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흔
초생달이 나를 미치게 한다.
내 안에서 고요한 광기가 또아리를 튼다. 스무 해 전, 서라벌을 떠나던 날, 만월이 나를 내려다보았었다. 도기야1)에서 배를 타고 왜국(倭國)으로 떠나던 그 날에도 초생달은 어김없이 내 머리 위에서 차게 웃었다. 검은 구름으로 이마를 살짝 가린 저 우라질 놈의 초생달이 나를 미치게 한다. 이런 날에는, 저 곰보 같은 아내의 상판대기를 등진 채 누워 있을 수가 없다. 기어이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수라재2)를 향해 뛰어야 한다.
잊혀지지 않는 사랑은 슬프다. 약속 따위는 하지 않았어야 했다. 너와 더불어 만루의 샘물을 마실 때 진심이 아닌 거짓을 담아 마셨어야 했거늘! 그러나 여전히 사랑하는 아름다운 기요, 나를 탓하지 말라. 모든 것이 저주받을 내 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왕통? 왕자! 이름만은 그지없이 좋다. 잘생긴 신라의 왕자가 바닷가 집에 당도했다는 소식에 가슴을 설레며 바닷가로 다가온 너는 땟국물이 흐르는 열두 살의 소년을 보고 실망했다지. 그 모습을 보지 못했으나 나는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은 긴 소매자락 사이로 빠져나온 늘씬하고 가느다란 너의 팔이 네 얼굴을 가리는 모습을. 깎아놓은 백옥이나 다름없는 네 팔을 떠올릴 때면 나는 통곡하고 싶다.
기요, 너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 그 어린 나이에 이역만리 먼 타국까지 끌려온 나를 만났는지. 나는, 결코 돌아온 것이 아니니라. 내 나라, 내 고향의 흙과 핏줄이 나를 불렀으나 너와 함께 돌아온 것이 아니라면 나는 결코 돌아온 것이 아니니라. 네가 그리도 탐해 마지않던 이 몸뚱이는 돌아왔으되 혼은 돌아올 수가 없어 네가 있던 그 땅에 그대로 남겨두고 왔느니라.
국대 부인의 곡소리가 흙바닥의 자갈 사이사이로 발뚝처럼 박힌 이 곳에 다시금 서서, 나는 바다 너머를 바라본다. 이 곳에서는 사내 대장부가 눈물을 흘린다 하여 야단칠 이가 없구나. 다리를 뻗고 앉아 손으로 흙을 움켜쥔다 하여 나를 일으켜 세울 이 또한 없느니라. 초생달이 내 아내의 부러진 금가락지 조각처럼 빛난다. 이러한 날에 네가 다시 나타나리라 믿는 내가 어리석다 하여 탓하지 마라. 비단치마를 입은 네가 소리없이 내 목을 감아 흙바닥에 눕히고 내 허리를 네 치마로 덮을 것만 같다. 한 번만, 다시 한 번만,단 한 번만 네 무릎 사이로 들어가 나를 태울 수 있다면 나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 이미 나는 너무나도 늙어 버렸다. 기요, 너는 믿지 못할 것이나 너를 잃어버린 그날 이후 나는 나이를 먹기 시작했다. 늙기 시작했어. 그것도 보통 사람이 늙는 것보다 갑절의 빠르기로 늙기 시작했다. 이 모습으로 너를 다시 만나다니, 끔찍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나는 죽을 수 없으나 또한 살 수도 없는 사람이다. 기요, 너는 네가 떠난다 했으나, 너는 아직도 이 몸 속에, 이 가슴 속에 저 초생달과 함께 머물러 결코 떠나지 않았느니라. 호수에 잠긴 달이 몸을 비틀며 흐느껴 울고 나는 어느 먼 옛날에 몸을 비틀며 물을 뜨던 네 모습을 건져내고 흐느껴 운다.
나를 왜국에 보내기로 결정한 신라의 왕은 그 자신이 타국에 볼모로 잡혔던 과거가 있어 그 앙갚음으로 나를 왜국에 보내기로 했노라고 늙은 신하들 중 하나가 내게 말했느니라. 나는 아직도 그 음흉하고 매캐한 목소리를 느낄 수 있어. 심지어는 그 늙은이의 이빨 사이에서 풍기던 썩은 지린내까지도 말이다. 내 형제들에게는 나를 지킬 힘이 없었다. 내가 떠난 뒤 그들이 얼마나 많이 울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더욱이 내 바로 위의 형3)은 내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시사철 눈이 내린다는 북쪽 나라로 떠났다는 사실마저 나는 들어 알고 있었다. 너무나도 어렸으니 떠나는 게 뭔지, 이별이 뭔지 알 턱이 없었지. 그저 아주 어린 시절 왕궁을 떠나 사흘이고 나흘이고 소풍을 다니다가 지칠 대로 지쳐 왕궁으로 돌아오던 그 추억 그대로, 돌아오면 되는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래서 나는 나를 배에 올려 안아올려 태우던 그 늙은 수부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던 게야. 부디 사셔야 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저 살아가셔야 합니다. 나는 그의 말을 깊이 생각하지 않았네. 그저 늘 하던 버릇대로 늙은이의 충고이니 귀담아 두었을 따름이었지. 그 나이쯤 된 사람들은 여간해서는 틀린 말을 하지 않는 법이라고 항상 들어 왔거든. 내 정신은 태어나 한 번도 타 본 적이 없는 그 커다란 배에 쏠려 있었네. 그것은 서라벌의 연못에서 타던 조각배와는 분명히 달랐어. 그것은 연못에 띄우는 배가 아니었네. 그것은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만난 바다를 가로지를 배였거든.
