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 말보로 리스트 8

# 8 악(惡)이라는 이름의 여자

by Kalsavina

# 8 악(惡)이라는 이름의 여자



“어서 들어온. 늦었구나, 아가.”

나는 말 그대로 ‘아기’를 생각했었지. 기저귀를 찬 아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제 갓 아장아장 걸음마를 하는 아기 말이오. 그러나 들어온 아기는 전혀 내 예상을 빗나가고 말았소. 나보다 서너 살 어려 보이는 아름다운 아가씨가 미니스커트 아래로 주욱 뻗은 긴 다리를 내어 보이며 사뿐사뿐 걸어들어온 거요. 무척 섹시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지적으로 보이는 아가씨였소.

“죄송해요. 새로운 신원파악 조사단이 막 들어와서, 잠깐 면담을 하고 오느라고 늦었어요.”

“그랬구나. 인사하렴. 이쪽은.....”

그때 황급히 생각났으므로 나는 내 이름을 댔소. 그러자 아기는 생글생글 웃으며 황공에게 말했소.

“이 분이 우리 일을 도와주실 총책임자이신가요?”

총책임자라니? 그 명칭의 무게에 짓눌리는 나의 혼란에 아랑곳없이 황공이 대답했소.

“그렇단다. 아가. 인사드리렴. 이 아이는 내 양녀, 아기일세.”

“안녕하세요. 아기예요.”

나는 그녀와 악수했지만 처음 느낌과는 달리 그녀에게 약간의 두려움을 느꼈소.

“실례지만 이름이 아기인가요?”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여유롭게 웃었소.

“제 이름은 한자로 악(惡)이에요. 그걸 부르다 보니 베이비를 뜻하는 아기, 혹은 아가로 불리는 거죠. 이해하시겠어요?”

“네? 아, 네.”

참으로 해괴한 일들의 연속이었소. 도대체 어떤 애비가 딸에게 ‘악’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건지. 그러고 보면 황공이 그녀를 불렀을 때 그는 ‘아기’가 아닌 ‘악이’를 부른 것이었으며, 그녀를 부를 때 ‘아가’가 아닌 ‘악아’라고 부른 것이었지. 이 얼마나 해괴한 이름이오?

그러나 정작 그 이름의 주인은 악은 이미 자신의 이름을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소. 그녀의 손은 희고 고왔지. 그녀는 내게 언제부터 일을 시작할 거냐고 물었고 나는 괜찮다면 오늘 당장이라도 시작할 수 있다고 말했소. 그녀와 나를 바라보던 황공은 무척 흐뭇한 표정을 지었소.

그래서 나는 악과 함께 이 세상의 가난한 이들에게 담배를 나눠주겠다는 황공의 아름다운 프로젝트에 적극 가담하게 되었소. 황공은 내게 넉넉한 보수를 지급했지만, 나는 그 돈을 쓰지 않기로 마음먹고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고 달이 바뀔 때마다 내 통장에는 엄청난 액수의 돈이 쌓여 갔소. 참으로 이상하게도, 어느 순간에 돈 그 자체에 대한 욕심이 사라져 버린 나 자신을 발견하고 나는 놀라지 않았을 수 없었소. 그 순간에도 나는 악과 더불어 말보로 리스트를 작성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나는 나 자신이 금고에 든 돈이 아닌 말보로 리스트를 작성하는 일에 더 애착을 느끼고 있었음을 깨달았소. 그것은 자기가 진실로 원하는 직장에서 야심과 비전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는 직장인의 정신과 유사한 그런 애착이었소. 어쩌면 말보로 리스트는 말보로 그 자체보다 더 중독성이 강했을지도 몰라요. 담배보다 더 독한 것은 담배를 원하는 사람의 끈질긴 의지일지도 모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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