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소녀를 해치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고 시청자들은 입을 모았다. 다름아닌 하얀 교복 블라우스가 피범벅이 된 사건이었다. 피는 치마를 적시고 허벅지를 타고 흘러흘러 종아리까지 내려가 마침내는 하얀 양말까지 물들였다고 한다. 가장 경악스러운 사실은 결론이었는데, 가해자가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아니, 재단이사장의 조카,라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형사처벌은커녕 이렇다할 아무런 조치도 없이 그저 없던 일처럼 마무리지어졌다는 것이다. 물론 뒷말은 무성했지만.......
사건을 취재한 기자는 세간의 비난을 받았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아무튼 기자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재단이사장이 피해자 소녀의 부모에게 막대한 치료비를 지급하여 뒷수습을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재단이사장의 조카는 약 일주일 정도 학교를 결석한 후 언제 그랬냐는 듯 우습게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피해자인 소녀 역시 아무렇지도 않게 중간고사를 치렀다고 한다. 중간중간 칼에 찔린, 아니 칼에 베인 자리에 손을 갖다대며 아파하면서......
여기까지가 방송을 타고 세간에 알려진 내용이다.
실제로 그 학교의 블라우스는 흰색이 아니라 꽤 세련된 체크 무늬 블라우스였고, 소년들 역시 같은 체크무늬의 남방을 입고 다녔다. 소년은 농구부원이었고 농구부원답게 키가 크고 호리호리했으며, 지브리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소년처럼 순해 보이는 미남자였다. 여학생들 모두가 그를 좋아했다. 그는 일단 같은 학교 학생이며 치마를 둘렀다, 고 분류되는 생물에 한해서는 절대로 척을 지지 않는다는 주의였다. 바지를 입는 생물들은 그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를 적대시하지는 않았다. 그의 남다른 신분 때문이었다. 그럭저럭 그의 학교생활은 평탄했다. 단 한 가지 문제를 제외하고는.
바로 그 소녀가 그의 눈에 띄면서부터였다.
그 소녀는 이럭저럭 남의 눈에 예쁘게도 보일 수 있을 정도로는 예쁜 편이었으나, 워낙 두드러진 미모의 소유자가 많았던 그 반의 여학생들에 견주어 볼 때 결코 예쁘다고 할 수 없었다. 말하자면 상대평가에 의해서는 너무나도 급수가 떨어지는 외모였다. 이목구비가 뚜렷하지만 얼굴이 크고 머리카락이 뻣뻣하며 고집이 세어 보이는 광대뼈와 입술과 턱을 가졌다. 누가 보아도 굳은 심지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었다.
소녀를 본 순간, 소년의 심기는 불편해졌다. 소년은 그가 여느 소녀들처럼 여리고 앳된 심성의 소유자가 아니며, 소녀의 내부에 남자 스무 명쯤은 우습게 호령하고도 남을 장군 하나가 숨어 있음을 간파했다. 그러나 소녀가 자신의 그런 면을 드러낼 일은 거의 없었다. 소녀는 소년의 바로 옆 반이었고, 쉬는 시간의 거의 대부분을 독서로 소일했는데, 소녀가 읽고 있는 책이 만화책이나 잡지가 아니라 천문학 책이라는 것을 안 소년은 소녀에 대한 호기심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적어도 그가 아는 상식선에서 치마를 입은 생물이 천문학 책을 읽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농구를 마치고 체육관을 나서던 소년은 비가 내리는 것을 보고 잠시 난감해했다. 우산을 들고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체육관에서 본관까지는 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별로 비를 맞아가며 뛰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한바탕 뛰고 난 다음이라 그럴 수도 있고, 교복 바지에 웃옷은 유니폼을 그대로 걸친 자신의 우스운 모양새 때문에도 그랬다. 그런데 때마침 살이 빠진 우산을 그대로 쓰고 가는 한 여학생이 눈에 띄었다. 그는 다짜고짜 그 여학생을 불러세웠다.
“야, 잠깐만! 우산 같이 좀 쓰자!”
그는 별다른 생각없이 우산을 쓴 여학생의 곁으로 다가가 몸을 구부리고 자신의 상반신을 우산 속으로 밀어넣었다. 다음 순간 그는 깜짝 놀랐다. 바로 그가 관심을 기울이던 그녀, 천문학 책을 읽고 고집이 세어 보이는 얼굴의 장군감이 바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우는 얼굴로. 말하자면 살이 빠진 우산으로 자신의 머리를 가리고 체육관 정문을 지나쳐 가면서 울고 있었던 셈이다. 소년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소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소녀는 난데없이 나타난 소년을 훼방꾼 보는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소녀는 갑자기 소년으로부터 몇 걸음 물러서더니, 난데없이 소년을 향해 우산을 집어 던졌다. 그리고는 비를 맞으며 운동장을 그냥 걸어가 버렸다.
