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팩더블 3 헤리티지 9)

란의 폭주

by Kalsavina

9. 유수연




새로 이사한 곳 근처에, 잡지에서 본 꽤 유명한 브런치 카페가 있었다. 아메리칸 스타일의 조식이 맛있다고 입소문이 난 곳이었다. 화창한 초가을의 아침, 나는 늦잠을 단 일 분이라도 더 자려고 안간힘을 쓰는 세복이를 억지로 깨워 그곳으로 끌고 갔다.

"참 부지런도 하십니다. 아가씨."

여전히 잠이 덜 깬 채로 눈가에 낀 눈곱을 떨어내며 세복이는 투덜거렸다.

"그러니까 구태여 오백원을 할인받자고 이 시간에 온다는 거지? 나 같으면 그냥 오백원 더 주고 낮에 사먹겠다."

"낮에 파는 메뉴는 이게 아니야. 이건, 이 시간이 아니면 못 먹는다고."

해쉬 브라운을 들어 보이며 내가 울상을 지어 보이자. 세복이는 피식 웃으며 내 볼을 꼬집었다 .

저 시니컬하게 웃는 얼굴을,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이건 맛있네."

두툼한 베이컨 에그를 한 입 먹은 세복이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 순간, 왜 박영민이 이 자리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세 사람이 사이좋은 친구로 지냈다면, 그 또한 충분히 이 자리에서 농담하고 떠들며 같이 맛난 요리를 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 세복이를 잃고 혼자가 된 그를 떠올리니 어째서인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가 세복이의 숨겨진 약혼자였다는 걸 이제는 알고 있다.

언젠가는, 내가 떠나야 할 때가 오리라.

그때까지는 많이 사랑하고, 많이 행복해야겠다고 다짐하며 나는 손에 묻은 딸기잼을 닦으려고 휴지 쪽으로 손을 뻗었다. 디저트로 나온 비스켓에 딸기잼을 바르다가 딸기잼이 손에 흘러 손가락에 묻었기 때문이다.

다음 순간, 세복이가 잽싸게 내 손을 잡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당황한 내가 말릴 틈도 없이 세복이는 내 손가락에 묻은 잼을 자신의 입술로 빨았다. 그와 동시에 내 등 뒤에서 한숨 섞인 탄식이 들려왔다.

"뭐야. 저 사람."

"너무 괜찮다. 완전 드라마 같애."

뒤를 돌아보니 사복을 입은 여학생 서너 명이 우리를 보고 있었다. 내 얼굴을 확인한 여고생들은 서로를 쿡쿡 찔렀다.

"우와, 완전 연예인 커플이다. 그치?"

세복이가 눈웃음을 치며 여고생들에게 소리쳤다.

"뭘 봐? 너네들 학교 안 가고 여기서 뭐해?"

"오늘 일요일이에요. 도서관 가기 전에 잠깐 들러서 먹는 건데."

"아 그랬나?"

여고생들이 나간 후 내가 한숨을 쉬며 세복이에게 말했다.

"네가 진기네 학교에서 왜 인기 있었는지 대충 알겠다."

문득, 진기가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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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 바 클럽에서 나는 바텐더로 일하기 시작했다.

일을 할 때는 반드시 뿔테 안경을 꼈고, 되도록 손님들의 대화에는 말을 섞지 않으려고 했다. 다리가 아파 오래 서 있을 수 없어서 틈틈히 의자에 앉아 쉬어가며 일했다. 여자 손님들에게는 되도록 상냥하게 대했지만, 남자 손님들이 말을 걸어 오면 반드시 옆에 있는 다른 바텐더들에게 자리를 비켜주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선우, 그러니까 닥터 송만큼은 도무지 피할 길이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멀리 떨어진 탁자에 앉아 유심히 나를 지켜보던 그는, 꽤나 이지적이고 샤프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었다. 짧게 깎은 머리에 금테 안경을 끼고 항상 학생들이나 입을 법한 캐주얼한 스트라이프 티셔츠나 래글런 티셔츠 같은 편안한 옷에 청바지를 걸친 그는 흡사 장난꾸러기 고등학생 같은 인상을 주었다.

