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싼 몸값에 대한 예의
“존나 짱나네 !”
그 어린 것의 입에서 터져나오는 무시무시한 고함소리는 나를 경악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물론 그 욕의 강도가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아니다. 혹 제 엄마 극성에 떠밀려 한때 성악 레슨이라도 받았는지 녀석의 풍부한 성량은 TV 볼륨을 최대치로 올린 것과 거의 맞먹는다. 그리고 자기를 언제든지 죽일 수 있는 사람 앞에서 서슴없이 ‘존나 짱나네!’라는 말을 입에 올릴 수 있는 그 녀석은 정말 대담하다. 그렇게 욕을 하면서까지 지금 녀석이 터뜨리고 있는 불만의 요지는 다름아닌 피자다. 녀석의 극성에 못 이겨 피 같은 내 돈을 호주머니에 꿍쳐넣어서는 피자 왕에 가서 피자를 사 온 것까지는 좋았다. 사실 제 집에서는 어느 나라 황제 남부럽지 않게 먹어댔을 녀석을 며칠간 제대로 변변히 먹이지 못한 데 따른 미안함도 있었다. 그런데 막상 녀석의 눈 앞에 피자를 풀어놓으니 녀석은 자신이 원했던 불고기 크러스트 피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저렇게까지 욕을 퍼붓는 것이다. 잠시 도끼눈을 뜨고 녀석을 째려보며 저것을 구워먹을까 삶아먹을까 궁리했다. 녀석은 돼지 주둥이마냥 튀어나온 입을 삐죽거리며 내 시선을 피한다. 근 닷새 간의 부실한 식사에도 불구하고 토실토실한 녀석의 살집은 그대로이다. 아무래도 저 녀석이 아직 배가 덜 고픈가 보다. 아니면 낮에 삶아먹인 라면을 아직 소화시키지 못한 건가. 나는 납작한 마분지 상자에 담긴 피자를 내 쪽으로 끌어왔다. 이 새끼야. 싫으면 먹지 말어. 내가 다 먹을 테다. 그러자 녀석의 태도는 순식간에 달라진다. 그냥 먹을게 아저씨. 웃기지 마. 존나 짱나는 피자를 왜 먹어? 네가 이 피자 사는 데 돈을 댔냐 노동력을 댔냐? 씨발. 녀석의 입에서 또 욕이 튀어나온다. 처음 하루 이틀 동안은 그런 녀석의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고 몇 번 손찌검도 했지만 어디에서 에너지를 충전하는지 녀석의 기세는 갈수록 기세등등하다. 왜 TV의 시사 프로그램이나 육아 프로그램에서 유아기의 가정교육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지 뼈가 저리게 깨닫던 시간이었다. 지금은 가능한 한 내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그냥 내버려 둔다. 나는 매몰차게 피자를 내 등뒤로 돌려 놓은 후 한 조각을 입에 물며 말했다. 잘못했다고 빌면 주지. 나는 녀석이 어린데다가 좋아하는 음식에 약하니 당장은 아니라도 한 10여분만 기다리면 잘못했다고 빌 줄 알았다. 아니 그런데 저 놈, 네가 여덟 조각 피자 중 네 조각을 먹어치우도록 눈만 뚜룩뚜룩 굴리며 입맛만 다시고 있다. 다섯 개째 조각(사실 존나게 짱날 정도는 아니지만 좀 짜증이 날 정도로 맛이 없었다)을 막 입에 넣으려는 순간 녀석이 내게 안기는 것이 아닌가! 녀석은 내 겨드랑이 밑으로 손을 넣어 잽싸게 피자 한 조각을 집은 후 후다닥 도망쳐 방 구석으로 들어가서는 정신 없이 먹기 시작했다. 나는 어이가 없어 셔츠 옆구리에 묻은 치즈며 올리브는 생각도 않고 망연자실 녀석을 쳐다보았다. 잘못했다고 비는 것이, 내 옆구리 사이로 손을 디밀어 피자를 집어내는 것보다 더 힘들었단 말인가? 녀석은 저렇게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면을 보여준다. 저런 녀석을 보고 있노라면, 돈 만들어서 개과천선하겠다는 나의 가냘픈 실낱 같은 희망이 차츰 엷어져가는 것을 느낀다.
