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의 폭주
21. 함세복
여자 꼬시는 방법도 참 가지가지라고 생각했다.
그리스 신화라니. 안티고네라니. 비극의 여주인공이라니.
영민이의 친구 녀석들은 거의 대부분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인간들이었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여자를 유혹할 때 그리스 신화의 여주인공을 거론한 적은 없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닥터 송이라고 불리는 송선우 선생 덕에, 난생 처음 팔자에 없는 서점이라는 곳에 가 보았다.
원래 나는 책이라는 것과는 아주 인연이 멀었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잠이 오지 않거나 불면증에 시달리거나 할 때 많은 글자가 빡빡하게 우거진(?) 책을 집어들어 두 줄만 읽으면 그대로 곯아떨어지는 정도였다. 말하자면 만화책을 제외하고, 책이라는 것은 내게 있어서 훌륭한 수면유도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내가, 그 <안티고네>를 단숨에 읽어 버렸다.
그리고, 내 앞에 나타난 사람이 보통 강적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 어떤 캐릭터도 안티고네 만큼이나 수연이 가진 본연의 비극적인 이미지와 유사한 캐릭터는 없었다. 그에 비하면 인어공주 따위는 그야말로 우습다.
내가 찾아내고 싶었던 메타포를 먼저 찾아낸 송선우에게 분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어떤 남자에게도 수연을 빼앗기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송선우 선생은, 내가 어떻게 상대해 볼 방도가 없었다.
나보다 한 수 빨랐다. 예리하고 치밀했다. 게다가 수연에 대한 감정도 보통이 아니었다. 아키 녀석의 어설픈 유혹 따위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어쩌면 영민이 녀석이 내게서 수연을 떼어내기 위해 일부러 송선우 선생을 붙인 게 아닌가라는 생각마저 들었지만, 누가 누굴 좋아한다는 건 시켜서 되는 일은 아니라는 걸 상기하고 나니 딱히 영민이 녀석을 욕할 일도 아니었다.
빌어먹을 결혼식 따위.
그 결혼식 당일 아침만 해도 수연은 꽤 기분이 좋았다. 그녀는 결혼식 자체를 좋아했다. 누구의 결혼식이건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결혼식장의 그 낭만적인 분위기를 좋아했고, 결혼이라는 말에 가슴 설레어했다.
"이 옷, 마음에 들어."
지난 여름, 길에서 우연히 보고 수연에게 어울릴 것 같아 무작정 샀던 하늘색 원피스를 걸친 그녀는 나를 돌아보며 윙크를 해 보였다.
"함세복, 그렇게 안 봤는데, 꽤나 센스 있네? 다시 봤어."
귀여운 아가씨 같으니.
그러나 좋았던 건 그때까지만이었다.
그 원피스를 입고, 다른 사람도 아닌 송선우 선생과 나란히 노래를 부르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것도 그렇게 아름답고 감미로운 축가를.
그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런 모습은, 내가 아닌 어느 다른 누구에게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던 모습이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들려주고 싶지 않았던 노래였다.
그래서 화가 났다.
하지만, 화가 났다고 해서 무작정 영민이 녀석을 붙들고 따진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일단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는 수연의 곁에 있었어야 했다. 그것은 전적으로 분명히 내 잘못이었다.
그러나 내가 붙어 있었다 한들, 송선우 선생이 실신한 수연을 안아 옮기는 것을 내가 막을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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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의 발목이 어느 정도 회복된 후에도, 의사는 수연에게 주기적으로 병원에 와서 발목 상태를 점검 받으라고 한 바가 있었다. 그래서 수연은 꾸준히 병원에 들러 발목을 보이고 상태를 체크했었다. 그런 수연을 데려다 줬다가 데리고 오는 건 당연히 내 몫이었다. 그러나 그 달에 정기 검진을 받으러 가는 날짜를, 수연도 나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게 실수라면 실수였다.
그러나 그날, 그 악몽같은 결혼식 날, 나는 발목의 통증 때문에 실신한 수연의 곁에 선 송선우 선생을 차마 밀어내고 수연의 곁에 다가서지 못했다. 의사와 몇 마디의 말을 나누고 마침내 병실 밖으로 나가려던 송선우 선생은, 문 근처의 벽에 기대서서 팔짱을 낀 나를 슬쩍 돌아보며 말했다.
"잠깐 얘기 좀 하지?"
햇빛이 잘 들지 않아 어둡고 음산한 복도에서, 송선우 선생은 나를 불러 놓고도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그러다 마침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그 장난, 언제까지 계속할 거야?"
"그 장난이라는 거, 뭘 말하는 겁니까?"
"수연이하고 네가 지금 치고 있는 그 장난 말이야."
"......"
"내가 두 사람 다 유심히 관찰했지만, 타고난 레즈비언으로는 안 보여. 두 사람 모두, 그 전부터 동성을 좋아했었던 것 같지도 않고. "
"말이 어렵네요."
"음, 뭐 간단히 얘기하지. 이제 수연이 좀 놔주면 안될까?"
"그러니까, 내가 수연이를 붙잡고 있다는 말이네요. 수연이는 원하지 않는데."
"아니, 유수연도 참 지독하더군. 함세복을 보는 눈빛을 보면 알지. 그러니까 놓아 주라는 거야."
"역시 말이 어려워요."
"두 사람의 장난, 이제 끝내. 가급적이면 네가 먼저 끝내주면 고맙고."
"그래서, 수연이랑 결혼이라도 하시게요?"
"그럴 생각이야."
"쉽지 않을 텐데요."
"그야 그렇겠지."
"그쪽이야말로 장난치는 거 같은데."
"음 뭐. 장난 같아 보인다고 다 장난은 아니지?"
"그애에 대해서 뭘 얼마나 아는데요?"
"음 뭐 알 만큼은 알아. 부모님 다 돌아가셨고, 무일푼이고, 아버지 도박빚 때문에 윤락가에 일년 정도 끌려가 있었고, 성폭행도 당할 만큼 당했었고, 그러다 조폭에게 걸려서 발목도 저렇게 몹쓸 지경으로 아작났고. 또 뭐가 있더라 음......."
"수연이가 진짜 레즈비언이라 해도 사랑하실 건가요?"
"응."
"만약 저러다 발목이 진짜 완전히 절단나서 걷지 못하게 되면요?"
"그러면 나로서는 고맙지. 도망갈 염려 없으니까."
젠장할, 강태석에 비견할 만한 괴물이다.
"걔가 에이즈 환자라도 사랑하실 건가요?"
"요즘 치료제 잘 나와. 아무 문제 없어."
"걔가 정신병자라도 사랑하실 건가요? "
"아, 그 얘기 들었어. 정신병자로 오인받아서, 결국 그게 조폭들이 대놓고 수연이를 윤락가에 끌고 갈 빌미를 제공한 거라고. 결론부터 말하면, 나한테는 문제가 안 돼. 내가 볼 땐 수연이는 정신병자가 아니니까."
젠장. 그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욕 말고는 없었다. 이제 또 무슨 얘기를 해서 그를 단념하게 만들어야 할지를 머릿속으로 궁리하고 있는데, 뜻밖에도 수연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송 선생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사람을 죽였다 해도, 사랑하실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