“너, 잠깐만 나 좀 봐.”
가방을 어깨에 맨 소녀는 돌아서서 소년을 쳐다보았다. 돌부처같은 표정을 본 소년의 가슴이 갑자기 두근거렸다.
“무슨 일인데?”
“그날 왜 그랬어?”
“뭘?”
“우산, 나한테 던졌잖아.”
“빌려달라는 거 아니었어? 우산을?”
아, 용케도 기억하는구나. 소년은 다행이라 여기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래도 그런 식으로 던지는 게 어딨어?”
소녀는 한숨을 내쉬고는, 갑자기 픽 웃었다.
“그런 식으로 갑자기 뛰어들어오는 건 어떻고?”
“그게 기분나빠서 우산을 던진 거였어?”
“어차피.......너는 쓰고 갈 우산이 필요했고, 나는 있으나마나 한 거였으니까.”
“아하, 그랬구나. 그래서 우산을 그냥 준 거구나.”
“말하자면.”
소녀는 쓴웃음을 입가에 머금은 채로 발을 옮겼다. 소년은 성급하고도 유연한 발걸음으로 그녀를 따랐다.
“네 이름이 뭐야?”
“그러는 너는?”
“영무. ”
“나는 영윤이야.”
소녀는 느린 발걸음으로 교문을 벗어났다. 자신의 무뚝뚝한 태도가 도리어 소년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음을 소녀는 몰랐다. 소녀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소년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어디까지 따라올 건데?”
“너네 집까지.”
“우리 집까지? 왜?”
소녀는 다시 걷기 시작했고 소년은 그 다음 순간, 매우 난처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그 다음부터는 싫어도 소녀의 뒤에 바짝 따라붙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적어도 소녀의 뒷모습이 다른 사람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될 상황이었다. 버스 정류장에 이르러 소녀는 벽에 바싹 몸을 붙인 상태로 버스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소년이 그 옆에 와서 섰지만 소녀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이따금 내쉬는 한숨은 소녀가 뭔가 말못할 고민에 빠져 있음을 시사했지만 소년으로서는 그게 무엇인지 알 길이 없었다. 소년은 지금 소녀의 치마 뒤가 어떤 상태인지 알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두고 심각한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지금 알려주지 않으면 소녀는 집까지 가는 내내 망신을 당할 테고, 그렇다고 알려줬다간 소녀에게 창피를 주는 결과가 될 것이다. 소년은 고심 끝에 후자를 택했다.
“저기, 네 치마, 그리고 네 다리, 좀 봐야 할 것 같은데.”
소녀는 뒤를 돌아 치마를 확인하고, 그리고 다리를 확인하고, 다리 사이로 흐르는 피가 치마까지 적셨음을 확인했다. 그녀는 이마를 짚으며 얼굴을 찡그렸다.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상태가 되어 그녀는 가방에서 주섬주섬 휴지를 꺼냈다.
“이렇게까지 되도록 몰랐다니......”
그녀는 종아리까지 흘러내린 피를 닦아냈다. 소년은 고개를 돌리며 자신의 몸으로 소녀의 앞을 막아 사람들이 그녀를 보지 못하도록 했다. 그날 결국 소년은 소녀의 집 앞까지 소녀를 바래다 주어야만 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소년은 고심 끝에 소녀와 사귀어 보기로 결심하고 소녀를 찾아가 가볍고도 진지한 태도로 조심스럽게 소녀에게 자신을 제안했다. 그러나 소녀의 태도는 매우 뜻밖이었다. 한숨을 내쉬며 대꾸하는 소녀의 표정에는 이렇다 할 동요가 없었다.
“나, 남자애들 별로 안 좋아해.”
“너, 그날 그 일 때문에 그러는 거야? 그건 마음쓰.....”
“왜 하필 난데? 예쁜 애들은 많잖아?”
“그야.....”
나도 잘 모르겠다, 고 소년은 생각했다. 고집 세어 보이는 얼굴이나 천문학 책 따위는 절대 이유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다리 사이로 흘러내리던 피를 떠올리자, 어쩌면 그게 이유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나도 몰라.”
소년은 왜 자신이 소녀에게 솔직해지는지 그조차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면, 알고 나서 다시 와.”