물론 나는 이 방면에 있어서 초보이긴 하지만, 초보가 저지르기 쉬운 실수를 되도록 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 중에 하나는 거처를 민활하게 옮기는 것이다. 특히 주위에 사람들이 많은 경우는 특히 그렇다. 전형적인 강남 상류층에 속하는 이 녀석의 부모가 이번 일로 해서 TV에 아들의 얼굴을 팔았을지 안 팔았을지는 미지수다. 만일을 대비해서 제때 거처를 옮겨가는 것이 중요하다. 한편으로는 일을 어떻게 성사시켜야 좋을지 나름대로 궁리를 하고 있다. 왜냐하면 배보다 배꼽이 크다고, 녀석을 데리고 다니면서 적지 않은 돈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유지비를 감당하지 못해 곧 팔아치울 예정인 나의 고물 마티즈와 카드를 긁어 만든 몇 십만원을 가지고 이 위험천만한 작업에 뛰어들었다. 무엇보다도 나를 괴롭힌 것은 다른 직업과 달리 이 직업은 100퍼센트 실수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인간 K의 호적에 빨간 줄이 그이고, 전과자의 낙인이 찍히고 인간관계가 파탄나고 종내에는 감옥에 들어가 인생이 짤없이 망가지는 건 좋다. 그러나 전에 ‘유괴범은 사형이 아니면 종신형’ 이 대부분이라는 얘기를 어디에선가 들었기 때문에 아무리 돈이 궁해도 이 방면으로는 진출하지 않으려 했었다. 그 후 ‘광복절 특사’란 영화를 보고 생각을 바꾸었다. 무사히 애를 부모 품으로 돌려보낸다면야 만에 하나 붙잡혀도 사형은 면할 테고, 종신형이 된다 해도 해마다 이어지는 무슨 기념일 가석방 등등을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이것은 어디까지나 최악의 시나리오다. 만에 하나 성공하지 못하리라는 보장이 어디에 있는가?
영어 학원에 갔다가 집에 돌아오는 녀석을 붙들고 ‘아저씨 따라갈래?’라고 물었을 때 녀석이 보여준 그 고분고분한 태도란. 순간적으로 ‘이 애는 낯선 사람 따라가지 말라는 부모의 주의도 듣지 못하고 컸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불쌍한 마음이 앞섰다. 왜냐하면 이런 말을 하는 나만 해도 어릴 때 유괴 사건을 다룬 TV뉴스를 보며 격노한 부모가 ‘낯선 아저씨 따라가지 말고 집에 올 땐 꼭 여럿이서 와라’고 신신당부하는 것을 들으며 자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꼬맹이, 여간내기가 아니다. ‘차라리 계집애를 납치했으면 이런 고생은 하지 않았을 텐데’라는 후회가 물밀 듯 밀려든다. 얼마나 잘 먹여 놨는지 힘으로도 나와 맞먹는다. 초등학교 4학년생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덩치도 크다. 아무리 요즘 애들 발육상태가 좋다지만 이건 너무한다. 좀 더 어린 애를 골랐어야 했다. 그러나 어쩌랴. 그나마도 자영이 덕에 이 녀석을 알게 된 것도 인연인데, 이 놈을 미끼삼아 월척을 기대할 수 밖에. 심심해. 컴퓨터 없어? 나 워크래프트 하고 싶어. 녀석이 칭얼댄다. 여관방에 컴퓨터가 어딨냐? 웃기지 말고 처박혀 잠이나 자. 조금 있다 나가야 되니까. 또 가? 어디로?
일단 이 녀석 엄마에게 전화를 해 협상을 타진하고, 그 후에는 지체없이 이곳을 뜰 생각이었다. 경찰은 ‘아마도 범인은 서울에 있을 것이다’라는 가정 하에 수사를 진행하고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이 녀석 엄마가 경찰에 신고를 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부질없는 기대이며 생각했다는 것 자체가 ‘존나 짱나게’ 어리석은 발상이다. 나로서는 가능한 한 멀리 도망치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 다행히 영재 녀석이 적극 협조하고 있는 통에 아직은 만사가 순탄하다. 간혹 마주치는 사람들 앞에서도 유괴당한 어린애 티라고는 새발의 때만큼도 내지 않는다. 간혹 내 감시가 소홀해도 도망칠 생각도 하지 않는다. 부모가 보고 싶지도 않은 눈치다. 녀석은 그저 ‘삼촌’ 차 타고 먼 데 여행왔다가 한두 주일 후에 돌아올 계획으로 마음 편히 노는 내 조카 같다. 내게는 조카가 없지만 말이다. 나는 녀석에게 바다로 가자고 말했고 녀석은 희희낙낙 좋아했다. 난 산보다 바다가 좋아. 