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팩더블 2 웨이크 업 27)

란의 여름

by Kalsavina

27. 함세복



집에 오니 새파랗게 질린 수연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그녀는 대뜸 나를 붙들고 어디를 다쳤는지부터 샅샅이 살폈다.

정말로 그녀가 내 아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하다가,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음을 깨닫고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어떻게 된 거야? 영민이는 만났어?"

"그러기는 싫은데, 매번 그 자식 신세를 지네. 오늘은, 그 자식이 적시에 안 왔으면 나도 내가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겠다."

도대체 얼마나 놀랐기에 이렇게 질린 표정을 하고 기다렸을까 생각하니 수연에게 못내 미안해졌다. 수연은 나를 부둥켜안고 잠시 내 가슴에 머리를 묻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를 안은 그녀의 팔이 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침묵이 그 어떤 오열이나 절규보다 날카롭게 귀를 찢고 들어왔다.

어떻게든 그녀를 달래고 싶었지만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그 상황에서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키스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많이 놀랐지? 미안해."

"휴대폰 전원은 왜......"

"배터리 충전하는 걸 깜박했더니, 그새 꺼진 줄도 몰랐어."

어느 새 많이 자라서, 어깨에 닿을 만큼 길어진 수연의 머리카락을 나는 손으로 쓸어내렸다.

"나, 함세복이야. 그렇게 쉽게 잘못되지 않아. 네가 수호명까지 지어줬잖아. 안 그래? "

그제서야 수연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절대로 포기할 수도 빼앗길 수도 잃을 수도 없는 미소였다.

거의 대부분의 짐을 아지트에서 옮겨 오기는 했지만, 미처 빼먹고 가져오지 못한 두 가지가 있었다. 퇴근길에 오면서 들러서 두 가지를 가져올 계획이었는데, 오복이를 내려 아지트 문 앞으로 다가서자마자 놈들에게 둘러싸이는 바람에 가져오지 못했다. 놈들이 물러간 후, 영민이 녀석이 보는 앞에서 가지고 나올 수는 있었겠지만 차마 그러기는 싫었다.

여전히 내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복이를 타고 속력을 내는 데 바빠서, 휴대폰이 꺼진 줄도 몰랐다. 영민이 녀석과 수연이 계속해서 보낸 전화며 문자를 하나도 못 받은 이유였다.

그날 밤 잠자리에서, 우리는 정말 어느 때보다 격렬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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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게 쌍둥이 언니가 있었다는 사실을, 수연은 내게 한번도 얘기한 적이 없다. 하지만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일러준 건 다름아닌 수연의 이복 남동생 진기였다.



-누나, 비밀 얘기 하나 해 줄까? 우리 누나에 관한 건데.

-비밀 얘기? 뭐야? 말해 봐. 네 누나 일이면 애인인 내가 당연히 알아야지.

-우리 누나, 사실은 쌍둥이였어.

-쌍둥이? 수연이랑 똑같이 생긴 애가 하나 더 있었다고?

-응.

-그러면, 걔는 지금 어디 있는데? 수연이 쌍둥이 자매 말이야.

-7살 때 교통사고로 죽었대.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아아.

-증거 있는데, 보여줄까?



진기가 서랍장에서 꺼내 보여 준 몇 장의 사진을 기억하고 있다. 단발머리를 한 여자아이 쌍둥이 중 하나가 수연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타인의 가족.

도대체 가족이라는 존재와 함께 산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가끔 궁금할 때가 있었다. 그래서 수연 남매와 함께 시간을 보냈었다. 그리고 어쩌면 이런 느낌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게 된 건, 수연과 함께 살게 되면서부터였다.

깔깔대며 웃는 웃음을 미처 멈추지 못하고 함께 오복이에 올라타 시동을 걸고 달리던 기억들, 함께 야시장에서 군것질을 하던 기억, 밤이면 서로 리모컨을 쥐고 자신이 좋아하는 TV 프로를 보겠다고 다투던 기억. 제발 한 시간만 더 자게 해달라며 성모 마리아를 찾는 수연을 간질여서 비명을 지르게 만들어 아침잠을 깨우던 기억. 야한 영화를 보며 맥주를 마시다가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면 둘이 함께 누워 뒹굴고 있던 기억.

아침잠이 많은 수연이 눈을 비비며 손수 만들던 김밥. 그리고 수연과 함께 살기를 정말 잘했다고 생각하게 했던 그녀의 특제 자두에이드. 그건 단연코 지금까지 내가 맛본 그 어떤 탄산음료와도 비교할 수 없는 천상의 맛이었다.

영민이 녀석에게는 이런 얘기들을 하지 못했다.

사실, 녀석에게 전만큼 화가 나 있지는 않았다. 단지 자존심, 개도 안 물어갈 빌어먹을 내 자존심을 굽히기 싫었을 뿐이다. 오늘, 녀석이 적시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내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나도 모를 일이다. 영민이 녀석이 나타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오늘 그 녀석이 나를 구했다는 것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팩트다. 어쩌면 수연이 내게 선사한 그 수호명이 진짜로 나를 지킨 건지도 모르겠다.

언젠가는, 수연이 내게 그 쌍둥이 자매에 관한 얘기를 들려주는 날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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