........사흘의 낮이 지나고 사흘의 밤을 넘기며, 나는 심한 멀미를 했지. 나중에는 골수며 창자까지 뒤집혀 올라오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토하고 또 토했지. 나는 내 입에서 떨어진 끔찍한 토사물이 헤아릴 수 없이 깊고 어두운 물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지. 나는 바다가 내 토사물이 아닌 나를 집어삼킬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에 뭍에 도착하는 그 순간까지 내내 겁에 질려 있었다. 밤이면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머리 위에서 소용돌이쳤고 나는 온 몸을 담요로 칭칭 감은 채 망망대해를 떠도는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사방이 물로 둘러싸인 곳에서 밤을 보내는 것은 실로 잔인한 고통이었지. 설령 내가 도착하는 곳이 지옥이라 하더라도 땅으로 이루어진 곳이기만 하다면 한시바삐 발을 내딛고 싶었다. 그러니 기요, 이윽고 이 땅에 갓 도착해 바닷물로 발을 적시며 배에서 내린 나의 몰골을 보고 네가 그토록 놀랐던 것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너는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충분한 교육을 받아 서툴게나마 우리 나라 말을 몇 마디쯤 지껄였을 수도 있었으련만, 너는 입을 열지 않았어. 단지 웃음 띤 얼굴로 나를 데리고 움막으로 들어갔을 뿐이다. 나는 처음으로 나를 씻긴 사람이 기요 너였는지 아니면 진흙빛의 얼굴을 한 늙은 여종이었는지 아니면 쪽을 찐 너의 시녀였는지 기억나지 않아. 하지만 옷을 갈아입은 나를 보고 처음으로 네가 내게 했던 말을 기억한다. 너는, 내게 아름답다고 했다. 만일 그때 내가 네 말대로 아름다웠다면, 그것은 내가 어린아이였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알아. 바다 건너 이국에서 갓 도착한 순진무구한 어린아이가 결코 네게 나쁜 인상을 주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을. 하지만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때까지 나는 너처럼 하얀 피부를 가진 여성을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왕궁에서 그리고 별궁에서 보았던 여자들은 아무리 살결이 희고 고운 여자라고 해도 조금은 노르스름한 빛깔의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너는 달랐다. 너는 눈같이 희었다. 그리고 네 눈은, 흰자위 언저리가 불그스름하게 물든 네 눈은 내게 그때까지 상상도 못했던 세계로 나를 들어가게 했다. 바로 그때 처음으로 내 자지가 일어서는 것을 느꼈으니 말이다.
........내륙으로 가는 길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공허했다. 내 나라에서 보던 것과 같은 그러한 따스함이 없었어. 산도, 들도, 나무도 그러했다. 어딘가에서 늘 내 숨통을 막는 한 줄기의 무거운 공기가 실오라기처럼 내 뒤를 끊임없이 따랐다. 왕궁에서 도착한 후에도 그 무거운 공기는 나를 끝내 놓지 않았지. 심지어는 왜왕의 앞에 나간 후에도 말이야. 그것은 어쩌면 귀신이었을지도 모르지. 내 앞길을 망치려고 작정을 한 거야.
왜왕은 나에게 별반 관심을 두지도 않았어. 그는 내가 교묘하게 위장한 가짜가 아니라 틀림없는 진짜 신라의 왕자이기만 하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투였지. 그저 나를 흘끔 쳐다보며 아직 어리군, 이라고 한 마디 했을 뿐이야. 물론 내 곁에서 그의 말을 통역해 준 친절한 노인이 아니었다면 단 한 마디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겠지. 최소한 나는 왜왕이 내게 악의가 없음을 알았다. 그가 신라 왕자에 대해 평소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몰라도 내가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을 존재라고 판단한 것은 분명해. 나는 어렸지만 네가 나에 관한 전권을 왜왕으로부터 위임받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네가 나를 더럽혀 놓기 전, 나는 총명한 왕손이었고 총명한 아이였다. 나는 내가 해도 무방한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분명히 구분하고 있었어. 말이 통하지 않는 왜왕과 나 사이에서 통역을 맡은 자는 내가 아직 어리니 탈출이나 반역 따위를 꾸미지 못하리라고 모두들 생각하고 있다고 내게 일러주었다. 그러나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나는 철저하게 신라인들로부터 격리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은 동시에 내 앞에 펼쳐질 들판, 외로운 세월로 점철된 황량한 들판을 보여주었지. 그러나 나는 눈물조차 떨구지 못했어. 그런 나를 다정하게 위로한 사람은, 누이라는 호칭조차 무색하게 나이가 많은 데다 남편까지 있던 기요, 바로 너였다.
너와 나 사이에는 십이지(十二支)를 한 바퀴 두르는 햇수만큼의 나이 차이가 있었지. 다른 여인들과 달리 머리를 높이 틀어올린 네가 왜왕 앞에서 공손하게 몸을 곧추세운 채 스르르 주저앉아 절을 하던 모습은 가히 나를 내 정신을 무아지경으로 몰고 가게 하기에 충분했다. 새하얗게 드러난 네 목덜미에 힘없이 늘어져 있던 몇 가닥의 머리카락을 본 순간 나는 그 자리에 너와 함께 스러져 울고 싶어졌으나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그 즉시로 나와 함께 내륙으로 떠날 예정이었던 네가 남편과 떨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나는 감금되었다. 그게 내 운명의 도착지였어. 그때쯤 해서는 나도 이 부질없고 황량한 여행이 싫증이 난 터라 한시바삐 어딘가에 머무르기만을 바랬다. 이상하게도, 부질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덧없는 기간 동안 나를 사로잡았던 향수(鄕愁)는 바다를 건너오는 동안 옷에 밴 바다의 향과 더불어 서서히 사라져갔다. 나는 매일 동쪽에서 떠올라 서쪽으로 지는 해의 붉고 둥근 자태를 쳐다보았고 약불꽃4)의 꿀을 빨았으며 이따금 정원으로 몰래 숨어들어오는 토끼를 쫓았다. 나는 신라를 생각하지 않았다. 서라벌에서 보던 것과 똑같은 단풍을 보고, 서라벌에서 내 형이 사냥하던 노루와 똑같은 노루를 향해 화살을 쏘면서도 나는 신라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 지나간 시간의 물살은 참으로 빠르게 하류로 흘러가고 어느 새 상류로부터 흘러오는 현재라는 시간의 물살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거야. 해마다 마을로 내려가는 길목에 선 벚나무가 꽃을 피울 때면 나는 괜스레 함박눈을 소담스럽게 인 모양으로 꽃을 피운 그 벚나무들을 베고 싶었다. 나는 아름다운 것들을 해치고 싶었어. 손톱만한 꽃잎이 하늘하늘 떨어져 내릴 때쯤에는 그것들이 바람에 흩날려 가는 모양을 보며 바람이 그것들을 어디로 실어갈지를 가늠해 보았다. 그것들은 동쪽으로는 결코 날아가지 않았다. 아니, 동쪽으로 날아가서는 안 되는 것이었어. 한 해가 지나고 두 해가 지나고 세 해가 지나도, 그것들은 동쪽으로는 가지 말아야 했다.
