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하고 팔씨름 한 판 하시는 건 어떨까요?”
그녀의 목소리는 아주 낮고 가늘었어. 시원스럽게 생긴 얼굴과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목소리였지. 그때쯤 해서는 그녀에게 갑작스레 쏠렸던 지각신경이 제자리에 돌아와 있었기 때문에 ‘이 아가씨 참 맹랑한 아가씨로구나’하는 생각을 하며 그녀를 쳐다보았어. 아무래도 내가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보였던 걸까.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씨익 웃었어. 마치 ‘내가 우스워 보여? 과연 그럴까?’라는 말을 말 대신 표정으로 전달하고 있는 듯했지. 그건 확실히 말로 하는 것보다 훨씬 설득력 있는 표정이었어.
아까도 말했지만 팔씨름은 말이지. 팽팽하게 당겨진 두 개의 화살이 나란히 활시위를 떠나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거야. 겉으로는 서로를 겨누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서로를 겨누는 것이 아니야. 결국 그 화살이 꽂히는 과녁은 ‘네’가 아닌 ‘나’야. 내 상대를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기준으로 삼아 나를 시험하는 것, 그게 팔씨름이야. 그리고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은 다름아닌 우리의 집중력과 의지력이지. 의지와 또 다른 의지의 대결이라는 관점에서, 나는 내가 겨루어야 할 또 하나의 의지가 여자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에 적쟎은 호기심을 느꼈어. 적어도 겉으로 보았을 때, 그 의지의 표상은 확실히 내 마음을 끌어당기고 있었거든. 그러나 그 의지가 여자의 의지라는 것이 내 마음을 그만 불편하게 하고 말았어. 더구나 겉으로 보아서는 이렇다 할 물리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가냘픈 여자를 상대로 싸워야 하다니, 내 자존심이 말이 아니라고 생각했지. 그녀는 그런 내 마음을 꿰뚫어 본 거야.
“내가 여자라서 그러는 건가요? 나한테 져도 졌다고 소문내고 다니지 않을 테니 안심하세요. ”
그 말에 그녀와 내 주위에 있던 친구들이 일제히 폭소를 터뜨렸어. 그게 진담이 아니라 그녀가 나를 도발하려고 하는 말이라는 것쯤 어느 바보가 들어도 모를 리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 말을 듣고 나니 자존심보다 강하면서도 동시에 자극적인 묘한 흥미가 생겨나더군. 나는 승낙의 표시로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무척 우아한 몸놀림으로 내 앞에 앉아 자신의 손을 내밀었어. 내게 손을 내민 모습은 여자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남성적인 기품이 넘치고 있었어. 나는 곧 내가 상대해야 할 의지가 그렇게 만만하지 않으며, 오히려 나를 충분히 압도할 수 있음을 깨달았어. 동시에 매력도 있었지. 그 손을 잡은 순간 쌀알갱이같은 열기가 몸 안에서 솟구쳐 올랐지만 나는 신경쓰지 않았어. 그저 내가 상대해야 할 손과 그 손이 가진 힘에 신경을 집중했지. 곧 시합은 시작되었고 우리는 서로의 손에 힘을 주기 시작했어. 생각보다 그녀의 그 가느다란 팔에서 나오는 힘이 무척 강해서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어. 그제야 나는 내가 잡은 팔이 보기에는 얼마나 가녀리고 연약한 팔인지를 알았어. 그 전까지는 그녀의 팔을 자세히 살필 겨를이 없었다니까. 그 점이 정신이 하마터면 흐트러뜨릴 뻔했지만 나는 곧 다시 승부에 열중했어. 내 손에 그녀의 힘이 가해지면서 나는 내 손을 타고 전해져 오는 열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그녀의 의지의 실체를 알 수 있었어. 매우 냉철하고도 고결한 의지였지. 승부와는 상관없이 나는 그 의지를 존중해야 했어. 나는 상대가 여자라는 사실을 잊은 채 내 힘을 모두 발휘했고 결국 땀이 밴 그녀의 손을 옆으로 꺾는 데 성공했어.
그녀의 손이 옆으로 넘어진 순간 나는 마치 그녀의 손이 아닌 그녀 자신이 옆으로 넘어진 듯한 착각에 사로잡혔어. 그래서 재빨리 그녀의 손에서 내 손을 빼고 그녀를 일으켜 세우려고 벌떡 일어선 순간 그게 내 착각임을 깨달은 거지. 나는 한순간 내 착각이 착각으로 끝난 것에 낭패감마저 느끼며 그녀를 쳐다보았어. 그녀는 아쉽다는 듯 어깨를 으쓱 치켜올렸지만 갑작스럽게 일어선 나의 행동이나 나의 눈빛에 동요하지 않았어. 내 눈을 쳐다보지도 않았고. 왜 그때 서운하다는 의식이 주사 바늘처럼 날카롭게 머리를 찔렀을까. 아무튼 나는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어.