다만, 얼굴은 그렇게 어려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는 내 앞에 와서 늘상 내가 일하는 바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가 내 앞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다른 손님들과 말을 섞는 확률이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이래 가지고서야 마치 닥터 송을 전담하는 바텐더라 해도 할말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저만치에서 아키가 보여도 아키에게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키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키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우선은 닥터 송에 대해서 이야기하도록 하자. 내게 있어 강태석과 별다를 바 없던 그 존재를 떼어내느라 무던히도 애를 먹었다는 걸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그 사람만 없었던들, 나의 세복이가 그토록 깊은 고통과 절망에 빠져 몸부림치다가 결국 아키에게 걸려드는 참극까지는 빚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그는 온화하고 밝은 사람이었다. 어쩌면,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환한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의 태도 어디에서도 나나 세복이 그리고 영민이에게서 보이는 그런 류의 그늘을 찾을 수 없었다.

그 모든 비극의 시작은, 어쩌면 나의 실수에서 비롯되었다.

손님들 앞에서는 절대 안경을 벗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깨고, 부옇게 김이 서린 안경알을 닦겠다고 무심결에 안경을 벗어 버린 게 실수였다.

송선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나에게서 안경을 빼앗았다. 그리고는 안경을 집어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난처해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던 참에 박영민이 저 멀리서부터 다가왔다.

그리고 뜻밖에도, 박영민과 반대 방향에서 이쪽으로 천천히 걸어오는 세복이가 보였다. 나는 얼른 바 아래로 몸을 숨겼다. 머리 위에서 송선우의 구김살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거 도수 없는 안경인데? 수연 씨, 이런 거 왜 끼고 다녀요? 수연씨?"

송선우가 몸을 굽혀 내가 몸을 숨긴 바 아래를 탐색하는 게 느껴졌지만, 나는 몸을 구부리고 떨어뜨린 머들러(칵테일을 휘젓는 도구)를 찾는 시늉을 했다. 하필이면 때맞추어 내 동료 바텐더이자 상사인 조매니저가 나타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키가 작고 통통하며 호쾌한 성격의 이혼녀였던 조매니저는 나를 보자 대뜸 이렇게 말했다.

"뭘 떨어뜨린 거야?"

"머, 머들러요."

그러자 머리 위에서 박영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머들러 여기 있어."

하는 수 없이 나는 굽혔던 몸을 펴고 일어섰다. 박영민은 머들러를 들고 있었고, 송선우는 여전히 내 안경을 든 채로 웃고 있었다.

"안 그래도 인사시키려고 했는데, 마침 와 있었네. 인사해. 송선우 선생님이야. 이비인후과 전공의고, 전문의 시험 막 통과해서 이제 본격적으로 일하게 되실 예비 의사 선생님이지."

"아아, 그래."

표정 관리가 도무지 되지 않아 당혹스러움을 감추느라 애를 먹었다. 때마침 손님이 별로 없던 때라 나를 본 손님이 별로 없었다는 것만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어딘가에서 나를 보고 있을 세복이가 신경이 쓰여 견딜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이 아는 사이인 줄은 몰랐네."

"나한테 이종사촌 형이 있거든. 여섯 살 위인."

박영민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 형의 의대 동기야. 그전부터 그 형하고 절친이라서, 가끔 형 집에 놀러가면 같이 놀곤 했었거든. 그래서 잘 알지."

"그러니까 수연 씨. 아니 그냥 편하게, 수연아."

송선우, 그러니까 닥터 송은 내게 안경을 돌려주며 말했다.

"너, 나 왔을 때는 그냥 안경 끼지 마라. 짖궂은 놈들 개수작 정도는 충분히 쉴드 쳐줄 수 있으니까. 이런 거 안 껴도 된다고. 무슨 말인지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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