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의 폭주
25. 유수연
영민이에게 둘이 몇 마디의 대화를 나누다가 그대로 가 버렸다고 한 말은 거짓말이다. 세복이가 절대로 그런 식으로 날 두고 갈 리가 없었다.
세복이는 아키의 유도에 말려들고 만 것이다.
결혼식 다음날, 출근하자마자 나는 왜 송선우 선생이 대뜸 결혼식 축가의 파트너로 나를 지목했는지 그 이유를 듣고 얼이 빠졌다. 정아가 내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던들, 결코 송선우 그러니까 닥터 송이 자기 마음대로 나를 결혼식 축가의 파트너로 지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정아와 나 사이에 합의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당연히 내가 대타로 나서리라 생각했었다.
말하자면 닥터 송 또한 정아의 말을 듣고 오해를 한 통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냥, 사과해."
세복이가 코웃음을 치며 내게 그렇게 말했지만, 그렇게 간단한 사과로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로부터 이틀 정도 지났을까. 심란한 마음으로 접시를 닦고 있는데, 저만치에서 술을 마시는 아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때마침 손님이 많지 않은 날이었다. 나는 카운터를 빠져나와 술을 마시는 아키와 마주앉았다.
"오랫만이네."
"그렇게 오랫만인 건 아니에요. 전 계속 누나를 봐왔으니까."
나도 모르게 표정이 굳었다고 해도 할 수 없다. 아키는 쳐진 눈을 가늘게 뜨며 씩 웃었다.
"그때, 그런 식으로 데려갔다가 돌려보내서 미안해요."
"그때, 왜 그랬니?"
"아, 그건 말이죠."
아키는 지그시 나를 바라보며 술잔을 기울였다. 나 또한 말없이 아키를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아마 그 순간 우리 둘 다 서로의 운명을 알아채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누나의 눈에서."
아키가 술잔을 내려놓았다 .
"죽음이 보이네요."
나도 모르게 눈을 내리깔았다. 그 순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나는 아키를 증오하고 있었다.
"그건 대답이 아니잖아."
아키가 이 곳에 오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지난 여름, 분명 나를 상대로 잡담을 하며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장난을 치던 그는 내가 증오해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웨이크업에 마약 따위는 가져오지 않았었다.
언제부터 내가 그를 수상하게 여기기 시작했던가. 그가 언제부터 나와 노닥거리는 대신 은밀하게 더러운 인간들과 접선을 시도하고 마약을 운반했던가.
바로 그때부터다.
세복이가 아키에게 경고하러 와서,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바로 그때부터다, 아키가 변하기 시작한 것은.
아키는 세복이에게 빠진 것이다.
영민이와 달리, 세복이를 지켜줄 사람이 아니다. 분명 세복이를 위험에 빠뜨릴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팔짱을 끼며 상체를 뒤로 빼고는, 쓴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누나, 나랑 했던 얘기, 아무것도 기억 안 나요?"
"너랑 했던 얘기?"
"좀 궁금한 게 있어서 누나한테 최면을 걸었었어요. 전혀 기억 못하나 보네."
그러면, 그게 꿈이 아니었던 건가.
아키를 따라간 후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들려왔던 그 목소리가, 아키의 목소리가 진짜였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강태석을 어떻게 죽였는지, 왜 죽였는지, 누가 죽였는지를 묻던 그 목소리.
그게 꿈이 아니라, 아키가 내게 건 최면 상태에서의 대화였다니.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요."
아키가 난처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말했잖아요. 누나처럼 예쁜 사람을 어떻게 감옥에 보내겠어요. 걱정하지 마요. 내가 둘 다 감옥에 가지 않게 해 줄게요."
새삼스럽게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 입가에 웃음이 번지는 걸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어디 그걸로 마음껏 협박해 보려무나. 넌 날 해치지 못해. 그리고 네가 세복이를 해치게 내버려두지도 않을 거야.
"하나는 확실하게 알겠네요."
"뭐가?"
"내가 오래 전에 알던 영 누나는, 수연 누나랑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거."
"........"
"그 누나는, 겉으로는 잘난 척 하고 건방지게 굴었지만, 사실은 속이 따뜻한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그가 잠시 말을 끊었을 때, 먼발치에서 절대로 못 알아볼래야 못 알아볼 수 없는 실루엣이 얼핏 비쳤다. 세복이였다. 곧 내가 퇴근할 시간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런데 수연 누나는 다르네요. 이렇게 얌전해 보이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는 법이 없어요. 아니 그럴 수가 없죠. 잡아주는 손을 놓치는 순간, 그대로 먼 곳으로 떨어져내릴 사람이니까."
어이가 없어 계속 웃고는 있었지만, 정확히 보았다고 생각했다.
누구에게든 상냥하게 대하지만, 나는 알고 보면 죽음의 차가움과 맞닿아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일까, 세복이는 나와 함께 있을 때조차 나를 잃을까 봐 불안해한다. 내가 그 애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알면서도 그러는 건, 그 애 또한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직감으로 느끼고 있었던 탓이었을까.
어느 새 생각이 잠겨 있던 내가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아키는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이 진지했다.
"이런 사람을 사랑하는 세복이 누나가 불쌍하네요."
바로 그 세복이가 자신의 등 뒤로 다가와 있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말한 그는, 내가 방심한 틈을 타 느닷없이 자신의 두툼한 입술로 내 입술을 가볍게 빨았다.
혀가 입 속으로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꽤나 끈적한 키스였다. 아찔한 술 냄새에 머리가 아파왔다.
그리고 아키가 입술을 뗀 순간, 난폭하게 나를 일으켜 세운 세복이가 나를 밀쳐내고 내가 앉았던 자리에 앉았지만 세복이를 말릴 수가 없었다.
세복이는 지난 여름 웨이크업에서 아키에게 보였던 그 표정 그대로 아키를 노려보았다. 만면에 웃음을 띄우고. 반면 내게서 입술을 떼고 눈을 뜬 아키는 눈앞의 얼굴이 갑자기 내가 아닌 세복이로 바뀐 것에 약간은 놀란 눈치였다.
"오랫만이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그럭저럭. 네 덕분은 아니지만 어쨌든."
"다행이네요."
"여긴 어쩐 일이냐?"
"뭐 그냥저냥 심심해서."
"흐흥. 그래서, 그냥저냥 심심해서 또 쟤를 납치해가려고? "
"누나."
"왜?"
"누나가 남자로 안 태어나길 천만다행이에요. 누나가 남자였으면, 모든 남자들의 공공의 적이었을 거예요."
"미안하다. 지금도 공공의 적이라서. "
그 순간 저쪽 테이블에 앉아 있던 여자들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픽 웃었다. 그러나 사실 웃을 상황은 아니었다.
"저기, 아무래도 우리 자리 옮겨야겠죠?"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저랑 저희 집에 가서 한잔 하실래요?"
"그래. 바라던 바다. 네 시신은 너네 집 앞마당에 파묻으면 되겠구나."
"뭐 앞마당은 없지만."
아키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웃었다.
"그럼, 일단 가 보죠?"
세복이는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서며 내게 말했다.
"오늘은 먼저 들어가. 난 이 녀석하고 얘기 좀 해야겠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