그나마 녀석이 아직은 어린애라는 사실이 느껴지는 대목이 바로 이런 대목이다. 며칠 전, 옆에서 누워 잠을 청하는 녀석에게 엄마 아빠가 보고 싶지 않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녀석은 대뜸, 보고 싶어, 이렇게 대답했다. 그런데 왜 따라왔어? 아저씨가 누군지 모르고 따라온 거 아니잖아. 녀석은 다시 대답했다. 아빠는 별로 안 보고 싶고, 엄마는 조금 보고 싶은데, 집에 가면 또 엄마가 영어 학원이랑 컴퓨터 학원이랑 바이올린 학원이랑 미술 학원이랑 태권도 학원이랑 논술 지도 교실에 가라고 할 테니까 난 그게 싫어. 이제 겨우 초등학교 4학년인 아이한테 논술 지도 교실이라? 그건 정말 금시초문이다. 논술지도는 왜 받는데? 대학 때문에? 응. 대학 때문에 그런대. 그리고 그 논술 지도 교실 선생님이 엄마 친구야. 그 선생님이 엄마한테, 논술을 잘 하면 대학 졸업한 뒤에도 좋은 직업 가질 수 있고 유학 갈 때도 좋다 그랬대. 청산유수같은 녀석의 설명 앞에서 나는 말문이 막혔다. 물론 나는 가난하고 못생기고, 게다가 머리까지 나빠 공부도 못 하도록 낳아준 부모님을 절절이 원망해왔다. 내가 이 녀석이라면, 우선 영어 학원과 컴퓨터 학원이야 기본일 테지만, 바이올린이니 논술이니 하는 것까지 하면서 몸과 마음을 파김치로 만들지는 않겠다. 아, 맞다 하고 영재 녀석은 생각났다는 듯 한 마디를 덧붙였다. 수학은 학원 안 가고 집에서 해. 과외 선생님이 일 주일에 세 번씩 오거든. 아니, 줄줄이 사탕 같은 학원들의 행렬이 끝이 아니었단 말인가? 지난 번에는 영어 학원에서 내가 발음을 잘 못한다고 해서 엄마가 외국인 선생님을 따로 ‘초빙’해서 가르쳐야겠다고 했어. 근데 아저씨 ‘초빙’이 무슨 뜻이야? 나도 몰라 임마, 아저씨처럼 되기 싫으면 국어 공부 열심히 해 임마. 영어도 좋지만 국어부터 잘한 다음에 영어를 해야지. 에이 난 국어도 영어도 싫어. 국어는 그냥 말만 잘 하면 되잖아. 아무튼 집에 가거든 공부 열심히 해, 아저씨처럼 되지 말고. 공부하기 싫은데. 녀석은 슬며시 웃더니 이불 속으로 기어들었다.
몇 번이나 녀석에게 ‘너 이자영 선생님 아니?’라고 물어보려 했지만 그만두었다. 자영이는 작년 여름부터 겨울에 걸쳐 영재에게 영어와 수학을 가르쳤다. 2년제 대학을 겨우 졸업한 데다 교직 이수를 하지 못해 교원자격증도 없었다. 항상 그것 때문에 아쉬워하며 과외 선생 노릇을 하느라 여러 집을 전전했다. 몇 번 일하는 자영이를 바래다 주러 갔다가 영재 녀석의 집을 알게 되었고, 자영이를 통해 녀석의 가정에 대해서도 그렁저렁 알게 되었다. 보기에는 그렇게 부자로 보이지 않지? 아파트 평수가 때깔나게 넓지도 않고. 하지만 알부자야. 그애 아빠는 부동산 투기하는 사람인데 전남 어디에 사 놓은 땅이 공장 부지로 비싸게 팔려서 돈을 몇십 억 벌었대. 그런데 애라고는 영재 하나밖에 없어서 그 애 엄마가 그애한테 지극 정성을 다 들이고 있어. 방학만 되면 유럽이다 미국이다 해외여행 시키고, 여기서 중학교까지만 시킨 다음에는 유학 보낼 거래. 그러니 결국 고달픈 건 나지. 과외 선생도 엄연히 선생은 선생인데, 선생이 말하는 건 코딱지로도 생각 안 하고 화만 나면 ‘씨발 짱나네’같은 욕을 여과없이 지껄이는데 미치겠어. 그나마 다른 집보다 돈도 많이 주고 그 애 어머니가 인심이 후덕한 편이라 참고 있는 거야. 자영이와는 연락이 끊긴 지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친구들과 어울려 돈 구할 곳을 찾아 지방을 전전하는 동안 벌써 반 년 가량 그녀에게 전화 한 통 하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나 같은 놈팽이에게는 과분하다. 이렇게 헤어진다 해도 그녀를 위해서는 잘 된 일인지 모른다. 좌우지간 그녀가 영재네 집 일을 그만둔 지 오래되었다는 건 분명하다.
여러 번 궁리를 한 끝에 녀석의 이름으로 된 통장을 만들어 돈을 입금시킨 후 폰뱅킹 번호를 알려 달라고 하는 편이 좋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수표, 사서함, 현찰 교환 등등을 생각해봤지만 그 어느 것도 꼬리가 밟힐 위험이 있다. 카드를 위조한 후 폰뱅킹으로 몇 번에 걸쳐 돈을 빼내면 될 테고, 만약 비밀번호를 틀리게 불러 줄 경우 애를 해치겠다고 위협하면 될 테니 문제없다. 일단 이 동네를 튈 작정이니 전화나 한 통 하는 게 좋을 듯 싶었다.
