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증 B 거시관점

by Kalsavina

편집증 B 거시관점(巨視觀點)

(축소)

그 좁은 방은 어둠의 깊은 물에 푹 잠겨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내 아들은 어둠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빛 역시 내 아들에게는 관심 밖의 대상이었다. 어쩌면 그에게는 명암(明暗)의 개념이 전혀 없을 터였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하얀 형광등의 불빛이 그 좁은 방을 건져 내면 내 아들은 마치 ‘오랫동안 기다렸어요’라는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가는 이내 평소의 그 몽롱한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사실 내 아들은 항상 뜻모를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있었다. 나는 내 아들이 정신병자가 아니며 사실은 똑똑하고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는 한, 그를 한 발짝도 이곳에서 내보내지 않을 작정이었다. 물론 그를 이곳에 들여보내기 전까지 나는 내 주위 사람들의 충고를 따랐다. 그들은 내 아들이 어려서부터 소심하고 정에 약했으며 외골수여서 항상 작은 일에도 쉽게 좌절하는 아이였다는 사실을 우려했다. 그 우려가 현실로 드러난 것이 그들의 잘못은 아니었겠지만 나는 별다른 이유 없이 그들을 원망하고 있다. 아들의 좌절은 모든 남자와 모든 여자들이 그렇듯이 사랑에서 시작되어 사랑으로 끝났다. 그러나 오년, 육년, 십여 년이 넘는 기간에 걸쳐 아들은 항상 최선을 다했던 자신의 사랑이 무보수로 좌절되었다 해서 그에 대해 절대 비굴해지거나 절망하는 법이 없었다. 아들이 사랑한 여자들은 항상 액자 속의 여자들이거나 혹은 이미 죽고 없는 여자들이거나 혹은 그가 상상으로 만들어낸 여자들이었다. 이윽고 그에게 진정한 의미에서의 연인이 생겼을 때 아들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애초부터 그런 여자를 만나게 한 신을 저주하는 편이 나았다. 아들의 애인은 어느 날 이유없이 자취를 감추었고 그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아들은 배신감과 상실감에 치를 떨더니 급기야는 자기의 애인이 발기불능 때문에 자기를 떠났으리라는 상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자신이 발기불능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려고 여자를 강간했고 법정에서 판사는 그에게 정신감정을 받으라는 판결을 내렸다. 의사는 그가 불치의 편집증을 앓고 있지만 일상 생활에는 문제가 없으므로 그가 마땅히 구속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아비인 내 입장에서는 정신병원에 수감되나 감옥에 수감되나 결국은 마찬가지였다. 종국에 가서는 아들이 내게 타협안을 제시했다. 죽지 않을 정도의 수준에서 자해를 하거나 미친 사람의 연기를 하면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내 동의를 구하지 않고 아들은 그 계획을 실천에 옮겼다. 증거 불충분으로 항소심이 기각되었을 때 아들의 계획은 무용지물이 되었지만, 더 이상 그는 앞날이 촉망되는 떳떳하고 유능한 아들이 아니었다. 그의 행동은 오로지 한 가지 목표를 향해 귀결되어 있었고 그는 자신의 목표를 부끄러워했기 때문에 감히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의 목표를 알고 있었다. 다시 사랑하는 것. 새로 시작하는 것.

그러나 지금 확대된 공간 속에서 축소된 아들은 저만치에 앉아 손톱을 물어뜯으며 쭈그리고 앉아 있고 나는 그의 무언극을 지켜본다. 그는 고집이 센 편이라 나가게 해 달라고 한 마디만 하면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나가기를 거부한다. 아들에게 새로운 미래의 설계도안을 구체적으로 그려서 제시했을 때 아들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중요한 것은 몸을 가둔 감옥이 아니라 머리를 가둔 감옥입니다. 의사는 저를 고칠 수 없다고 했어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학식과 권위를 따르세요. 저 역시 지금까지 그래왔어요. 그 순간 다른 사람의 아들이 아닌 내 아들은 그에게 여전히 남아 있으며 앞으로도 없어지지 않을 그의 명석한 지각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나는 내 아들의 말을 따랐고 그가 어떤 수식어도 필요없는 편집증 환자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렇게 잘 보이지도 않을 만큼 멀어진 공간 안에서는 전혀 병과 환자가 구분이 되지 않으므로 사실은 내 아들이 편집증 그 자체였음을 인정했다.



작가의 이전글편집증 A 미시관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