........순수한 호의에서 나를 돌보기 위해 마을에서 가끔 찾아오던 몇 안 되는 아낙네들은 한결같이 입을 다투어 내게 계집아이보다 예쁘다고 입을 모았으나, 너는 그들이 가져온 콩이며 밤, 잣 등을 내게 내밀 뿐 그들에게 결코 동조하지 않았다. 그러나 너는 내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어. 어느 날, 발가벗은 아이들이 망태기를 들고 살아 퍼덕이는 고기를 양 손에 움켜쥔 채 신이 나서 내 정원을 가로지르는 광경을 본 순간까지 나는 내가 자랐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나는 반쯤 열린 창문 사이로 그들을 보았고 마침 목욕을 하려던 참이라 그들과 마찬가지로 벌거숭이가 되어 있었다. 그 중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은 한 계집아이가 집게 손가락을 길게 내뻗어 내 하반신을 가리켰다. 나는 그 계집아이가 내 몸의 어느 부분을 가리켰는지를 안 순간,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그 순간 나는 뱀이 허물을 벗듯 나 자신을 벗어버린 상태였다. 나 자신조차 잘 알지 못하는 어떤 이유로 남의 나라에 끌려온 왕자라는 허물도 벗었고, 응당 고향을 그리워해야 할 어린애라는 허물도 벗었지.
그날 밤 나는 창문 사이로 휘영청 뜬 만월을 보며 울었다. 나의 음침하고도 탐욕스러운 눈빛을 말없이 인내하며 밤이면 깨끗하게 빤 내 속옷을 고이 접어 장롱 속에 넣어두던 너는 그날따라 유난히 울음을 그치지 않는 나를 달래려 하지 않았다. 베개에 머리를 비비며 땅을 치고 울던 내게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이제는, 어린아이가 아니시군요. 그 눈이 어느 순간부터 미끈한 애욕의 물기가 머금기 시작했는지는 나도 모른다. 내 기억은 희미해. 하지만 희미하기 때문에 나는 내 기억을 더듬는 것이 즐거워. 물에 젖어 번져 버린 글자처럼 희미해지고 이지러진 기억들을 내 상상의 붓으로 다시 쓸 수 있기 때문이지. 그 때 너는 틀림없이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더 아름다워지셨어요. 너는 속절없이 바닥에 엎드려 있던 내 바지춤을 끌어내렸고, 네 치마를 끌어올렸지.
여인의 다리가 지닌 아름다움을 음미할 심미안을 갖추기에는 그때 내가 너무 어렸었다. 그러나 너의 다리 사이에서 나는 내가 그때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으며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을 보고야 말았지. 내 다리 사이의 그것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그것을 본 순간 전율이 내 온몸을 감쌌다. 그때 나는 왜왕의 앞에서 수직으로 스르르 스러져 절을 하던 네 하얀 뒷목덜미의 검은 잔털을 떠올렸다. 그것은 참으로 기막히게도 네 목덜미를 닮아 있었지. 너의 희고 고운 손이 내 손을 잡기 전에 나는 네 목덜미와 네 물기어린 눈과 나의 벗겨진 바지가 의미하는 바를 알아차렸다. 음양의 이치? 아니다, 아니야! 그건 음양의 이치가 아니었다. 그것은 목마른 인간에게 주어진 한 모금의 달고 신선한 샘물처럼 내가 그때까지 찾지 못해 몸부림쳤던 애절한 환상이었고 감각이었어. 나는 그 환상의 실체도 모른채 그 환상의 더운 피에 몸을 담그지 못해 미칠 예정이었지만 너는 지나치게 일찍 나를 구했던 것이다. 미안하구나. 훗날 나는 몇 번이나 네게 나를 더럽혔노라고 말했지만, 진실은 그것만이 아니었는데. 나는 더렵혀지지 않고는 살 수가 없었는데, 너는 모든 책임을 너 혼자 뒤집어쓰고 말았어.
그 감도(感度)는 물을 먹은 글자차럼 흐리게 이지러진 기억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몸을 마비시켜 영원히 자라지 못하게 할 현재의 쾌락이었다. 너는 내가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나의 내면으로 침잠할 위기에서 나를 끌어내서는 내가 영원히 헤어나올 수 없는 열락의 늪에 나를 내던졌다. 그래도 나는 네가 그날 밤 내게 가르쳐 준 것 이상의 기쁨을 누리고 싶지 않았다. 십이지를 한 바퀴 돌아야 할 만큼 긴 햇수를 두고 너와 내가 태어났다는 사실을 그날 밤 너는 처음으로 내게 고백했다. 또한 네 남편이 왜왕의 높은 신하라는 사실 또한 내게 일러 주었지. 너는 내게 늘상 너 자신이 천하다 하였으나 실상 너는 천한 몸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네게 한결같이 하대를 했으나 너는 내게 경어를 썼다. 그러나 그날 이후로 너와 나 사이에는 어떤 격차도 부질없는 것이 되어 버린 셈이야. 갈매기가 끼룩이며 우는 바닷가에서 너를 처음 본 순간 느낀 그 감질나는 애절한 감각의 실체를 그날 밤에 깨달아버린 셈이야.