공중전화를 찾기가 예상 외로 힘들었다. 정말 ‘핸드폰의 시대’라는 말이 실감나는 것은 바로 이런 때다. 간신히 찾아낸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가 전화카드를 넣고 다이얼을 돌린 후 휴대용 음성변조기를 입에 댔다. 핸드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영재 어머니의 목소리는 아주 침착했다. 걱정 많이 하셨지요? 물론 경찰에 신고하셨을 테구요. 수화기 저편에서 침묵이 울린다. 일단 영재 잠깐 바꿔드리겠습니다. 영재야. 엄마한테 잘 있다고 말씀드려. 녀석은 제 엄마 못지 않게 침착한 태도로 수화기를 받아서는 엄마, 나야. 하고 말했다. 수화기를 뺏을까 어쩔까 생각하다가 잠시 애 엄마가 아들의 목소리를 확인사살하게끔 내버려 두었다. 녀석은 골때리게도 엄마, 크러스트 피자 먹고 싶어, 이 아저씨는 크러스트 피자는 비싸다고 그냥 피자만 사주잖아, 라고 외친다. 어이가 없어서 그냥 수화기를 뺏어들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새끼야 아무리 돈 궁한 유괴범한테 끌려다닌다지만 이런 상황에서까지 빈티를 내서 사람 망신을 시키냐? 수화기 속의 목소리는 대뜸 얼마를 원하시죠? 하고 질문해 왔다. 나는 폰뱅킹으로 한 번에 얼마나 돈을 인출할 수 있는지 잠시 생각해 본 후 제의했다. 이천 만원만 주십시오.
아저씨, 더 올려 받아.
영재가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속삭인다. 또라이인지 능구렁이인지 분간 안 되는 놈. 나는 속이 약간 메슥거리는 것을 참고 가능한 한 예의바르게 또박또박 말했다. 적지 않은 돈인 줄 알지만 부탁 좀 드립니다. 영재 다치거나 그런 일은 절대 없을 테니 안심하시구요. 그 정도면 됐다 싶어서 전화를 끊은 후 바로 영재를 데리고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대전 즈음에 이르러서야 나는 내가 한 말을 되새기며 울렁거리는 속을 다스릴 마음의 여유를 되찾았다. 적지 않은 돈인 줄 알지만 부탁, 뭐? 적지 않다고? 나한테는 그렇지만 늬들한테는 아들 한 달 학원비만 다 합친 정도밖에 더 되겠냐? 내가 계산까지 다 해봤다. 갑자기 엊그네 TV에서 본 연속극에 나오던 어느 아줌마 탤런트의 악쓰는 대사가 떠올랐다. 야, 이년아. 내 자식 잘 되기만 한다면야 그깟 돈 몇 억이 문제겠냐? 살이라도 베어주지. 그래 그게 부모 마음이라는 것을 잘 알지만, 그 놈의 억 소리는 정말 듣기 지겨워서 못 살겠다. 내가 살아 생전 만져 볼 수나 있는 ‘억’이라면야 말도 안 한다. 평생을 가야 뜬구름밖에 못잡을 억.......영재 녀석이 코고는 소리가 들려온다. 데리고 다니면서 잘 때 코 고는 것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데, 녀석이 어지간히 피곤했던 모양이다. 녀석은 무슨 생각으로 제 몸값을 더 올려 받으라고 내 옆구리를 찔렀을까? 어쩌면 녀석도 영화를 좋아하는지 모른다. 가끔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인질들의 멋진 대사 <야 이 새끼들아. 어떻게 내 몸값을 내 껌값하고 같은 급으로 잰다냐? 오랑우탄 새끼를 납치해도 그 정도는 받겠다!>. 나는 킬킬 웃었지만 어쩐지 웃음이 눈물로 바뀔 것 같아 웃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영재의 코 고는 소리를 음악삼아 속력을 냈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전라남도까지 다다라서야 영재는 눈을 떴다. 눈을 뜨기가 무섭게 배가 고프다고 보채는 녀석을 데리고 근처 장우동에 들어가 우동과 떡볶이를 사 먹였다. 배가 고팠는지 군소리 없이 먹어치우는 녀석이 약간은 안쓰럽기도 했다. 그 틈을 타 운전하면서 줄곧 생각했던 것을 물었다. 너 이 자식, 니네 집 그렇게 부자야? 이천만원으로도 모자라서 더 올려 받으라고 할 정도로? 녀석은 젓가락으로 고추장 소스가 묻은 삶은 계란 조각을 쿡 찍으며 말했다. 왠지 내가 계란이 되어 녀석에게 찍혔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 집 부자야. 그런데 우리 엄마 아빠는 나한테 피자나 햄버거 같은 거 잘 안 사줘. 의사 선생님이 내가 조금 비만인데 그런 거 먹으면 진짜 비만 된다고 그랬대. 그러니까 아저씨가 돈 더 받아서 나한테 피자랑 햄버거 많이 사 주면 되잖아. 피자가 그렇게 좋냐? 응.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게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한 가지가 워크래프트고 그 다음에는 불고기 크러스트 피자가 좋아. 