소녀는 냉정하게 그렇게 단언했다.
그로부터 얼마간 소년은 소녀를 피했다. 어차피 같은 반도 아니거니와 별로 마주칠 일도 없었다. 그러다가 기말고사 기간중이던 어느 날, 시험을 마친 소년은 자신의 휴대폰에 꽂혀 있던 이어폰이 갑자기 사라지는 통에 이어폰을 찾느라 한참을 늦고 말았다. 서둘러 복도를 뛰어가던 그는 또다시 소녀와 마주쳤다. 소녀는 그를 보자 고개를 숙이고 그를 지나쳐가 버렸다. 그녀를 지나친 그는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그녀에게로 되돌아갔다.
“저기, 집에 가는 길이야?”
“곧 갈 거야.”
소녀는 애써 한숨을 참는 표정으로 그렇게 대꾸했다.
“같이 가자.”
소녀는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바로 이거다! 세상에 대한 극도의 무관심. 이게 바로 내가 너에게 흥미를 느낀 이유야. 소녀는 뜻밖에도 웃었다. 눈이 가늘어졌다. 어쩐지 오늘은 그 고집 세어 보이는 얼굴이 예쁘게 보이기도 했다.
“나는 혼자 가는 게 좋은데.”
소년은 슬그머니 마음이 상하는 것을 느꼈다.
“너, 혹시 내가 싫은 거야?”
“그럴 리가. 온 학교 여학생들의 로망인 너를 어떻게 싫어하겠니?”
소녀의 대답은 너무나 뜻밖이고 적나라하여 소년을 당황하게 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래? 알았어. 맞아. 나는 그런 존재였지. 근데 왜 나하고 같이 가는 게 싫어?”
“나는 혼자 다니는 게 버릇이야.”
말하자면 방해받기 싫다는 뜻이었다. 혼자만의 세계를 방해하지 말아 달라는 말이었다. 그것은 온화하면서도 단호한 거절이었다. 소년은 알 수 없는 분노로 가슴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젠장, 계집애 따위가 자기 세계를 방해하지 말아 달라고 남자에게 선언 따위를 하다니!
“나는 그렇게 못하겠어. 같이 가!”
“그러면 마음대로 해.”
두 사람은 나란히 교문을 벗어났고, 나란히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갔으며,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겉보기에는 매우 다정한 모습으로 버스에 올라탔다. 두 사람은 버스 안에 함께 원심력에 몸을 맡기며 이리저리 흔들렸다. 자리가 하나 나자 소년은 대뜸 가방을 던지고 앉았다. 퍼스트 레이디 따위는 개뿔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소녀의 가방을 빼앗아 자신의 무릎에 놓았다. 소녀는 이런저런 생각에 골몰하며 차창 밖을 쳐다보았다. 그런 자신의 태도가 소년의 자존심에 불을 지르고 있음을 알지 못한 채.
버스에서 내린 후, 마침내 두 사람의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소년이 소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지만 소녀가 슬그머니 그 손을 내쳤고 이에 화가 난 소년은 소녀의 가방을 바닥에 내동댕이쳐 버렸다. 소녀는 가방을 주워들며 어이가 없다는 투로 말했다.
“나한테 차인 걸 이렇게까지 억울해 할 줄이야.”
“너 참 잘났다.”
소녀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참, 미안해. 하지만 너는.......아니, 나는 정말로, 남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더군다나 운동하는 애들은 질색이라고. 그리고 너는 안경도 안 꼈잖아.”
“뭐라고?”
소년은 기가 막혔다.
“말하자면 너하고 사귀려면 샌님이 되어야 한다는 소리잖아?”
“넌 왜 꼭 나하고 사귀어야 하는데? ”
“남자가 여자친구 만드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해? 내가 너하고 사귀고 싶다는 데 무슨 이유가 필요하냐고?”
갑자기 소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소년은 그만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알았어. 사귀면 될 거 아냐. 사귀면. 그 대신, 다른 애들한테는 비밀로 해 줘. 나, 너를 좋아하는 내 친구들이나 다른 애들한테 머리카락 쥐어뜯기고 싶지 않거든.”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괜찮은 소년 소녀의 풋풋한 연애담, 아니 연애의 시작을 알리는 에피소드였다. 그렇게 시작한 그들이 결국 여학생의 실수로 인한 생리혈이 아니라 진짜 피를 보게 된 이유는 참으로 미묘하고도 애매하기 짝이 없었다.