기요, 너는 태생적으로 음란한 여인이었어. 나는 그걸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지. 참으로 신기한 일이야. 네가 내 위에 올라앉은 그날 이전까지 나는 네 몸의 어느 구석에서도 인간의 살내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없었다. 그날 이전까지 나는 네 얼굴과 목 그리고 이따금 드러나는 팔과 다리를 보았을 뿐이었지만, 나는 네 몸 어디에서도 핏기를 찾지 못했다. 너는 색채도 냄새도 없이 뼛속까지 하얗기만 한 여인이었어. 네가 내 위에 처음으로 올라앉아 신라의 거문고 소리를 떠올리게 하는 소리를 지르던 그날 밤 만월 아래 드러난 네 몸은 소스라칠 정도로 차갑고 희었다. 그러나 그 다음 날, 짙은 먹구름이 뒤덮인 한낮에 또다시 내 위에 올라탄 네 몸은 더 이상 그처럼 차갑지도 희지도 않았다. 육안으로는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하게, 네 몸에 혈색이 돌기 시작하고 있었다. 네 목에서 가르랑거리던 간드러진 교성은 네 허파에서 헐떡이며 끓어오르는 절규로 변해갔지. 그와 더불어 네 몸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누른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사람의 살결이 띠는 그러한 누른빛이 네 살갗에 감돌기 시작했단 말이다. 물고기의 비늘처럼 차갑게 미끈거리던 네 몸이 찰떡같은 끈기를 띄기 시작한 것도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자연스럽게 변해간 거지. 그 이태 동안 너는 그렇게, 더욱 아름답고 매혹적인 여인으로 변해갔다. 지금도 잊을 수 없어. 네 발과 내 발이 우리들의 몸 아래 깔린 이불을 어떻게 짓이겨놓았으며 짓이겨진 이불이 어떤 무늬를 그려놓았는지 나는 알 수 있어. 네 몸 위에서 숨가쁘게 흔들리던 네 허리에서 다리에 걸쳐 전해지던 그 파열에 다다르는 진동을 느낄 수 있어. 파르르 떨리던 네 손과, 기묘한 물결 무늬를 만들며 구부러지던 네 흐트러진 머리카락까지도. 그러나 기요. 그토록 정신없이 열에 들떠 절정으로 솟구치는 순간에도 너는 내 손에 너를 내맡기지 않았다. 내 손이 네 몸을 만지는 것을 거부했어. 그래서 견딜 수 없는 쾌락에 정신을 잃어가던 순간에도 나는 내 가슴 위에서 물결처럼 출렁이는 네 가슴의 한가운데 보석처럼 박힌 네 유두를 쥐지 못했다. 그래서 내 손은 별수없이 허공을 할퀴거나 애꿎은 이불을 쥐어짜기 일쑤였지. 어느 날 기어이 나는 이불을 찢고 이불 아래 다다미마저 할퀴어 놓았고 그걸 본 너는 그 혼미한 희락의 한가운데에서 등 뒤로 길게 풀어헤친 네 머리카락을 내 손에 쥐어준 거야. 가쁜 숨을 토해내며 나를 밀어붙이는 네 살결은 전에 없이 아름다운 상아빛을 띠었지만, 그러나......핏기는 없었다. 핏기는 없었어. 너는 이제야 인간의 여인이 가져야 하는 피부색을 찾은 셈이었지만 인간의 여인이 가져야 하는 온기만은 찾지 못했어. 너와 더불어 나를 돌보던 계집종들과 같은 피부색을 찾았지만 그들이 가진 온기를 찾지 못했단 말이다. 너는 어쩌면, 마술에 걸린 여인이었는지도 모른다. 이태가 지난 어느 날, 너는 마지막 가쁜 숨을 토해내며 질러대는 교성의 끝자락을 잡고 이렇게 외쳤다. 삭(朔)이에요!......아! 너는 끝내 내 위로 넘어지지 않고 머리를 젖히며 내게서 몸을 빼냈다. 그 순간에조차 나는 네 머리타래를 두 손에 꼭 그러쥔 채 터질 것 같은 가슴의 고동을 어쩌지 못하고 끝내 나를 안아주지 않는 너만을 야속하게 올려다보았을 뿐이다. 이윽고 몸을 일으켰을 때, 나는 비로소 볼 수 있었다. 감청빛으로 물든 하늘에 가냘프게 떠올라 네 살빛과 똑같은 빛으로 빛나는 삭을.
너로 인해 내 몸이 마비되었다는 사실을 나는 애진작에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그대는 모르고 있구료, 라고 탄식하던 그 늙은 머슴에게 나는 알고 있다고 대꾸했던 것이지. 이 곳의 후덥지근하고 습한 공기는 정신적이 아닌 육체적인 희노애락을 추구하도록 은근히 나를 부추기는 데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너와의 교접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내 원기를 빨아들인 네 몸이 나를 떠나기 위해 일어서는 순간이면 자꾸 어디선가 소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란 말이야. 나는 처음에 그 소리가 뒷마당에 선 ( )나무들의 잎사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이거나, 그게 아니면 저 산 너머에 있는 대나무 숲에서 들려오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산 너머 소리가 이 곳까지 들릴 리가 없음을 잘 알면서도 말이야. 그러나 이윽고 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떠올리지 않은 어떤 아련한 상(像)이 맺히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 소스락거리는 소리가 뒷마당에서 혹은 산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건 바다 저편에 두고 온 내 기억들이 내는 소리였어. 내게 소리죽여 탄식했던 늙은 머슴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질러대는 너와 나의 교성을 은밀히 들으며 홀로 신음을 토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에게 물었지. 내가 무엇을 모르고 있느냐고. 그는 내게 대답했다. 그대는 한때 일국의 왕자였으나, 지금은 타국에서 요녀에게 사로잡혀 자라지 않는 애어른에 불과하오. 그대의 몸이 수년째 변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시오. 털끝 하나 새로 자라지 않았소. 그대가 자라기 위해서는, 그대의 땅에서 태어난 여자와 교접을 해야 하오.
참으로 희한하게도, 다음날 왜왕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내게 신라 출신의 어린 계집종을 보냈다. 머리를 땋아서 감아올린 계집아이는 그 곱고 화려한 머리 모양을 제외하면 그다지 이곳의 계집아이들과 다를 것도 없어 보였다. 얼굴은 퍽 아름다웠으나 행색은 여느 몸종들 이상으로 남루했지. 그 계집아이가 신라의 말로 내게 첫 인사를 했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떠오르는 당혹스러움 때문에 두 뺨에 솔방울로 문지르는 것 같은 따가움을 느껴야만 했다. 그래도 너는 결코 그 때문에 동요하지 않았어. 내게서 욕정을 채우려 하지 않을 때의 너는 항상 냉정했다. 여느 어머니나 누이 못지 않은 부드러움으로 나를 보살필 때조차 항상 그러했다. 네가 젖어서 축축한 머리를 풀고 옷을 벗어 노란 상아빛 살결을 드러내며 내 위에 올라앉을 때만 너는 냉정을 잃었다. 이상하게도 네 살결이 불러일으키는 관능은 항상 나를 슬프게 했다.
네가 남편을 만나겠다며 수도로 떠난 후, 처마 아래로 비가 눈물처럼 떨어지던 날이었다. 나는 창문 틈으로 새어드는 비를 막으려고 종이를 찢어 문틈에 이어 붙이며 나는 네 살빛이 나를 슬프게 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하필이면 운 나쁘게도 내가 발을 씻을 물을 들여온 계집아이의 팔을 보고서야 그 이유를 깨달았다고 하면 너는 믿지 않을 터이다. 아니 믿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말할 수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나를 어린아이로 취급하는 네 태도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야.
그 계집아이의 살결은 분홍빛이었다. 핏기라고는 없이 누렇기만 하던 네 살결과는 달랐어. 네 살결에는 핏기가 없었다. 폐병 환자의 안색처럼 누르스름한 빛깔만이 네 살결을 온통 점령하고 있었지. 거기에는 관능만 존재했다. 인간의 체온과 애정은 없었어. 나는 실로 오랜만에 바닷가에서, 그리고 왜왕의 왕궁에서 본 너의 은백색 살결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제서야 깨달았다. 널 더럽히고, 네 몸에 그와 같은 음란하고 슬픈 색을 입힌 것은 다름아닌 나였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눈물이 났다. 그래서 그 눈물을 참으려고 그 계집아이를 덮쳤다.......그리고 다음 날 해가 중천에 뜬 후에도 그 계집아이를 껴안은 채 버둥거리는 내 앞에 나타난 너는 고된 여행에 지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을 뿐이다.
