
민효가 허겁지겁 사라진 뒤 용환이가 말했다.
“어쩐지 강인네 집 사람들, 다 약간 사이코 기질이 있는 것 같지 않아요?”
“내가 방금 그 생각 하던 참이야.”
“참, 강인 머리 갈긴 녀석 말인데, 그 고딩 새끼들 맞는 것 같애. 강인도 기본 실력이 있지 한 놈한데 당한 것 같진 않고 여러 놈이 합동으로 한 것 같아.”
“그래서? 어떻게 될 것 같아?”
“현행범이 아니니 때려잡지도 못하겠고, 이거 심증은 백 프로인데 물증은 제로야. 답답해 미치겠어.”
“어쩌면 정말 ‘애도’의 저주였는지도.........”
민효는 강윤의 팔을 움켜쥐고 흔들었다.
“내 기억이든 강인의 기억이든, 어느 쪽이 너한테로 옮겨간 거야. 강인이 그런 얘기를 너한테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설령 했다 해도 네가 그 얘기를 다시 나한테 할 이유가 없어.”
강윤은 민효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다가 결국은 화를 내며 그녀의 팔을 뿌리쳤다. 그들은 T자로 갈라진 복도의 막다른 지점에 서 있었다.
“그래서 나보고 어쩌란 말이야?”
“너한테 옮겨간 기억.......누구 거야? 내 거야. 강인 거야?”
정체모를 의혹으로 가득 찬 민효의 퀭한 얼굴을 바라보며 강윤은 쓸쓸히 웃었다.
“모르겠어. 내가 일부러 너희들의 기억을 빼앗으려고 시도한 게 아닌 이상, 자연스럽게 내 머릿속에 흘러들어온 것인 이상 어느 쪽의 기억인지는 알 수 없지.”
민효는 강윤의 어깨 너머로 벽에 걸린 거울에 비치는 크고 둥근 괘종 시계를 쳐다보았다. 댕, 댕.......그녀 자신의 머리가 괘종 소리에 맞춰 빙글빙글 둥글게 도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 번, 두 번. 계속해서. 그녀는 눈을 크게 치떴다.
“이상해. 뭔가.......어째서 하필이면 그 때의 기억이 너한테로 옮겨갔을까? 내가 ‘애도한다’고 한 말, 나는 기억 못 했어. 그렇다면 그건 강인 거야. ”
“그렇지 않아. 그건 네 기억이야. 미안해. 그 기억이 들어온 건, 강인이 ‘애도’를 부르던 M대학에서였어. 들어왔을 때 네 기억이라는 걸 금방 알았어. 안 그러고서야 어떻게 네가 강인을 사랑한다는 걸 알 수 있었겠냐구.”
강윤은 뼈가 으스러지게 민효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묻었을 때 그는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그녀에 대해 인내력을 지켜 왔는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때마침 용환이와 칠득이가 복도를 따라 걸어오고 있었다.
“글쎄 ‘애도’의 악보 말이야. L씨 말이, 원보도 아니고 사보 뜬 걸 가져간 건데, 안 돌려줘도 상관없는 걸 돌려주러 온 건 형을 제외하고는 강인이 유일하대잖아.”
“난 원보 가져갔었어.”
“사보 뜨러 가져간 거잖아. 전부 고스란히 다시 돌려줬고. 어? 저거 뭐야?”
강윤과 민효를 발견한 용환이는 질겁을 했다. 그러나 칠득이는 말없이 용환이의 입을 막고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나 버렸다.
“저럴 땐 방해하는 게 아니야.......and his dark secret love, does thy life destroy......."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