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의 폭주
8. 박영민
세복이가 언제까지 나를 찾아오지 않을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세복이는 이사를 마치고 난 어느 한적한 오후에 담치 형의 바인 <웨이크 업>으로 나를 불러냈다.
나는 함칠성 어르신의 유언장을 세복이에게 되돌려주고, 지금의 상황을 되도록 알기 쉽게 설명해 주었다. 아무도 알지 못한 정체불명의 상속자에 대해서, 그 상속자가 삼일과 손을 잡고 있는 정황에 대해서, 그리고 싫든 좋든 돈 때문에 결혼할 수 밖에 없는 우리의 현실에 대해서.
"그 오피스텔은, 아는 사람에게 급하게 빌린 거야. 마침 그 집 주인이 유학을 가게 되어서 몇 년간은 그냥 비워두게 될 처지였거든. 관리비와 월세를 대납하는 조건으로 빌린 거고. 뭐 돈 문제로 꼭 네가 불편하다면, 매달 관리비하고 월세 청구서는 네 앞으로 보내 줄게. 오케이?"
조용히 내 말을 듣던 세복이는 별안간 담배를 꺼내더니 피워 물었다. 끊었다고 생각했는데, 최근에 다시 피우는 모양이다. 수연과 또 뭔가 문제가 생긴 건가. 아니면 원치 않게 눈 앞에 현실로 닥친 나와의 결혼 때문에 어느 누구에게도 말을 못하고 괴로워하고 있는 걸까.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나와 결혼하면 세복이는 싫든 좋든 더 이상 수연과 함께일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법적인 절차와 계약으로만 성립된 결혼이라 할지라도, 그 결혼이 세복이를 어떻게 옭아맬지는 모를 일이다.
"결혼 말인데."
마침내 세복이가 입을 열었다.
"너 그 돈, 꼭 지금 당장 찾아야 되는 거냐?"
"무슨 돈?"
"우리 외할아버지가 너네 집으로 준 돈. 나랑 결혼 안 하면 못 찾는다는 그 돈 말이야."
사실 일부는 이미 빼서 쓰고 있었다. 강태석의 유에스비에서 추출한 코드로 빼쓸 수 있는 한도의 액수 안에서, 필요한 만큼은 빼 쓰고 있었지만 그 얘기를 세복이에게 할 수는 없었다. 사실은 세복이와 수연이 살고 있는 그 오피스텔 또한 그 돈으로 구입했다는 말 또한 할 수 없었다.
"그건 걱정하지 마.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는 아니니까. 지금으로서는, 나도 결혼 같은 거 하고 싶은 생각이 없고."
세복이는 피식 웃고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녀석을 볼 때마다 녀석의 아지트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라 마음이 괴로웠다.
"30억이면, 꽤 큰 돈인데. 통도 크셨네. 외할아버지."
하지만, 30억과 200억은 비교해서는 안 될 액수다. 그와 관련해 미루어 짐작하자면, 오래 전, 어머니가 내게 들려준 이야기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사생아로 태어난 세복이를 세복이의 외삼촌이자 집안의 하나뿐인 상속자의 호적에 올리려 했을 때, 세복이의 이모들은 극렬하게 반대했다. 아마 세복이가 아들이었다면 어림 반푼어치도 없었겠지만, 다행히 여자아이였기 때문에 결국 그렇게 반대하던 이모들도 끝까지 반대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단, 조건이 붙었다.
세복이의 엄마가 함씨 집안의 일원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포기한다는 조건이었다.
그렇게 자신의 어린 딸을 자신보다 한참이나 나이가 많은 이복오빠의 호적에 올려놓고, 자신은 무일푼으로 집을 나가 일체 집안과의 연락을 끊었다.
그 파란만장한 사연의 주인공이 지금 약혼자인 내 앞에서 담배 연기를 토해내는 내 약혼녀다.
물론, 그 전에 서로 아무것도 모르고 20년을 같이 보낸 친구이기도 하다.
"그럼 됐고, 나 가기 전에 하나만 더 묻자. 수연이, 페이 바 클럽으로 내보낸 이유가 뭐야?"
"아."
그 질문을 왜 안 하나 했는데, 대답도 하기 전에 세복이가 다시 질문해 왔다.
"걔, 노래 시키려고 거기 내보낸 거 아니지?"
"뭐?"
난데없이 무슨 소리냐고 되물을 뻔했다. 그러나 이내 얼마 전 정아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수연이 노래를 부를 줄 안다는 거였다. 그것도 보통 이상의 가창력으로 말이다. 그러나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흘려 들었었는데, 세복이 녀석까지 수연의 노래에 대해 거론할 줄은 몰랐다.
"수연이가 노래를 할 줄 알아? 너, 들어 본 적 있어?"
"아 됐어. 모르면 됐고."
세복이가 손사래를 치자 담뱃재가 공중을 휙 날았다. 나는 몸을 약간 뒤로 젖혀 담뱃재를 피했다. 녀석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경고하는데, 걔 손님들 앞에 맨 얼굴로 세우거나 손님들 앞에서 노래나 춤 그런 거 시키면 죽을 줄 알아."
"어련하시겠습니까. 전투복 각하. "
나는 팔짱을 끼고 빈정댔다.
"또 이상한 변태같은 것들 눈에 얻어걸리면 곤란하지. 나도 그렇게 생각없는 사람 아니니까 안심해. 그렇지만, 한 가지는 짚고 넘어가자."
"뭔데?"
"너, 수연이의 행복에 대해서는 생각 안 하냐?"
"무슨 소리야?"
"너도 여자지만, 걔도 여자야. 너야 걔랑 있으면 행복하겠지. 하지만 그애도 그럴까? 둘이 붙어 있는 게 과연 언제까지나 그애를 위한 길인지, 생각해 본 적 있어?"
"......"
"너도 알다시피, 일찍부터 험한 데 끌려가서 모진 고생 한 애야. 좋은 남자 만나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아야 할 아이라고. 그 사실 잊고 있었던 건 아니지?"
"......."
"잘 생각해 봐. 네가 언제까지나 그애의 보호자 노릇을 할 수 있을지. 너는 당장 네 신변의 위협부터 걱정해야 할 판인데. 과연 네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진짜 그애의 남편이 될 남자만큼 그애를 안전하게 보호할 사람이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