......무슨 긴 설명이 필요할 것인가. 너는 내게 말했지.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말이 하도 무심하게 들려서 나는 그저 네가 여느 여인네들처럼 새삼스러운 넋두리라도 하려나 싶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지. 적은 세월이 아닙니다. 전하, 전하와 제가 만난 지 올해로 십이년째가 됩니다. 그런데 전하, 전하는 전혀 자라지 않았습니다. 아니, 처와 처음으로 몸을 맞추시던 칠 년 전 그날 그대로입니다. 변함없이 아름다우시지요. 나는 대꾸했지. 너도 그대로야. 그러나 그건 거짓말이었다. 네 몸의 색은 10년에 걸쳐 아주 미묘하게, 천천히 변해 왔거든. 어느 순간에 이르러 색이 더 짙어지지는 않았지만 내일 조금씩 그 색의 농담(濃度)을 달리하며 변해 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도 늙지 않았어. 그리고 십 년이 지나도록 어느 누구도 그 사실을 기이하게 여길 겨를이 없었던 거야. 욕정에 홀려 나이먹지 않음을 수상히 여길 겨를이 없었다니 이 어찌 아니 웃고 배길 일인고. 너는 비에 젖어 축축해진 뜨락을 바라보다 내 손을 잡고 길을 나섰다.
.......새벽부터 진종일 걸어 하루를 꼬박 걸려 도착한 곳은 인적이 없는 산 속이었다. 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폐사지(弊社地) 뒤로 돌아간 우리는 작은 자갈로 울타리를 친 샘을 들여다보았지.
만루의 샘입니다. 사랑하는 남녀가 이 곳에서 물을 마시면, 그 연인의 사랑은 죽을 때까지 변치 않는 것은 물론 죽은 후에도 변치 않는다고 합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백짓장 같은 네 얼굴을 쳐다보았어. 달빛에 비친 네 얼굴은 네가 그리도 좋아했던 합삭의 모양으로 얼굴 반쪽의 일부만 희미하게 빛날 뿐 나머지 부분은 그림자에 가리워져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그 그림자가 언제나 한결같이 네 얼굴에 머물러 왔으며 네 얼굴뿐 아니라 네 마음까지 가려 왔음을 깨달았다. 너는 참으로 독했다. 나를 사랑하노라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어째서 내게 묻지 않았느냐. 너를 사랑하지 않느냐고? 너는 말없이 샘에 손을 집어 넣어 물을 뜬 후 네 입을 적시고는 물을 머금은 입을 내게 내밀었다. 나는 네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샘 앞에 드러누웠다. 너는 마른 내 입을 네 입이 머금은 물로 적셨어. 그게 우리의 입술이 처음으로 맞닿은 순간이었지.
죽을 때까지 변치 않고, 죽은 후에도 변치 않을 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 순간이라도 고심할 여유가 있었다면 나는 그 물을 마시지 않았을 것이다. 네 입에서 솟아나오는 샘물이 내 목구멍을 넘어간 순간, 내 눈에서 눈물이 치솟았다. 목구멍을 넘어간 샘물이 다시 목을 타고 넘어와 눈을 흘러들어온 후 눈동자를 따라 흘러나오는 거나 다름없었다.
나는 정을 몰랐고 너는 정을 알았으나 감추고 또 감추었다. 네가 감추었던 정은 바다보다 깊어 너 자신조차 헤어나오지 못했던 그런 정이었다. 그 깊은 바다에 네가 날 끌어들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내가 느낀 해방감을 나는 설명할 수 없어. 한 사람을 묶고 있던 욕정의 쇠사슬이 끊어진 순간에 애정의 끈이 두 사람을 함께 묶었다는 사실을 몰랐단 말이다.
나는 슬픔을 느꼈으나 참담해하지 않았다. 그러나 샘물을 마심으로써 네 혼네를 처음으로 내게 온전히 드러내 보인 너는 스스로를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그날 밤, 너는 태어나 처음으로 욕정이 아닌 사랑을 나누는 여자가 되어 내게 안겼다. 나는 감정을 잃은 욕정과 욕정을 잃은 감정의 교접을 처음으로 맛보았다. 또한 나는 희고 누른 네 살결을 처음으로 온전히 내 것인 양 만질 수 있었다. 나는 사탕을 빠는 어린 것의 마음으로 네 목을 빨았고 네 가슴을 핥았다. 어린 노루의 솜털을 쓰다듬을 때의 부드러움이 느껴지던 네 살의 감촉을 생각하면 지금도 내 가슴이 뻐근하게 저려온다. 그러나 정작 가슴을 할퀴는 날카로운 고양이의 발톱이 따로 있다. 네 입술과, 네 혓바닥이, 이세 신궁의 불 속에서 화염으로 사라진 후 내 가슴 속에서 다시 살아나 내 입술과 혓바닥을 희롱하지 않았느냐.
만루의 샘물이 네게 정을 가르쳤더냐? 아니다. 아니야. 만루의 샘물은 너를 취하게 했을 뿐이다. 그건 물이 아니라 술이었어.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네가 내게.......
너는 취했기 때문에 네 허리 아래 입술이 아닌 네 목 위의 입술을 탐하도록 허락한 거야. 너는 단지 취했기 때문에 네 살결을 내게 허락한 거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내가 견딜 수 없다. 그날 밤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온전한 사랑을 알았어. 밑빠진 욕정의 독에 물을 부어대며 헐떡이는 수캐가 아닌, 충만한 사랑의 독에서 물을 퍼내며 즐거워하는 인간의 사내가 되었던 말이다. 또한 너는 처음으로 정(情)의 빛깔을 네 몸에 담았어. 언제나 기이한 회색이 섞인 선홍색을 띄우던 네 입술이 붉은 애욕의 불꽃을 피웠다. 단 한 번도 붉은 핏빛을 띄우지 않았던 네 피부 아래로 붉은 빛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도 누렇게 바랜 네 허리 위로 떠오르던 불그스레한 색조를 떠올리지. 그 빛깔만이 내게 아픔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유일한 색채이며, 내가 달을 따라 흐느껴 울지 않게 하는 유일한 빛깔이야.