둘 중에 어떤 게 더 좋은데? 똑같이 좋아. 그리고 그 다음으로 좋은 게 포트리스하고 울티마 게임이야. 녀석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언젠가 TV에서 본 육아교육 프로그램을 얼핏 떠올렸다. 아기들에게 ‘엄마가 더 좋아, 아빠가 더 좋아?’하고 물으면 아기들은 ‘둘 다 좋다’고 한다. 만약 하나만 고르라고 하면 울음을 터뜨린다. ‘이런 질문은 아기들에게 스트레스를 유발시키니까 가급적 삼가 주세요’라고 자랑스레 말하는 안경을 낀 여자 유아교육과 교수의 귤껍데기 같은 뺨이 너무나도 부담스러워서 채널을 딴 데로 돌렸었다. 그리고 내 앞에서 천연덕스레 군만두를 먹고 싶다고 말하는 녀석의 진정한 아빠는 워크래프트 게임이고 진정한 엄마는 불고기 크러스트 피자인지도 몰랐다. 녀석은 엄마 대신 다른 음식으로 배를 채웠지만, 아빠만큼은 어떻게 해서든 갖고 놀고 싶은 모양이었다. 피씨방에 가서, 딱 한 판만 하면 안 돼?
아무리 조카라고 둘러대어 봤자 젊은 청년과 어린 사내아이가 함께 여관에 투숙한다는 것은 남의 눈에 얼마든지 유별나게 보일 소지가 높다. 그 때문에 여러 번 숙소를 갈아치우며 도망다녔지만, 다행히도 목포와 무안 중간쯤 되는 동네에서 은신하고 있는 친구의 집을 잠깐 빌리면 그 고생에서도 며칠은 해방된다. 여기까지 생각한 나는 순순히 녀석을 이끌고 피씨방에 갔다. 아닌게 아니라 나 역시 모처럼 스타크래프트를 하고 싶었다.
영재 녀석, 보기보다 실력이 여간 아니다. 녀석과 스타크래프트를 한 판 붙었는데, 그 약삭빠른 놈은 자기가 이기면 햄버거를 사 준다는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녀석은 햄버거만큼이나 사발면도 좋아했기 때문에 사발면으로 낙착을 보았다. 좌우지간 그렇게 해서 시작한 게임을 연거푸 세 판이나 졌다. 포트리스에서도 녀석은 나보다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자기 말로는 등급이 ‘금달’이라나? 그렇게 몇 번을 게임에 몰두하던 녀석은 드디어 그렇게도 소원하던 워크래프트가 깔린 컴퓨터로 자리를 옮겨 게임을 시작했고 나는 할 일없이 인터넷으로 속칭 ‘동영상보다 야하다’는 일본 포르노 만화를 보며 시간을 때웠다. 그러다 문득 이 메일이나 확인하자는 생각에 <다음>으로 들어간 나는 내 이메일을 열어보았다.
새로운 편지함을 클릭한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의자를 뒤로 확 제꼈다. 몇 개의 스팸메일 가운데 다음과 같은 제목의 편지가 있었던 것이다.
<영재를 데리고 계신 K씨에게>
발신인의 아이디는 아무리 보아도 낯설었다. 도대체 누굴까? 벌써 경찰에서 내 신원을 알아냈단 말인가? 그럴 리가. 무슨 수로? 나는 손이 떨리는 것을 참으며 제목을 클릭했다.
우선, 제목을 보시고 충격을 많이 받으셨을 K씨께 진심으로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제가 누구인지 궁금하시겠지요. 저는 영재의 부모님과 평소 친분이 두터운 사람으로서 강남 N구의 파출소에서 근무하는 사람입니다. 지금부터 차근차근 말씀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제 얘기를 들어주십시오.
이미 영재의 부모님께 자세한 얘기를 들어 그간 일어났던 일은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서 K씨의 신원을 알아냈는지가 무엇보다도 궁금하시겠지요. 저는 당신이 영재를 유괴한 날, 본의 아니게 당신이 영재를 유괴하던 광경을 본의 아니게 목격한 사람 중 한 사람입니다. 즉, 저 말고 또 다른 목격자가 한 사람 더 있습니다. 바로 영재네 아파트 경비원인데요. 그가 당신의 차량 번호를 외워두는 주도면밀함을 발휘해 준 덕에 손쉽게도 당신의 신원을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아시겠지만, 오늘날에 이르러 어린이 유괴는 해마다 그 수가 줄어들지 않고 있으며 그 범죄수법 또한 과거와 비교하여 한층 잔악하게 발전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영리(?)를 목적으로 한 어린이 유괴에 있어서 거의 성공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는 통계 결과를 먼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기에서 성공이란 물론 당신이 영재의 부모님께 제안한 이천만원을 무사히 손에 쥐고 자취를 감추었을 경우이겠지요.