힘으로 여자에게 이긴 건 전혀 자랑할 일이 못 되지. 그 엄연한 사실 앞에서 나는 그녀에게 괜히 이긴 게 아닌가 하는 자책감마저 느끼며 그녀가 자리에서 사뿐히 일어나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어.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별다른 이유 없이 잠을 설쳐야 했어. 새벽녘에 겨우 풋잠이 들었는데, 꿈에 잠깐 그 여자를 본 듯했어. 자신만만하게 내게 다가와 팔씨름을 하자며 손을 내밀었던 여자, 지고도 이렇다 할 반응 없이 순식간에 내 눈앞에서 사라져 간 그 여자를 말이야.
여기까지 이야기한 찬웅은 냉수를 한 컵 가득히 들이키고는 한참을 쉬다 다시 말을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녀를 다시 만났어. 그녀는 어글리 덕스 클럽에서 알게 된 나의 친구 데렉과 잘 아는 사이였어. 데렉의 여자친구가 그녀의 친구였거든. 게다가 재현 역시 그녀를 잘 알고 있었다는 걸 알고 난 놀라지 않을 수 없었지. 이런 일로 신이 만들어 주신 우연에 감사하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좌우지간 나는 재현에게 그녀에 대해 자세히 알려달라고 부탁했어.
‘그때 너하고 팔씨름 했던 아가씨? 아아, 마이어 말이군.’
‘마이어?’
‘응. 다들 마이어라고 불러. 정확한 이름은 나도 몰라.’
‘한국인인가?’
‘말투를 들어서는 그런 것 같아. 정확한 건 데렉한테 물어봐야 알 거야.’
그래서 데렉을 찾아가 확인해 보니 그녀는 한국인이었어. 나는 그 사실에 기뻐하는 스스로에게 이상한 경계심을 느끼기 시작했어. 그때까지 나는 내가 그녀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 자신에게 물어보지 않았던 거야. 다만, 그녀를 보고 난 그 일요일 이후 내가 이유없이 들떠 있다는 것만이 분명했어. 그건 얼마든지 단순하게 표현할 수 있는 거지. 즉 ‘난 그녀에게 반했다’라고.
그걸 깨닫고 난 후 나는 혼란에 빠졌어. 그러나 기분 나쁘지 않은 혼란이었지. 우선 나는, 적적하고 단조로우며 우울하기까지 했던 내 일상과 그 일상을 이겨나가는 내 마음가짐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곰곰이 되씹었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그토록 깊은 행복을 가져다 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어. 늘 불안하고, 늘 들떠 있으며, 그로 인해 무서운 속도로 지나쳐가는 시간들이 내게는 어떤 의미에서는 고통이었어. 너도 알다시피 나는 결코 쉽게 누군가를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고, 또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었다 해서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스타일도 아니야. 물론 적극적으로 상대에게 다가선다는 건, 내게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지. 그런 내게, 평범한 일상 가운데에서도 문득 그녀를 떠올리기만 하면 가슴이 방망이질치는 두근거림을 감수하며 매일을 보내던 내게 뜻하지 않은 기회가 다가왔어. 즉, 그녀를 소개받을 기회였어. 그녀는 재현과 데렉과 데렉의 연인과 그 외에도 많은 남녀 친구들이 합석한 파티에 나타났어. 그 덕에 우리는 정식으로 소개받지는 않았지만 아주 자연스럽게 통성명을 하고 말을 터놓는 사이가 되었지. 그러나 어째서였을까. 매번 마이어를 대하는 나의 태도는 퉁명스럽기 짝이 없었어. 그래, 너도 알지. 좋아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냉담한 내 태도. 그러나 내가 마이어를 대하는 태도는 보통 이상으로 심했어. 나는 그녀를 호의적으로 상대하기는커녕 꼴도 보기 싫다는 듯 피하기 일쑤였고 그렇지 않으면 그녀가 입을 열 때마다 매번 면박조의 대답을 해서 그녀를 난처하게 만들었지. 다들 내가 마이어를 싫어하는 모양이라고 쑥덕거릴 정도로 말이야. 그러나 마이어는 전혀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어. 그녀는 나의 존재를 그저 자신의 주위에 맴도는 많은 친구들(성별을 가릴 것 없는) 중 하나로만 여기는 듯했어. 나로 인해 그녀가 난처해진다거나 자존심을 구기는 징후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어. 심기가 언짢아진 나는 정말로 매번 그녀를 매정하게 대했어. 그러한 태도가 계속되자 그녀 역시 뭔가를 느끼기 시작한 것 같았어. 그때부터는 그녀도 나의 퉁명스러운 행동이나 말투에 뼈 있는 대답으로 응수하기 시작했지. 이를테면 몸이 아파 집 안에 누워 있었다는 그녀를 ‘자기 건강 못챙기는 한심스러운 아가씨’로 몰아붙이면 ‘내가 언제 너한테 병원에 데려가 달라고 했냐 약을 달라고 했냐’는 식으로 말이야.