그것이 사랑의 색이었다. 삭막한 무욕의 창백한 허물을 입고, 추잡한 성욕의 누런 허물을 입은 너는 애욕을 입음으로써 비로소 피와 살을 지닌 여인이 지녀야 할 그 본연의 희고 누르고 붉은 색의 온전한 조화를 찾은 것이다. 그렇게 해서 네 몸은 다시 태어났다. 몇 번이나 머리를 조아리며 읊조렸던 그 찬사는 내게 쏟아졌어야 할 것이 아니라 네게 쏟아졌어야 했을 것이었다. 아름다우세요, 참으로 아름다우세요. 처음으로 너와 내가 한 장의 이불을 함께 덮고 잠들던 날 나는 네 피부가 머금은 뜨거운 온기를 처음으로 느꼈다. 네 살 아래로 흐르는 피가 발했던 최초의 온기는 내 몸이 아닌 내 마음을 데웠다.
아름다우세요. 참으로 아름다우세요.
그가 모든 비극의 원흉이었다. 그가 영원히 나타나지 말았어야 했어.
기요, 나는 내가 세월을 잃었다고 믿었고, 잃어버린 세월을 되찾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그 세월이란 놈이 나를 배신하고 유유히 내 옆에서 걷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오랜 여행에 지쳐 초췌해진 모습으로 그가 내 앞에 나타났을 때 나는 고개를 돌려 내 옆에서 걷고 있던 세월이란 놈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내가 머나먼 옛날 그 땅을 떠나오던 시절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것을 보고도 놀라기는커녕 태연하기만 했다.
그는 나를 전하라고 불렀고 내 앞에 엎드려 울며 절을 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오는 단어들은 하나같이 나에게는 생경스러운 것들이었다. 오래 전 내가 그와 같은 언어를 썼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을 때 나는 불쾌감에 사로잡혔다. 신라에서의 어렴풋한 기억들은 내게는 전생이나 다름없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지. 전생을 떠올린다는 사실 자체는 불쾌한 일이 아니지. 그러나 내가 전생을 저만치에 버려둔 채 그것과 격리되어 오로지 너만을 내 안의 중심에 둔 고정된 한 순간만을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 나를 불쾌하게 한 거야. 그래, 나는 죄책감에 사로잡혔고 그 때문에 불쾌해진 거야.
그러나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될 사실이 있었다. 그토록 오랜 세월을 이 곳에서 지내면서 나는 나 자신이 일본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내가 신라인이 아니라고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 너와의 교접 이후에 내 출생지 따위는 내게 있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 되었다는 걸 넌 알고 있겠지. 그런데도, 나는 언제 어디서든 내가 어느 나라 사람이냐는 물음을 받을 때 당연히 ‘신라인’이라고 대답해야 할 사람이었어. 그러나 아무도 그런 질문을 내게 던지지 않았고 나는 아까도 말했듯 너라는 존재로 고정된 한 순간만을 살고 있었어.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었지. 내게 있어 결국 타국 이외에는 별다른 의미를 얻지 못할 이 곳에 온 이래 내게서 단 한 번도 떨어지지 않았던 유일한 존재가 바로 너였기 때문이다. 그러나.......내가 너를 통해 마신 만루의 샘물은 분명 내 속으로 흘러들어간 이래 내 피가 되어 결코 용해되지 않고 혈관 구석구석을 돌고 있었어. 그것이 이따금 나를 미치게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 그럴 때면 나는 발작을 일으키듯 너를 찾았다. 널 끌어안기 전에는 온 몸을 달구는 뜨거운 기운과 뻐근하게 파닥이는 이 가슴의 날갯짓을 멈출 수가 없었어. 때로는 한바탕 춤이라도 추고 싶은 마음에 달이야 뜨건 말건 달려나가 온 산을 헤매기도 했느니라. 그런 내 앞에 그가 다시 나타나서, 지난 십 수년간 누구도 내게 던지지 않은 질문을 던진 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던 거야.
아니, 그건 비극의 시작이 아니라 결말이었어. 세상에 어떤 사람이 피붙이를 만나고 싶지 않느냐는 질문 앞에서 만나지 않겠다는 도리질을 할 수 있을는지? 멍청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내 앞에서 그는 놀라운 사실을 전했다. 그가 내 형을 머나먼 북쪽 나라로부터 신라로 데리고 온 사람이었다는 거야. 나는 네게 끝까지 그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머나먼 북쪽 나라에는 호랑이의 탈을 쓴 무서운 왕이 있어서 누구든 그의 뜻을 거스르는 자는 세계의 끝으로 끌려가 돌아오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아주 어렸을 때 들은 적이 있었지. 일본이 아닌 다른 어느 나라의 이름을 입에 올릴 때면 너는 고개를 매번 저었지만, 내 안에서 먼 나라의 이야기는 살해당하지 않고 용케도 남아 있었어. 그러나 그가 그 무서운 왕으로부터 내 형을 구했다는 이야기는 전설보다도 더 허무맹랑했다. 나는 결코 그를 좋아할 수 없었다. 아니, 그를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미워하게 되었다.
그는 내 안에서 갓 싹트기 시작한 증오에 날개를 달기로 작정한 것 같았어. 왜왕의 칙서인지 무엇인지를 구실삼아 그는 널 몰아내고 대신 너의 자리를 차지했지. 그것은 온몸이 애욕으로 근질거리는 밤에도 언제나처럼 자연스럽게 널 불러들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너와 내가 함께 들이마신 만루의 샘물이 내 가슴팍을 쥐어뜯으며 울부짖었고 나는 널 부르며 머리를 싸안고 울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너와 내가 함께 마신 그 만루의 샘물을 그에게 이야기했는지. 그는 내가 못내 미워했던 그 온화하고 인자한 눈, 그러나 사실은 간사하고 어리석은 공명심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는 결국 고래를 돌리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이 곳에 오기 전에, 모든 운명을 읽었습니다. 전설이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아니오. 저는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제가 이 곳에 오고 싶어서 온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그렇다고 분명히 잘라 말했다. 그대는 이 곳에 오고 싶어서 온 것이오. 그는 고개를 내저으며 웃었다. 저는 싫었습니다. 제게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하가 그 계집을 사랑하시는 것보다 열 배, 백 배, 아니 천 배로 그들을 사랑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을 두고 오로지 전하를 구하러 오는 일을 제가 자청했다고요? 아닙니다!