어느 새 쥐어진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아직 이 메일은 반이나 남아 있었다.
이제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려야 할 필요를 느끼는군요. 간단히 얘기해서, 저는 당신이 지금 서해안 고속도로를 거쳐 전남 쪽으로 내려갔으며 그 곳에서 영재와 밥을 먹고 피씨방에서 한가하게 게임이나 하고 있을 거라는 정도는 짐작하고 있습니다. 이쯤하면 본인께서도 본인이 처한 상황을 충분히 깨달으셨으리라 믿습니다. 제가 K씨께 제의하는 것은 단 한 가지입니다. 내일 아침까지, 200만원 상당의 돈을 붙여 영재를 무사히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 주신다면 저는 K씨의 범행을 없던 일로 하고 일체의 수사를 무효화할 것입니다. 이미 알고 계신 영재 어머니의 계좌번호로 돈을 입금하신 후 영재를 집 주위에 몰래 데려다 주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만일 끝까지 영재를 상대로 해서 영재의 부모님으로부터 요구하신 돈을 받아내려 하시거나, 혹은 제가 요구하는 금액을 붙이지 않고 영재를 돌려보내거나 할 경우 저는 부득이하게 K씨의 목에 이천만원의 현상금을 걸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밤 안으로 당신이 이 메일을 확인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렇지 않다면 제가 부득이하게 당신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해야 할 테니까요.
물론, 전화상으로 영재를 해치지 않겠다고 하신 말씀은 사실이리라 믿습니다.
P.S: 비싼 몸값에 대한 예의를 아시는 분이더군요. 존경스럽습니다.
나는 침착하게 행동하려고 애쓰며 피씨방 주인에게 돈을 지불한 후 더 하겠다고 떼를 쓰는 영재 녀석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그러나 다시 고속도로를 타고 속력을 내기 시작한 내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이렇게 도망치고 있는 지금도 상대는 내 일거수일투족을 꿰뚫고 있다. 아마 지금도 미행을 당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상대는 얼마든지 나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잡지 않고 느긋하게 내 뒤를 밟고 있다. 무슨 속셈인가? 200만원? 내 수중에 있는 돈을 다 때려엎어도 200만원은 어림도 없다. 게다가 이 돼지 같은 녀석을 끌고 다니며 먹이느라 들어간 돈에 기름값에 여관비에........돈이 없다. 운전을 하며 백미러로 틈틈이 뒤를 따라오는 차를 쳐다보았지만 뒤따라오는 차는 계속 바뀌고 있었다. 친구의 집이 있는 마을로 갈라지는 인터체인지를 그냥 지나친 나는 국도로 접어들어 계속 달리기 시작했다.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이상하게도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소 명료한 판단력을 가지고 내가 받은 이메일의 내용을 머릿속으로 다시 검토할 여유를 얻었다. 내 신원을 파악한 경위에 대한 설명은 너무나도 억지스럽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보면 아주 불가능한 일만도 아니다. 차는 분명 한길에 세워 두었다. 물론 경비실 창문이 보였지만 경비원이 자리를 비워둔 터라 신경쓰지 않았다.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흔히 그렇듯 아파트를 다라 높다랗게 세워진 그 위압적인 담들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길가에는 대낮에 지나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 길에서 영재와 마주쳤기 때문에 별 어려움 없이 데리고 왔는데, 이렇게 허를 찔리다니! 혹 지금까지 돌아다녔던 곳 어딘가에서 꼬리를 밟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떠랴. 이미 물은 엎질러졌는데.
영재는 조용하다. 뒤를 돌아보니 얌전히 바깥을 내다보고 있다. 고속도로와 달리 차량도 불빛도 드물고 을씨년스러운 국도의 풍경에 주눅이 든 모양이다. 어쩌면 서울에 있는 부모를 그리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건 숫제 녀석을 모시고 전국일주 관광을 다니는 전속 운전기사나 다름없는 꼴이 아닌가! 나 자신 꼴이 한심해 피식 웃어버린 순간 이 메일의 마지막 추신이 떠올랐다.
비싼 몸값에 대한 예의를 잘 아시는 분이시더군요. 존경스럽습니다. 존경? 존경이고 나발이고 집어 치우라지. 비싼 몸값? 갑자기 ‘적지 않은 돈이지만 좀 부탁드립니다’라는 음성 변조기 속 목소리가 머릿속 대뇌 피질을 타고 흘렀다. 부탁이면 부탁이지 ‘좀’은 왜 붙여야 했나? 화가 치밀어오른다.
