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의 여름
31. 함세복
미치겠다.
요 며칠 그렇게 멍하게 생각에 잠겨 있더니, 정말 영혼이 가출한 건가. 아니면 더워서 정신줄을 놓은 건가. 수연이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웨이크 업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혹시, 아키란 녀석이 수연이에게 몹쓸 짓이라도 한 건가? 그게 아니면 혹시 용태 녀석이? 그게 아니고서야 왜 난데없이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소릴 해대는 건가. 떠나다니? 헤어지다니? 이게 무슨 소리냐고.
"뭐야. 빨리 말해. 웨이크 업에서 무슨 일 있었지?"
"그런 거 아니야."
"그게 아니면 왜 그런 말이 나와? 혹시 그 잘난 박영민이 협박했어? 나 안 떠나면 너 가만 안 둔다고? 경찰에 너 처넣는다고?"
"그런 거 아니라고!"
수연이 화를 냈다. 지금까지 한 번도 화낸 적이 없는데. 지난 봄 내가 진기를 픽업하다가 납치범으로 오인받는 통에 함께 경찰서까지 갔다오면서도 화를 내지 않았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나한테 처음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넌, 왜 이렇게 무모하니?"
"뭐?"
"이제 알겠어. 박영민이 쉴드 안 쳐줬으면, 함세복이 그렇게 온 동네를 쓸고 다니는 게 불가능했다는 거. 아무리 날고 뛰는 전투복이라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인정할 건 인정하지?"
"야!"
"그러니까 이제 제발 영민이랑 화해하라고. 아니, 화해까지는 바라지도 않아. 제발 그애한테 너무 가혹하게 굴지 말라고. 그애가 너 사랑하는 거 너도 알잖아."
"수연아!"
"너나 나나 올데갈데 없는 나홀로 인생인데, 왜 살면서 쌓아놓은 든든한 뒷백을 네 발로 걷어차......"
순간 이성을 잃었다.
나는 수연에게 덤벼들어 그녀를 넘어뜨리고 목을 졸랐다. 그리고 숨이 막혀 켁켁거리는 그녀의 입에 귀를 가까이 가져가며 물었다.
"너, 왜 영민이 자식하고 날 엮질 못해 안달이야? 이유가 뭐야? 그 개자식이 날 지켜줄 테니까 자기랑 화해하게 해 달래?"
"세, 세복아."
고통스럽게 얼굴을 찡그린 수연이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속삭였다.
"이것, 좀 놓고 얘기해, 나, 아파."
"분명히 경고했어. 네 맘대로 떠나면, 죽여버리겠다고."
수연이 눈을 감았다.
다음 순간, 나뒹구는 소주병 가운데 머리를 풀어헤치고 죽은 사람처럼 널브러져 있던 수연의 모습이 선연하게 눈 앞에 떠올랐다.
그제서야 나갔던 정신이 다시 들어왔다. 나는 얼른 수연의 목을 졸랐던 손을 풀고 그녀를 일으켰다. 힘들게 숨을 몰아쉬는 수연을 보고 있자니 겁이 났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에게 말이다.
다른 사람이 아닌 수연을 죽일 뻔했다.
"네가, 영민이하고 틀어진 상태로 계속 내 옆에 있으면, 네가 위험해. 그게, 내가 떠나는 이유야. 내 맘대로 떠나는 게 아니......"
"됐어. 나가."
"뭐?"
"나가라고. 네 맘대로 해. 떠나려면 떠나라고."
이게 아닌데. 이러면 안 되는 건데. 내 말을, 내 행동을 내가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결국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간 건 내 쪽이었다.
막상 뛰쳐나와 보니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지만, 우산 따위를 챙겨나올 겨를이 없었다. 그 비를 구태여 피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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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에게 차마 할 수 없는 말들을 떠올리며, 나는 빗방울이 떨어지는 어둠 속을 한참이나 헤매고 다녀야 했다.
네가 있는 곳을 알아내기 위해 박영민에게 내 몸까지 내놓았다는 말을 차마 수연에게 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박영민의 도움이 없이는 내 앞에 닥친 신변의 위협을 해결하지 못하는 이 현실 또한 떳떳하게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다.
한동안 그때 그 창고에서 벌어졌던 일들이 꿈에서 되풀이되는 통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는 사실도 수연에게는 차마 털어놓을 수 없었다.
강해지고 싶었다.
그제서야 영민이 녀석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녀석이 왜 나와 등을 돌려 가면서까지 중해방의 보스가 될 수 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만한 힘이 필요했던 거다.
더 이상은 이런 고민을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도대체 어떤 식으로 화해의 손길을 내밀어야 하는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수연의 목을 조른 것이 후회되어 견딜 수 없었다. 그애를 죽이겠다고 위협할 권리 따위는 내게 없었는데 말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수연과 붙어서서 정신없이 키스했던 그 벽을 마주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 벽에 몸을 기댔다.
몸을 지탱할 기운이 전혀 없었다. 그 벽에 기대서서, 이마에 손을 대고 한참이나 밤하늘을 올려다보아야 했다. 빗방울이 조금씩 굵어지면서 어느 새 부슬부슬 내리는 가랑비로 변해 있었다.
멀찍이서 우산을 쓴 누군가가 그런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마도 중해방 조직원일 터였다. 아니면 나를 해치려는 사람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누군가가 작정하고 나를 해치려 다가온다 해도 구태여 맞서 싸우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윽고, 우산을 쓴 정체불명의 괴한이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온 그는 슬쩍 우산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보이며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했다. 낯이 익었다.
다음 순간 그가 누구인지 기억해냈다. 아키였다. 수연을 유혹했던 그 기름지게 생긴 양아치 녀석이었다. 녀석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꽤 즐거운 표정으로 웃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안녕하세요. 꽤 오랫만에 뵙네요."
"그런 거 같다만, 그 느끼한 행색은 여전하구나."
"그런데, 여기서 왜 이러고 계세요?"
"그러는 넌 여기서 뭐하고 있는데?"
"수연이 누나가 혼자 버스 타는 거 보고 이상하다 싶어서 와 본 건데."
"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곧장 몸을 돌려 집으로 뛰어들어가 보니 역시 수연이 보이지 않았다. 순간,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를 깨닫고 말았다. 현기증이 났다. 다시 몸을 돌려 집 밖으로 뛰쳐나오는 나를 아키 녀석이 막아섰다.
"수연이 누나랑 싸웠어요?"
"그건 알 거 없고. 혹시 수연이 못 봤어?"
"방금 영민이 형하고 통화했는데, 수연이 누나 웨이크 업에 있대요."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러나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수연이 나와 영민이 녀석을 화해시키기 위해 단단히 각오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걸 안 이상은 나 또한 마음의 각오를 해야 했다. 곧장 오복이를 세워 둔 곳으로 향하는 나를 뒤에서 아키가 불러 세웠다.
"잠깐만요!"
"뭐냐?"
"수연이 누나 말인데요."
"걔가 왜?"
"대체 그 누나를 얼마나 사랑하는 거예요?"
지금 이 상황에서 왜 이 녀석한테 이런 질문을 받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녀석이 수연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게다가, 그 질문은 누구보다도 우선 나 자신에게 반드시 대답해야 할 질문이기도 했다.
"내 목숨보다 더 사랑한다. 어쩔래?"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거세지는 비에도 아랑곳없이 웨이크 업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가능한 한 오복이를 타고 빗길운전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으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