나는 응당 맞장구를 쳐주어야 했어.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그의 말이 옳았어. 그는 이곳에 잘못 온 거야. 그는 당연히 신라에 있는 그의 가족들에게로 돌아가야 했어. 그러나 그가 내게 말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그의 운명에 한 보잘것없는 인간의 삶을 파괴할 임무가 주어져 있었다고 믿어. 그가 나를 고국으로 데리고 가지 않으면, 그는 이 곳에서 사랑하는 가족들과 헤어진 채 비참하게 떠돌거나 혹은 그 자신이 떠돌며 사랑하는 가족의 참형(斬刑)을 지켜봐야 할 처지였다는 걸 난 알고 있었어. 그러나 나는 널 결코 포기하지 못했다. 기요, 너는 나를 따라 신라로 향하는 것을 거부했고 나는 그 이유를 묻지 않았지. 너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지켜야 할 무엇인가가(아마도 네 남편은 아니었을 테지만) 있었다는 사실을 얼마쯤은 짐작하고 있었어. 아니, 그랬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너는 내게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고 아무것도 들려주지 않았어.
나는 네가 누명을 쓴 이유를 알고 있다. 그게 바로 그의 흉계였던 거야. 그러나 너와 내가 나란히 왜왕의 앞에 끌려나갔을 때, 네가 그 모든 누명을 순순히 뒤집어 쓴 이유를 나는 몰라. 왜왕은 내 모습을 보고 적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해할 수 없어. 그대가 이곳에 끌려온 지 어언 15년, 이제는 어엿한 청년이 되었어야 할 그대가 어찌하여 소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것이오? 그러나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어. 너와 약속이나 한 듯 모든 죄를 네게로 돌린 그조차도 그 이유를 몰랐지. 그러나 나를 제외하고는 널 불에 태워 죽이자는 의견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어. 오랜 세월 너와 떨어져 지낸 고관대작인 네 남편은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고. 오로지 나만이, 나만이 눈에서는 눈물을, 코에서는 콧물을, 귀에서는 고름을, 입에서는 침을 질질 흘려대며 개처럼 왜왕의 앞에 엎드려 빌었을 뿐이야. 제발, 제발 한 번만 자비를. 기어이 그녀를 태워 죽이시겠다면, 하다못해 이 추물(醜物)을 같이 태워 죽이는 자비를 베푸시기를.
그러나 결국 내가 선 곳은 화형대에 올려진 네 곁이 아니었다. 나는 화형대가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서 불에 타는 네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했어. 한때 내 손끝의 쾌락에 쥐어짜이는 밧줄이었던 네 머리타래가 뎅겅 잘린 꼴을 본 나는 이미 나 또한 죽을 것을 느끼며 소리내어 울었다. 너는 내게 고개를 흔들어 보였지. 나는 네가 어떤 표정이든 지어 보이기를 바랬지만 너는 고개를 돌렸어. 무정한 기요, 그러나 나는......어찌된 셈인지 네가 하고 싶어하는 말을 잘 알고 있었다. 네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을 운명이었고, 너는 남는 쪽을 택하는 대신 떠나는 쪽을 택한 거야. 너는 이미 그가 우리를 찾아올 운명임을 알고 있었고, 그가 찾아오면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든 이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내가 매일 밤 호롱불에 의지해 책을 읽듯 너는 네 직감에 의지해 너와 나의 운명을 읽고 있었어. 나는 네가 그걸 알면서도 내게 만루의 샘물을 먹였다는 사실이 참을 수가 없다. 단지 보잘것없는 전설 하나를 탄 물 한 모금이 지금까지도 날 이렇게 괴롭히고 있지 않느냐고? 그게 아니라고? 그러나 나는 잊지 못하지 않느냐. 시간을 마시고 이기는 여느 인간들처럼 너를 잊지 못하지 않느냐? 응당 어여삐 여겨야 할 아내를 짐승만도 못하게 내팽개치지 않느냐? 이제 와서 무엇을 숨기겠느냐? 기요, 지금의 내 아내가, 널 불길 속으로 내몰았던 그의 딸이라는 사실을 이제 와서 숨겨 무엇하겠느냐?
저를 원망하지 마옵소서. 전하, 저는 단지 왕명을 거역하지 못해 두 왕자를 구할 운명이 되었으나, 실상 저를 전하에게로 이끈 것은 왕명이 아니옵나이다. 제가 태어났을 때 이미 아흔이 넘었던 마을의 한 어른이 제 어미에게 말했나이다. 제가 저와 상관이 없는 두 사람을 구하고 죽을 운명이라고 하더랍니다. 그 두 사람 중 하나는 저의 전생의 은인이고 다른 하나는 전생에 제가 죽인 저의 원수라고 하더이다. 전하, 그 두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바로 전하와 전하의 형님이십니다. 저의 전생의 은인이 바로 전하의 형님이옵고, 저의 전생의 원수가 바로 전하이옵니다. 그는 네가 그랬듯 내게 도리질을 했다. 소신을 용서해 달라는 간청을 드리지 않겠나이다. 이제 전생의 업을 풀 때가 왔나이다. 제가 불에 태워 죽인 그 계집의 혼이 제게 씌었나이다. 이제 전하께서는 한시도 지체 없이 떠나시옵소서. 구류가 전하의 배를 몰 것이옵니다.
나는 하마터면 그에게 덤벼들어 그의 목을 조를 뻔했다. 그러나, 그가 내뱉은 말들 하나 하나가 내 가슴을 찌르고 내 혼을 찌르고 급기야는 네 아랫도리를 애타게 찾던 내 허벅지 사이의 그놈마저 찌르고 말았다. 제가 불에 태워 죽인 그 계집의 혼이 제게 씌었나이다. 나는, 너와 그가 그랬듯 도리질을 하며 미친 듯이 웃었어. 아니 미쳐서 웃었다. 그래, 네 혼이 그에게 씌었으니 앞으로 널 사랑하듯 그를 사랑하고 네 허벅지 대신 그의 허벅지를 내 위에 앉히고 밤새워 놀란 말이냐? 참으로 실성할 일이지.