고속도로와 달리 국도는 방향을 가늠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혼란스러운 마음이 갈피를 못 잡아 행선지를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러나 어찌 된 셈인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녀석과 약속한 대로 바다를 따라 달리고 있었다. 나는 창문을 열고 바닷바람으로 들뜬 머리를 식혔다. 시계를 보니 벌써 밤 10시였다.
영재 녀석은 뭐가 못마땅한지 바다만 뚫어져라 바라본다. 저건 녀석의 스타일이 아니다. 요구사항이 있으면 째각 얘기하고 나와 대판 싸움을 벌이는 댓가로 어떻게든 해결을 하고야 마는데 저건 녀석답지 않다. 녀석에게 ‘바닷가에 가자’고 말을 건넸더니 느닷없이 ‘나 오줌 누고 싶어’라고 중얼거렸다. 차를 세운 후 나란히 서서 일을 해결했다. 물론 수세식 변기를 운운하는 녀석의 정수리를 한 대 갈기고 난 다음에야 가능했다. 그 다음으로 한 주문이 ‘창문 올려 줘. 추워’였다. 약이 올랐지만 참았다. 그러다가 ‘XX마을’이라고 씌어진 표지판을 막 지나쳐 내려가던 중 문득 생각난 질문을 녀석에게 던졌다. 문득 생각났다고 하지만, 사실 납치해 온 그날부터 내내 궁금했던 점이었다. 너, 정말 아저씨가 안 무섭냐? 아저씨가 너 자는 사이에 너 죽이면 어쩔 거야? 녀석은 피식 웃더니 대답했다. 에이, 아저씨가 나 죽이면 아저씨는 이천만원 못 받잖아. 그래도 임마, 네 엄마가 돈 안 준다고 그러면 어떡할 거야? 우리 엄마는 돈 줄 거야. 만약 네 엄마가 돈 준다고 해놓고 나 속이면? 그러자 녀석은 잠시 이마를 찌푸리더니 대답했다. 그래도 아저씨는 날 못 죽인다니까? 왜 내가 널 못 죽여? 그러자 녀석은 능글맞은 웃음을 입가에 흘리며 말했다. 나랑 내기할래? 난 ‘아저씨가 날 못 죽인다‘에 걸 거야. 내가 지면 아저씨한테 불고기 피자랑 포테이토 피자 다섯 판씩 합쳐서 열 판 사 줄게. 네가 지면 넌 죽는데 그걸 다 어떻게 사 주냐? 어, 그렇네. 녀석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에게 처음 납치된 그 날 나를 따라 길에서 차를 탔을 때의 정황을 물어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녀석이 어리다고, 녀석의 주의력을 과소평가했다. 적어도 녀석 역시 그날 나를 따라 나서면서 나와 똑같은 것들만을 보았으리라고 생각했었다. 영재야. 너 그날. 아저씨 처음 따라오던 날 말이야. 그날 너랑 아저씨 지켜보던 사람 못 봤니? 몰라. 못 본 것 같애. 정말 못 봤어? 잘 생각해 봐. 생각 안 나는데.
그러면 그렇지. 입 다물고 바닷가 마을로 내려가는데 갑자기 영재 녀석이 아―하고 소리를 쳤다. 맞다. 아저씨 혹시 주차 위반 딱지 안 받았어? 아저씨 우리 아파트 앞에 길가에 차 세워놨잖아.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전부터 거기 주차 단속하는 땅이래.
코피가 터질 것처럼 양미간이 아찔하다. 이 자식아. 그걸 이제 얘기하면 어떡해? 그러자 녀석이 대뜸 기차 화통 삶아먹은 그 특유의 성량으로 소리지른다. 아저씨가 언제 물어 봤다고 그래? 존나 짱나네. 갑자기 열받은 나는 급브레이크를 걸어 차를 세우고는 뒷문을 열어 녀석을 끌어내려 했다. 그런데 그놈의 피자인지 뭔지를 너무 잘 먹여 놨더니 녀석, 힘이 장사라 차에서 꿈적도 안 한다. 안 나오려고 버둥거리는 녀석을 잡아 끌어내려는 순간 녀석의 발차기에 한 방 먹은 나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의기양양한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 태권도 3단이야.
녀석의 어머니가 녀석의 교육에 투자했을 막대한 비용을 떠올려본다. 이제야 비싼 몸값에 대한 예의가 무엇인지 알 것 같다.
물이 깊고 푸른 동해 바다와는 달리, 서해 바다는 물이 얕고 물 빛깔이 흙빛을 띠고 있다. 황하에서 내려오는 황토물 때문이라던가. 전에 포항에도 가 보고, 울산에도 가 보고 부산에도 가 보았지만, 깊고 푸르러서 항상 뜻모를 공포를 안겨주던 그 바다들과는 달리, 서해안의 바다는 장엄하지 않았지만 너그러워 보였다. 동해 바다에는 없는 갯벌이 있었고, 맛있는 낙지들의 서식지였다. 동해 바다보다 섬과 배가 많았고 일출보다 일몰이 아름다웠다.