막상 사귀기로 약속은 했지만, 그러고 나니 뭘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제서야 소년은 자신이 소녀에게 정확하게 뭘 요구하는지 자기 자신조차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당황해 쩔쩔매기 시작했다. 더구나 자신은 학교 공부와 농구 때문에 소녀와 마주치거나 대화할 일이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소녀가 뭘 요구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사귀자는 요청에 대한 응답 이후로,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어쨌든 이어지는 소년의 무관심한 태도에도 소녀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어느 날, 모처럼 소녀의 교실을 찾아간 소년은 뜻밖에도 환하게 웃는 소녀의 모습을 보았다. 소녀는 즐거운 표정으로 친구들과 이야기하며 웃고 있었다. 그 친구들 가운데에는 자신과 같은 사내아이들도 한 둘이 끼어 있었다. 소년은 묘한 질투심을 느꼈다. 사람들을 향해 옷는 소녀가 예쁘게 보인다는 사실이 그를 더욱 화나게 했다. 소년은 자신이 들고 온 캔 음료수를 들여다보았다. 소녀에게 해 줘야 할 것은 많은 것 같은데, 소녀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그날 저녁, 소년은 소녀를 이끌고 아무도 없는 체육관으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소녀에게 자신이 산 mp3를 내밀었다.
“별로 이런 거 필요 없는데. 하지만 고마워. 잘 쓸게.”
“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아?”
뜻밖의 선물과 뜻밖의 질문을 동시에 받은 소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소년을 올려다보았다. 소녀의 입이 심술궂게 삐죽였다.
“대체 그게 왜 궁금한테?”
“너는 너에 대해서 아무것도 내게 알려주질 않잖아. 아무런 정보도......”
소년의 숨소리가 분노로 거칠어졌다.
“사실 별로 알고 싶지 않잖아. 안 그래? 단순한 호기심일 뿐이지.”
소녀는 심술궂게 웃으며 그렇게 응수했다.
“말이 심하잖아! ”
“정말로 날 좋아하니?”
소녀는 갑자기 심각한 태도로 소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소년은 당황했다. 다른 여자애들과도 얼마든지 겪을 수 있었던 이런 스킨쉽이 어쩐지 이 소녀와는 쉽지가 않았다.
“대답 못하지?”
“......”
“너, 날 해칠 수 있니?”
아, 이런 짖궂은 질문을!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소녀의 허리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소녀는 재치있게 소년의 손을 슬그머니 뿌리쳤다. 자신의 허리에 가져갔던 손을 잡고 천천히 몸을 따라 쓸어내려서, 허벅지까지 쓸어내려서는, 살며시 손을 떼어내는 식으로.
“이런 거 말고 말이야. 이런 건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하는 거잖아.”
“그럼, 대체 뭘 말하는 거야?”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흥분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해서, 그만 소녀의 어깨를 움켜쥐고 난폭하게 흔들어 떠다밀어 버렸다. 소녀는 내팽개쳐지듯 바닥에 쓰러졌다. 소년은 당황한 나머지 다시 소녀를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소녀는 일어나 흩어진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말했다.
“나는, 다른 남자들이 하는 평범한 거 싫어. 할 수 있으면, 날 없애 봐. 이 세상에서. 아예 없어져 버리도록. ”
소녀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도대체 소녀에게는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 소년은 소름이 끼치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체육관 밖을 나가는 소녀의 눈에서 눈물이 반짝이는 것을, 못 봤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도대체 소녀는 소년에게 뭘 요구하는 것일까.
그로부터 얼마간, 소년은 머리가 터져버릴 정도로 소녀에 대한 고민을 거듭했다. 더 이상 소녀를 만날 자신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소녀와 끊어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처음에는 호기심과 호의에서 출발한 감정이 이렇게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와 버리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고민 끝에 그는 다른 여자친구를 만들어 보거나, 아니면 아예 학교 공부에나 열중해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얼마 후 소년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그대로 다니던 학교와 같은 재단의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소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상황은 더욱 나쁜 방향으로 흘렀다. 두 사람은 어이없게도 이번에는 같은 반이 되고 말았다.
소녀는 어찌된 셈인지 안경을 끼고 있었다. 그 안경을 보자 소년은 정말로 화가 났다. 소녀의 고집 세어 보이는 얼굴의 특질이 안경으로 인해서 더욱 두드러져 보였다. 소년은 자신이 소녀를 도저히 잊을 수 없음을 깨달았지만, 이제 와서 소녀에게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행사로 인해 수업이 일찍 끝났다. 다른 학생들은 좋아하며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지만, 소년은 교문을 나서다 말고 발길을 되돌려 교실로 돌아갔다. 남아 있는 친구들을 재치 있게 따돌린 그는 책상에 엎드린 채 자는 소녀를 보았다. 처음부터 그의 목표는 소녀였다. 소녀는 너무나 곤히 잠든 탓에 코까지 골았다. 결국 교실에는 소년과 소녀 둘만 남았다. 소년은 교실 문을 닫고 커튼까지 쳤다. 그대로 교실은 봉쇄된 셈이었다.
