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와 숙녀

Kalsavina short story

by Kalsavina



호랑이와 숙녀



삼백 마리의 호랑이가 도시를 습격했고 도시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멸종 위기에 처한 호랑이가 어떻게 해서 삼백 마리씩이나 도시에 나타날 수 있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호랑이들은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해쳤고 먹을 수 있는 것은 모조리 잡아먹었다.

그 중 한 마리의 호랑이가 도심으로부터 약간 떨어진 곳에 자리잡은 어느 조그마한 카페로 들어갔다. 카페 안에 있던 몇 안 되는 사람들은 호랑이를 보자 모두 달아나고 말았다. 오로지 단 한 사람, 빨간 모자를 쓴 얌전한 숙녀만이 유유자적한 태도로 창가의 테이블에 앉아 마시던 커피를 홀짝이고 있을 뿐이었다. 숙녀의 새침하고도 우아한 모습을 본 호랑이는 숙녀의 맞은편 의자에 훌쩍 뛰어올라 앉았다. 호랑이의 앞에는 조금 전에 달아난 숙녀의 상대―누군지는 알 수 없었지만―가 마시다 만 것으로 추정되는 커피 한 잔이 외롭게 식어가고 있었다.


“너는 내가 무섭지 않나?”

숙녀는 마시던 커피를 입에서 떼지도 않고 조그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섭지 않아.”

그 목소리는 나지막했으나 분명 겁에 질린 목소리는 아니었다. 한 잔의 커피를 음미하는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분명한 의지가 담긴 목소리였다.

“너는 내가 너를 잡아먹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거냐?”

“알아.”

“그런데도 무섭지 않단 말이지.”

“그래. ”

호랑이는 잠시 난감한 기분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을 보면 무작정 피하거나 해치려 드는 사람들만 보아 오다가 이렇게 자신에게 무관심한 사람과 마주치고 나니 당황한 것이다. 그는 자기가 이 숙녀를 잡아먹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 망설였지만, 굳이 당장 잡아먹을 필요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우선 그는 배가 고프지 않았고, 호랑이인 자신의 눈으로 보기에도(이 호랑이는 암컷이다)그 숙녀는 잡아먹기에는 너무 예뻤다. 그러니까 그가, 아니 그녀가(암컷이므로) 생각하기로는 그 숙녀를 잡아먹어 봐야 별반 맛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너는 호랑이라는 존재에 대해 별 관심이 없어 보이는군.”

“보통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정도로는 관심이 있지. 그 이상은 없어.”

“그렇다면 왜 우리가 너희 인간들이 사는 도시를 습격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지도 않나?”

“그건 너희들 맹수의 본능이니까 그렇겠지. 그게 아니면 배가 고팠거나.”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건 정확한 대답이 아니다.”

“그렇다면 너희가 원하는 게 뭐지? 인간을 다 잡아먹고 이 도시를 파괴하는 거니?”

“우리가 원하는 것은 호랑이가 인간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면 얼마든지 보여주렴. 호랑이가 인간보다 우월하든, 인간이 호랑이보다 우월하든 나와는 상관없는 문제니까.”



이 숙녀는 이 지적인 호랑이를 참으로 난처하게 만들었다.

“호랑이는 인간보다 훌륭하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널 죽이겠다.”

“그렇다면 호랑이가 인간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해 봐. 당장 네 눈 앞에 있는 그 커피를, 단 한 방울도 흘리지 말고 나처럼 우아하게 마셔 봐.”

호랑이는 입맛만 다실 뿐 커피잔에 손끝 하나, 아니 앞발톱 하나도 제대로 댈 수 없었다. 그 커피잔에 앞발이라도 댔다가는 그가 감당하지 못할 모종의 사태가 벌어질 것 같았다. 숙녀는 깔깔 웃으며 말했다.