그러나 지금은 자정을 훨씬 넘어선 시간이다. 여기까지 와서 바다를 보지 못한다면 그 또한 애석한 일이기에, 추워서 내리기 싫다는 영재를 차 안에 놓아두고 혼자 바닷가로 나왔다.. 세발낙지가 먹고 싶다고 생각하며 나는 넓게 펼쳐진 갯벌을 둘러보았다.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곳이지만 그 정확한 시간을 모르는 나는 언제 물이 밀려들지 몰라 조바심을 내면서도, 이 바다의 질척한 진흙탕만큼이나 질척해진 내 신세에 묘한 짜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에는 차 안에 들어가 핸드폰을 켜 봐야 하나 어쩌나 하는 갈등이 빚어지고 있는 판이다. 내가 이 메일을 확인했으니 상대는 수신확인 배너를 눌러 내가 이메일을 수신했는지 여부를 알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당장 전화를 걸지는 않을 터였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미행하는 차량이 없나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아직은 낌새를 발견하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정말로 개 같은 때에 바다를 보며 한가하게 개 같은 인생을 관조하고 있는 셈이다. 가능하면 긍정적인 방향으로 일을 무마시킬 계획을 궁리하고 있을 때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구야? 뒤에서 버스럭거린 사람은 영재 녀석이었다. 너 임마, 춥다면서 왜 나왔어? 히터까지 틀어 줬잖아? 아무리 기다려도 아저씨가 안 오니까 그렇지. 오늘 밤에는 어디서 자? 나는 녀석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고 녀석은 멀뚱멀뚱 나를 쳐다보다가는, 똥 마려워, 하고 말했다. 여기 아무 데서나 눠. 볼 사람 없어. 녀석은 대답 대신 땅바닥만 내려다보다가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싫어. 여관에 가. 문득 녀석을 내버려 둔 채 도망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나는 녀석을 발로 걷어차며 소리쳤다. 가, 저리 가라구. 아 씨발 왜 때리고 그래? 녀석이 고함쳤다. 조용해 새끼야. 가라면 갈 것이지 말이 많아. 너 가고 싶은 데로 가란 말이야. 난 가고 싶은 데로 갈 테니까. 녀석도 지지 않고 소리친다. 웃기고 있네. 경찰에 신고할 거야. 높고 앙칼진 두 사람의 목소리가 습한 허공을 가른다. 맘대로 해. 네 엄마 아빠가 경찰에 신고 다 했는데 새삼 무슨 신고야. 나는 차 쪽으로 바삐 걷기 시작했고 녀석이 뒤를 따라왔다. 나는 간간히 멈추어 서서 뒤돌아보고 녀석에게 가! 안가? 하고 고함을 질러 위협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차가 있는 곳으로 돌아와서 앞좌석 문에 키를 꽂았을 때, 뒤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보나마나 감기에 걸린 거겠지. 나는 녀석을 다그쳤다. 잘못했다고 빌 거야? 안 빌 거야? 녀석은 당돌하게 소리쳤다. 내가 왜 빌어? 내가 뭘 어쨌는데? 내가 운전석에 올라타고 시동을 걸자 녀석은 냉큼 앞좌석에 올라탔다.
여관 주인에게 선불을 건넨 후 열쇠를 받은 나는 영재를 데리고 2층으로 올라왔다. 뒤따라오며 누구냐고 묻는 여관 주인의 질문에 ‘형이에요’라고 대답하는 영재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연인들의 불장난의 터전으로 이용되는 곳이라 숙박계를 낼 필요가 없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녀석은 피곤했는지 금세 잠들었고, 나는 꺼 두었던 핸드폰을 켰다. 부재 중 전화, 음성 메시지, 문자 메시지. 어느 것 하나 들어오지 않은 핸드폰은 깨끗하기만 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전원을 껐다. 다음에는 차에서 가져온 녀석의 가방을 열고 미리 준비한 봉투를 넣었다.
녀석이 깨지 않도록 조심하며 옷을 입은 나는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조심스레 여관 문을 열고 나서는 내 귀에 여관 주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워디 가시요잉? 아, 잠깐 차에 두고 온 것이 있어서요. 되도록 태평한 태도를 가장하며 나는 넉살좋게 웃어 보였다. 다행히 차는 여관 주인의 눈과 귀가 미치지 않는 곳에 세워져 있었다. 차에 올라탄 나는 시동을 걸었다. 시내를 빠져나온 차는 최대한 속력을 내어 질주하기 시작했다.
무인 감시카메라에 걸리지 않기만을 진심으로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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