그러나 그는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말했다. 저는 전하가 이 곳에 와서 보냈던 지난 세월을 모두 이해합니다. 그 세월 동안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다 알고 있습니다. 신라로 돌아가시면, 전하께서는 전하가 지금껏 살아오시면서 흘리셨던 눈물보다 더 많은 눈물을 날마다 흘리며 남은 인생을 사셔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 역시 마음이 아프옵니다. 그러나 전하, 전하께서 태어난 땅으로 돌아가시옵소서. 전하는 이 곳에서 세상을 버리실 운명이 아니시옵니다. 전하의 피는 저 멀고 거대한 땅, 하늘로부터 이어져 온 거대한 땅의 핏줄에 이어져 있나이다. 보이지 않는 그 핏줄이 전하의 발 아래 닿아 있나이다. 허나 전하의 숨줄과 맞바꾸어 댄 제 숨줄은 이 곳에서 끊어지게 되어 있나이다. 누구를 탓하거나 울지 마시옵소서. 죽은 여인은 전하로 인해 음양의 이치와 인간의 정(情)이 뜻하는 바를 알고 죽었나이다. 전하가 이 곳에서 하셔야 할 일이 끝났나이다. 이제 제가 이승을 떠나면 이루어져야 할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나이다........
기요, 그를 알게 된 이후로 나는 그를 증오하는 마음을 한시도 버린 적이 없었다. 그가 널 죽게 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가 신라로부터 가져온 것들, 신라인의 옷, 신라인의 냄새, 신라인의 이름, 신라인의 말, 모든 것이 내게 회한과 죄책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라는 인간이, 박 제상이라는 내 나라 사람이 내게 불러일으킨 감정보다 더 깊고 짙은 회한은 없었다. 나는 그가 어떤 인간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간교한 인간이었지만, 나라는 존재만 아니면 그는 얼마든지 고결하고 훌륭한 인간이었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단 말이야. 그는 나로 인해 흉한 존재가 되었어. 어쨌든, 내게 고개를 끄덕이며 신라로 돌아가라고 말했던 그 순간만큼은, 그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 그는 한숨을 쉬며 내게 말했다. 돌아서서 면경을 보시옵소서. 그 계집이 죽으면서, 전하로부터 빼앗아간 세월을 되돌려 드렸나이다.
사실이었어. 태어나 단 한 번도 면도를 하지 않았던 내 매끄럽고 고운 턱이 어느 새 길고 짙은 수염으로 덮여 있었다. 굳이 면경을 보지 않아도 어제까지는 없었던 깊은 주름이 내 이마와 뺨에 아로새겨지는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단 말이다. 너는 내게서 빼앗아간 세월의 곱절을 내게 돌려준 거야. 그러나 그는 단 며칠만에 갑작스럽게 변해 버린 내 모습에 어떤 놀라움도 표하지 않았다. 기요, 이제 와서 느끼는 것이지만, 그의 가슴 속에는 헤아릴 수 없이 깊고 넓은 바다가 있었나 보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희노애락을 그 깊은 물 속으로 조용히 집어삼킬 수 있었던가 보다. 그래서 나로 인해 네 몸에서 이글거리게 된 피와 생명의 불꽃을 자신의 물로 조용히 꺼 버렸던 모양이야. 태양 대신 안개가 눈 앞을 밝히던 새벽녘에 이르러 그는 조용히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전하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단시간에 이토록 몰라보게 나이를 잡수시어 용모가 바뀌셨으니, 어느 누가 전하를 본들 전하가 신라의 아름다운 왕족이라고 생각하겠나이까. 이 길로 배를 타고 신라로 가시옵소서. 저는 이 곳에서 다음 생으로 갈 배를 기다릴 일만 남았나이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그 역시 왜왕의 영에 의해 기요 네가 죽은 그 곳에서 불에 타 죽었다고 한다. 그는 귀신이 들린 사람처럼 널을 뛰며 춤을 추었다지. 나로서는 놀랍지 않았다. 너의 혼이 그에게 들려 있었다 하니, 어련하겠느냐.
나는 추하게 늙은 모습으로 신라에 돌아왔다. 가신들은 자신들보다 더 늙은 모양새로 나타난 나를 보고 대경실색하였으나 나는 개의치 않았다. 밤새껏 배를 저어 나를 신라로 데려 온 그 젊은이가 아니었다면 어느 누가 나를 알아보았을 것인지! 단지 먼 북쪽으로 끌려갔던 내 형만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내 아우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노라고 대답했을 뿐이다.
그 후로도 나는 보통 사람의 갑절의 빠르기로 늙어갔고, 그런 와중에도 나라의 은인에게 보답하라는 왕의 영에 따라 이 곳에 남아 있던 그의 둘째 딸과 결혼했다. 비록 추한 곰보이긴 하지만 나는 그녀를 그녀의 아비만큼 미워하지 않아. 다만, 때때로 그녀의 하잘것없는 손짓이나 표정이 묘하게도 너를 생각나게 할 때가 있다. 너와 전혀 다른 용모를 가진 그녀가 말이야. 그럴 때면 나는 오늘처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수리재로 뛰어와야 한단 말이다.....
달빛이 차갑게 얼어붙은 모래 위에 누워 너를 부르면, 어느 순간에 내 앞으로 깊고 검은 만루의 샘물이 다시 솟아나오고, 그 안에서 너의 긴 머리카락이 천천히 솟아나오고 뒤이어 너의 창백한 얼굴이 솟아오르는 것을 나는 보게 되느니라. 불에 타 죽은 네가 어째서 물 위로 떠오르는지, 혹 너를 따라 죽은 그가 널 죽인 그 자신의 깊은 바다로 다시 너를 되살려 꺼내놓았는지? 내 질문에 대답할 이들은 이미 저승으로 떠난 지 오래이고 단지 저 고운 초생달만이 내 몸을 차게 비출 뿐이다. 오래 전 내 몸으로 흘러든 만루의 샘물이 내 속에서 요동치는 것도 다 저 초생달이 요사를 부리는 탓이다. 어느 먼 옛날 저 초생달을 외치며 부르짖은 네 목소리와 만루의 샘물을 머금은 네 입술이 아니었다면, 오늘 나는 내 나라의 땅에서 편안히 내 아내의 팔을 베고 누워 있었을 것이다. 애욕의 사슬에 대해서도, 전생의 업에 대해서도, 무감각한 추억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며, 나로 인해 죄 없이 죽어간 이들의 원통함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래 전 헤어진 전설을 속삭이는 한 모금의 물이 인간의 마음보다 강한 것이었더냐? 이게 바로 홀로 살아남은 이의 삶이란 말이다. 이와 같이 남의 목숨을 갉아먹으며 산 인간에게는 그 이상의 고통이 따르는 법임을 내게 가르쳐 준 이는 없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수리재에 올라 흙바닥을 안고 구르며 너를 부르며 울어야 한단 말이다. 살아나라! 바로 지금이 네가 살아나야 하는 순간이다!
(200×108)
작가 주-
1)지금의 포항
2)박제상의 부인을 모신 곳
3)복호. 미사흔의 둘째 형,
4)사루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