그러던 어느 날, 그녀와 나는 기어코 다시 정면으로 맞붙게 되고 말았어. 바로 데렉의 여자친구인 수쓰엔의 생일이었지. 생일파티는 데렉의 집에서 열렸고 거의 모든 친구들이 초대되었어.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자리를 박차고 찾아가 데렉의 집에 기세좋게 들이닥쳤지만, 내가 마이어를 보기 위해 그 집에 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재현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을 거야. 꽤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파티는 별로 떠들썩하지 않았어. 그렇다고 해서 민망할 만큼 썰렁한 분위기도 아니었지. 몇 년을 함께 해 온 친구들이 많이 모여 그랬는지 조용하고도 오붓하고 단란한 그야말로 가족적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그런 분위기였어. 평소 파티에 나타났다 하면 분위기 메이커를 자처하던 친구들마저도 그날은 어찌된 셈인지 이렇다 할 돌출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던 거야. 어쩌면 바로 그 기막히게 단란한 분위기야말로 그날 나로 하여금 그렇게 심한 말을 하게끔 만든 원인인지도 몰라. 설령 분위기 때문이 아니었다 해도 뭔가 내 안에서 마이어를 상처입히고 싶어하는 욕망을 충동질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해.
음식은 조촐했어. 생일 케이크를 제외하고는 훈제치킨과 튀긴 감자와 콜라가 전부였지만, 우리 친구들 중 식탐이 그리 강한 사람은 별로 없었고 다들 음식보다는 간만에 얼굴이나 보자는 분위기였어. 시간이 흐르자 남자들은 담배를 피우거나 비디오를 보기 시작했고 한바탕 시끄럽게 수다를 떨던 여자들은 패를 나눈 후 구석으로 물러가 조근조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어. 나는 소파에 앉아 테이블 위에 놓인 잡지를 뒤적였지만 신경은 자연스럽게 마이어에게 집중되어 갔지. 결코 의식적으로 집중했던 건 아니야. 너도 알다시피 내가 마이어에게 느끼는 것과 같은 종류의 감정은 의식을 통제하는 걸 방해하는 작용을 하지. 마이어는 어딘가 모르게 불편해 보이고 안색이 다소 좋지 않았어. 그날따라 유난히 하얗게 분칠을 한 화장을 감안한다 치더라도 좀 창백해 보이는 느낌이었어. 그날 그녀의 옷차림은 전체적으로 중국식 컨셉이었다고 설명할 수 있겠는데, 청록색 차이나 원피스에 틀어올린 머리에는 짧고 장식이 없는 비녀가 꽂혀 있었어. 그녀는 처음에는 혼자 외따로 떨어져 음식을 집어먹기도 하고 사람들과 짧은 대화를 나누기도 하다가 이내 수쓰엔 한 사람만을 상대로 오랫동안 대화를 했어. 대화라기보다는 수쓰엔의 일방적인 긴 이야기―아마도 신세타령이었으리라 생각되는―를 오랫동안 참을성 있게 들어 주더군. 그러다 데렉의 친구인 릭이 그녀들의 대화에 끼어들자 나는 그만 신경질이 났어. 마이어에게 지나치게 우호적이라고 생각되는 릭의 태도에 질투를 느꼈던가 보지. 그러던 어느 순간 수쓰엔이 마이어에게 탁자 위에 있던 손톱깎이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는 소리가 들렸어. 마이어는 지체없이 내가 앉아 있던 소파 쪽으로 다가와서는 바로 내 앞에서 손톱깎이를 집으려고 허리를 굽혔어. 내 눈에 그녀의 비녀가 또렷하게 들어온 순간, 나는 내 의지가 결코 명령하지 않았던, 그야말로 전혀 계획에 없었던 한 마디를 불쑥 내뱉고 말았어.
“네 머리카락이 국수냐? 머리에 젓가락 꽂고 다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