“거 봐. 할 수 없잖아. 하지만 나는 알아. 네가 그 커피 잔에 그 우아한 앞발을 가져다 댔다가는 순식간에 너의 그 강한 힘에 커피잔이 엎어지면서 탁자보를 적셔 버릴 거라는 걸 난 알아. 게다가 호랑이는 이렇게 맛있는 커피를 만들 수도 없고, 이렇게 예쁜 커피잔을 만들 수도 없잖아.”

호랑이는 몹시 자존심이 상했다. 그러나 숙녀는 호랑이의 자존심을 건드리려고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커피를 마신다고 해서 인간이 호랑이보다 우월한 존재라는 증거는 없지. 인간은 호랑이보다 우월하지도 않고 열등하지도 않아. 어떤 점에서는 호랑이가 훨씬 훌륭한 존재이기도 하지. 내 입으로 그 증거를 일일이 늘어놓고 싶지는 않지만.”

“그러면 너는 호랑이가 인간보다 우월하다는 점을 인정하는 건가?”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지. 그런데 호랑이가 인간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이 너에게, 그리고 이 도시를 습격한 호랑이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지?”

호랑이는 그만 할 말이 없어졌다.



잠시 동안 호랑이와 숙녀는 아무 말 없이 창문을 통해 스며드는 햇빛을 쬐었다. 이윽고 호랑이가 입을 열었다.

“호랑이인 내가 인간들의 서식지인 이곳에서 할 일이 없군.”

“왜 없어? 네가 할 일은 얼마든지 있어.”

“무슨 일을 하지?”

“우선 지금 너는 내 말 상대가 되어 주고 있잖아? 지금 너는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는 거야.”

호랑이는 기분이 으쓱해졌으나, 인간의 말 한 마디에 기분이 고조되는 자신이 이내 우습게 여겨져 다시 풀이 죽었다. 그는 호랑이 본연의 위엄과 품위를 유지하려고 애쓰며 다시 말했다.

“호랑이가 인간의 말 상대가 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나?”

“그러면 너는 인간이 호랑이와 대화하는 것이 나쁘다고 생각하니?”

호랑이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인간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지금, 자신의 기분이 좋은지 어떤지를 생각해 보았다. 결론은, 괜찮다는 쪽으로 났다.

“서로를 해치지 않는 한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 서로를 해치기 때문에, 인간과 호랑이는 공존할 수가 없었지. 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해치지 않고, 이렇게 사이좋게 마주앉아 햇빛을 쬐며 친구처럼 대화를 나누고 있어. 사람들은 몰라. 때로는 호랑이가 사람의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오늘 네가 나와 이렇게 친구처럼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우리는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연 셈이지.”

숙녀는 우아하게 커피 한 잔을 다시 주문하려 했으나, 이미 카페 안은 텅 비어 있었고 주문을 받을 웨이트리스도, 메뉴판도 온데간데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숙녀는 손을 뻗어 호랑이 앞에 놓여 있던 식은 커피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 후 자신이 마시고 난 빈 커피 잔을 호랑이의 앞에 가져다놓았다. 호랑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앞발을 뻗어 텅 빈 커피잔을 슬쩍 건드려 보았다. 다행히 커피잔은 슬쩍 달그락거렸을 뿐 벌러덩 엎어지거나 떨어져 깨지지 않았다.



“언젠가는 나도 너처럼 커피를 마시고 싶군. 그게 가능할까?‘

“어쩌면 가능할 거야.”



삼백 마리의 호랑이가 도시를 습격한 어느 날 오후, 화창한 바깥에서는 대살육이 한창이었을 테지만, (인간이 호랑이를 사살하든 호랑이가 인간을 사살하든, 아니면 양쪽 다이든) 도시의 변두리에 있던 작은 카페에서는 숙녀가 호랑이를 상대로 자유와 평등과 인권과 생명의 존엄성을 논하며, 우아하게 커피를 마셨다. 이 모든 것이 백일몽에 지나지 않음을, 그리고 사실은 호랑이가 종이호랑이에 지나지 않음을 숙녀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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