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의 여름
20. 유수연(유영)
커피를 마시지 않는 세복이를 위해, 제철 과일과 탄산수에 얼음을 넣어 만든 에이드를 자주 만들었다. 대개는 수제 자몽청을 써서 자몽에이드를 만들었지만, 특별히 향이 싱그러운 복숭아나 자두를 사서 에이드를 만들기도 했다.
탄산음료를 좋아하는 세복이는 그걸 마실 때마다, 감탄을 넘어서서 경이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다. 더할 나위 없는 찬사가 내게 쏟아졌다.
"진짜 이렇게 맛있는 거 처음 먹어 봐."
세복이는 거의 매일이다시피 내가 숨어있는 원룸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 원룸은 세복이와 내가 있던 빌라보다는 쾌적하고 깔끔했지만, 나를 편안하게 하지는 않았다. 매주 웨이크업이 문을 닫는 월요일과 손님이 거의 없는 목요일에 세복이의 빌라로 돌아온 후에야 나는 마음의 안정을 찾곤 했다.
"같이 지내면 매일 만들어 달라고 할 텐데."
"곧 같이 지내게 될 거야. 그리고 마시고 싶을 때 언제든지 얘기해. 만들어 줄게."
"진짜지?"
"응. 자두 많이 사 놔야겠다."
사실은, 웨이크 업으로 오라고 하고 싶었다. 웨이크 업이라면 모든 재료와 도구가 있어서 만들기도 편했고, 모두가 우리의 관계를 아는 이상 세복이와 내가 공개적인 데이트를 즐긴다 해서 뭐라 할 사람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복이에게 낮에 웨이크업으로 오라는 말을 하지 못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세복이가 낮에 일을 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아직 영민이와 세복이가 화해를 하지 못해 서로 얼굴을 마주치지 않는 게 좋기는 했지만, 그것도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아키였다.
아키가 나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퍼져 있었다. 그러나 아키와 대화를 나눠 본 나는, 아키가 나를 여자로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나만을 상대하려 하는 아키를 내치거나 거부하지 않았다.
"누나, 본명이 영이에요?"
"아니. 그건 내 수호명이야."
"수호명?"
"외가집에서 내게 따로 붙여준 이름이야. 나를 지켜주는 이름이지. 천주교에서의 세례명하고 비슷한 뭐 그런 거야."
"아하. 그러면, 본명은 뭐예요?"
"가르쳐주기 곤란한 걸."
현재 유수연은 강태석과 함께 실종된 상태다. 강태석이 나를 수연이 아닌 영이라는 이름으로 찾아다녔기 때문에 경찰이 쉽게 내 신원을 파악하지는 못했을 테지만, 그래도 섣불리 본명을 가르쳐주는 건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너무하네. 난 내 본명 가르쳐줬는데."
"미안해. 잊어버렸어."
사실이었다. 그 이름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면 좋았을, 설령 잊었다 해도 일찍 기억해냈더라면 좋았을 그 이름을 나는 잊어버렸다.
그 아키가 평일 낮이면 거의 매일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에, 세복이에게 평일 낮에 웨이크 업으로 오라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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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누나."
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 웨이크 업은 다른 날보다 음산하고 조용했다. 담치 삼촌은(나는 담치 형을 담치 삼촌이라 불렀다) 아예 요즘은 내게 음악 선곡권을 넘긴 상태였기에, 오늘 같은 날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나는 포티쉐드를 틀어놓고 바 이곳저곳을 정리하고 있었다.
"여기 와서 잠깐만 서 볼래요?"
나는 시키는 대로 아키의 옆에 가서 섰다. 아키는 나를 보고 씨익 웃었다. 나도 아키를 향해 웃었다. 아키는 고개를 까닥거리며 윙크를 해 보였다.
"나, 누나한테 뭐 부탁할 게 있는데."
"뭔데?"
아키는 저만치에서 담치 삼촌을 상대로 잡담을 하는 박영민을 슬쩍 쳐다보고는, 내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속삭였다.
"누나 팔 좀 만져봐도 돼요? 좀 궁금한 게 있어서."
나는 아키의 눈을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역시, 섹시한 눈매로 눈웃음을 치고 있기는 했지만, 나를 유혹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다만 나의 어떤 부분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시키는 대로 그에게 순순히 내 팔을 내밀었다.
아키는 조심스럽게 검지 손가락을 들더니, 내 팔꿈치 안쪽에서 손목으로 내려가는 부분을 조심스레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그러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어느 새 웨이크업 안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담치 삼촌조차도 입을 벌리고 우리를 보고 있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아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내 팔에서 손가락을 떼고는 다시금 고개를 내저었다.
"이야, 이거."
"뭐야? 무슨 문제 있어?"
"잠깐 귀 좀 빌려 줄래요? 그렇게 가까이는 말고요."
나는 순순히 아키를 향해 몸을 수그렸다. 아키는 목소리를 한껏 낮추어 내게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누나 피부, 장난 아니에요. 남자들이 이런 피부 안으면, 미친다고요. 혹시 누나를 알았던 남자들이 누나를 순순히 놓아주지 않으려고 스토커처럼 난리 치거나 한 적 없어요?"
그런 남자가 어디 있었겠냐고 되물으려던 찰나에 강태석이 생각났다. 그렇다, 비록 남자는 아니지만, 세복이 또한 그렇다. 지금도 입버릇처럼 내게 말한다. 다시 또 그렇게 말없이 사라졌다간 그냥 두지 않을 거라고.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아키는 씩 웃으며 잠시 후 대답했다.
"누나의 피부에 홀려서 그런 거예요. 하지만 그 남자들하고 제대로 잔 적은 없죠?"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이건, 누나가 진짜 내 친누나 같으니까 누나 생각해서 해주는 말인데."
아키는 더 가까이 귀를 빌려달라는 손짓을 했고 나는 순순히 아키의 입에 귀를 바싹 갖다댔다.
"만약 어떤 남자가 누나를 몹시 귀찮게 하면, 눈 딱 감고 그 남자랑 자 버려요. 그러면 그 남자, 다시 누나를 안 괴롭히고 두말없이 떠날 거예요."
"그건 또 왜 그런 건데?"
"그러니까 이런 피부, 누나가 가진 이런 피부를 가진 여자들은, 유감스럽게도 모든 신경이 피부에 다 있어서 말이죠. 미안하지만 누나의 그걸로는 남자들을 만족시키지 못해요. 말하자면, 누나가 그런 유형에 해당하는 여성인 거죠."
"너 별걸 다 아는구나?"
"그럼요. 열 다섯 살 때부터 같이 잔 여자가 어림잡아 백 명은 될 텐데."
나는 어이가 없어 아키를 노려보며 웃을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