한 시간 가량이 지나 소녀가 눈을 떴을 때 소녀는 소년과 둘만 남았다. 소녀는 처음에는 놀란 기색을 보였으나, 이내 그 특유의 가벼운 한숨으로 모든 것을 체념했다.
“너도 참......”
“나는 널 정말 모르겠어.”
소년은 소녀가 앉은 책상 옆으로 다가왔다. 그는 이제 청년이 되어가고 있었고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소녀는 여전히 소녀 그대로인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난 널 알아야겠어.”
“뭘 말이야? 네가 날 알게 되면,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거야? 사귀자고 해서 그러겠다고 했고, 비싼 선물도 받았어. 그런데도 넌 뭘 나한테 이렇게 집요하게 요구하니?”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작년에서 체육관에서 나한테 했던 말, 그 말 뜻을 알아야겠어. 널 없애 달라고 했잖아. 그거 무슨 뜻이야?”
“그건......”
소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때와 똑같이.
“그건, 내가 정상이 아니라는 뜻이야.”
“뭐?”
“넌 잘 모르겠지만, 나는 보통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걸 보고 들어. 그게 너무 괴로워. 그 이상은 설명할 수 없어. 설명해봤자 미친년 취급이나 받을 테고. 이제 그만 해. 난 널 좋아하지만, 우리가 서로 좋아해서 이룰 일이 없어. ”
“말도 안 돼!”
소년은 소녀를 난폭하게 의자에서 끌어냈다. 소년은 아직 어른들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자신들에게는 금지된 바로 그 일을 해치울 생각이었다. 사실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았지만, 소녀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녀는 자신을 깔고 올라앉은 소년의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였다.
“너, 칼 가지고 있지?”
‘칼’이라는 단어가 소년의 머릿속을 얼어붙게 했다. 망연자실한 소년이 소녀를 내려다보는 동안 소녀는 천천히 몸을 움직여 소년으로부터 벗어났다. 그런 후 헝클어진 머리로 눈을 빛내며 웃었다.
“다른 방법으로 나를 가져 봐. 나를 해쳐 봐.”
소년이 정신줄을 놓고 소녀를 쳐다보는 동안, 소녀는 어디에서 꺼냈는지 칼을 쥐고 있었다. 은장도처럼 생긴 그것은 날이 길지 않았으나 매우 날카로워 보였다. 소녀의 눈처럼 심술궂게 빛나는 그 칼은 소녀보다는 소년을 닮았다. 소녀는 그 칼로 소년의 남방에 달린 단추를 천천히 뜯어냈다. 하나씩. 하나씩. 뜯어진 단추는 또르르 소리를 내며 교실 저편으로 저마다 방향을 달리해 굴러갔다. 다섯개 째 단추가 떨어져 나갔을 때 소년은 소녀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 들고 소녀의 가슴과 갈비뼈 아래를 사정없이 그어 버리고 말았다. 소녀의 블라우스가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다. 소녀를 찌르려고 칼을 높이 쳐든 순간, 소년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깨닫고 질겁하며 칼을 떨어뜨렸다. 소년은 소녀의 내부에 깃든 악마가 자신을 향해 웃는 것을 느꼈다.
소녀는 통증을 참으며 이를 깨물고는 옆으로 쓰러졌다.
이것은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소년과 소녀 사이의 내막이다. 사실은 이것만으로는 사건에 대한 설명이 불충분하며, 두 사람 사이에는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에피소드가 있었을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는 다른 문제가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은 남아 있다. 서로 사이좋게 지냈을 수도 있었던 소년과 소녀가, 어째서 다정한 한 쌍의 연인이 되지 못하고 서로 상처만 안긴 채 끝을 냈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 말이다. 그 사건 이후, 소년은 소녀가 아닌 자신의 존재에 대해 밑바닥부터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물론 농구 코트 위에서도, 드리블을 하는 손놀림 가운데에서도 그 의문은 완전히 사라질 수가 없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소년이 여전히 소녀를 사랑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소녀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년은 사실 소녀가 자신을 무척 사랑했다는 사실만큼은, 그 사실만큼은 전혀 깨닫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