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의 여름
18. 유수연 (유영)
웨이크 업에서 세복이를 만나기 위해서는, 박영민이 웨이크 업에 들르지 않는 시간을 알아야 했다. 그러자면 싫어도 박영민의 스케쥴을 파악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세복이와 죽어도 마주치지 말아야 할 사람이 있었다.
다름아닌 아키였다.
박영민의 말로는, 그는 원래 삼일의 조직원 출신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요 근래는 삼일을 탈퇴하고 혼자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돈다고 했다. 그러면서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니 되도록 가까이하지 말 것을 내게 당부했다. 혼자 돌아다니는 건 사실이지만, 여자를 너무나 밝히는 사람이라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중해방 조직원들 또한 같은 얘기를 내게 들려 주었다. 그들의 말로는, 이제 겨우 스물 세 살이라고 주장하는 아키의 얼굴이 삼십대 중후반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심하게 삭은 이유가 바로 여자 때문이라는 거였다. 피부는 가무잡잡했고, 눈매가 음산하게 처지기는 했지만, 묘하게 퇴폐적이면서 섹시한 매력이 있는 사람이었던 그는, 제대로 깎지 않아 텁수룩하게 자란 머리를 부스스하게 헝클어뜨린 모습이었다. 나와 영민 그리고 세복이보다 한 살 어린 그는 영민이를 형이라고 불렀고 나를 영 누나라고 부르며 친근하게 대했다.
야성미 넘치는 외모와는 달리, 그의 태도는 무척 부드럽고 다정했다. 왜 그가 여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은지 알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웨이크 업에 오는 사람들 중 어느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았다.
그가 대화를 나누는 유일한 상대가 바로 나였다.
처음 만났을 때를 꽤 또렷하게 기억하는 건, 아마 그의 인상이 워낙 강렬하기도 했지만, 그가 나를 보자마자 뜬금없이 던진 질문 탓도 있을 것이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내 앞으로 다가와서는 나를 한참이나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느닷없이 질문을 던졌다.
"누나, 나 몰라요?"
내가 그를 잠시 쳐다보자, 그는 약간 의혹이 담긴 눈길로 내게 웃어 보였다. 그러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 역시 아닌가."
"누굴 말하는 거야?"
"영 누나 아니에요?"
깜짝 놀랐다. 처음 보는 사람이 내 이름을 알다니. 그러다 곧, 누군가에게서 들었나 보다 하고 생각하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는 대답했다.
"영이 맞긴 한데, 난 널 오늘 처음 보는 걸. 넌, 이름이 뭐니?"
"김재경이에요. 다들 아키라고 부르죠. 누나도 아키라고 부르면 돼요."
"넌 몇 살인데?"
"스물 셋이요. 참고로 정신연령은, 열 다섯 살에 멈췄습니다?"
윙크를 하며 웃는 그는, 확실히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겉늙어 보이는 얼굴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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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해방 애들은 거의 다 과거의 내 똘마니들이니까,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지만, 혹시 너한테 개수작 거는 녀석 있으면 바로 얘기해. 알았지?"
내 원룸을 찾아온 세복이가 그렇게 말하며 씨익 웃었다.
아닌게아니라, 아키를 제외하면 그다지 내게 추근대는 사람은 없었다. 처음에는 나를 서먹하게 대했던 사람들도 차츰 내게 친근하게 대했다. 일도 차츰 손에 익기 시작했다.
이대로만 지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지만, 단 한 가지 문제는 아키였다. 그는 올 때마다 거의 일을 하기 힘들 정도로 집요하게 나만을 붙들고 있었다. 차츰, 아키가 영을 좋아한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돌기 시작했다. 난처한 것은, 중해방 사람들의 말로는 아키가 소문난 색마이기 때문에, 그에게 일단 걸려들면 빠져나오기 쉽지 않을 거라는 거였다.
다행히 세복이가 나를 만나러 오는 시간은 아키와 거의 겹치는 법이 없었다. 낮에는 일을 했기에, 세복이가 나를 찾아오는 시간은 꽤 늦은 시간이었다. 반대로 아키는 초저녁에 들러서 나를 상대로 이런저런 잡담을 하며 마시고 싶은 술을 한 두 잔씩 마시다가 돌아가는 게 전부였다.
"참 청초한 사람이네요."
어느 날 아키가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슬쩍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걱정 말아요. 난 청초한 사람은 안 건드리니까."
"사람, 잘못 봤어."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
"나 윤락가에 끌려가 노래방 도우미로 1년 넘게 일했었어.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 아니야."
"그래요?"
아키는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놀라운데요. 누나 애인, 엄청 유명한 사람이라던데. 뭐 전투복이라고 했던가?"
"세복이 말이야?"
"아무튼요. 그 사람도 그걸 알아요?"
"그럼."
아키는 잠시 말이 없었다. 잠시 후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사람 여자라면서요?"
"응."
"그러면 누나, 레즈비언인 거네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그 전에도 여자 좋아한 적 있었어요?"
"없어."
"흠."
그는 씨익 웃고는, 잠시 뭔가 생각에 잠기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역시, 같은 사람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지?"
"뭐가?"
"전에 누나랑 엄청 닮은 사람을 만난 적이 있어요. 뭐 알고 지낸 건 불과 두 달 정도였지만. 그 사람 이름도 영이었어요. 처음 봤을 때 같은 사람인가 해서 깜짝 놀랐는데, 역시 아닌 것 같네요. 같은 사람이면, 날 못 알아볼 리 없는데."
"그래? 묘한 우연의 일치네."
이때까지만 해도, 지연이가 살아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꿈도 꾸지 않았었다.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던 것이다.
"뭐 그건 그렇고, 누나가 누나 옛날 얘기 해 줬으니까, 나도 내 얘기 좀 들려줄까 하는데, 어때요?
그렇게 아키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나 사실은, 사생아예요."
그의 어머니는 혼외정사로 그를 낳았다고 했다. 그의 아버지는 엄청난 부잣집의 외동아들이었지만, 집안에서 정해준 여자와 결혼해야 했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와 결혼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의 어머니는 할 수 없이 자신의 남동생의 호적에 그를 올렸고, 그래서 그는 어머니의 성을 따른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세복이를 떠올렸다. 어쩌면 그렇게도 사연이 비슷할까. 단지 차이가 있다면 아키의 아버지는 아들을 외면한 갑부였지만, 세복이의 아버지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요절해 버렸다는 차이 정도일까. 어찌됐건, 아키의 사연은 나를 적잖이 마음아프게 했다.
아키는 처음 만난 날 내게 자신의 본명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나는 그 본명을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만약 내가 아키의 본명을 일찍 기억해냈더라면, 그랬다면.
그 모든 상황을 되돌릴 수 있었을까. 그건 알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