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 말보로 리스트 15

#15 탈출 감행

by Kalsavina

# 15 탈출 감행



2차 말보로 리스트 프로젝트가 재개되었을 때 악은 완전히 회복된 상태였소. 반대로 나는 더 이상 그 작업에 몰두하지 못하는 자신을 점점 강하게 느끼기 시작했소. 생각해 보니 내가 황공에게 이끌려 황공의 아지트를 찾아온 날로부터 어언 1년 8개월이라는 세월이 흘러 있었소. 그 동안 담배가격은 예정대로 종전의 담배가격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상승했지만, 흡연인구는 줄어들지 않았소. 그렇다고 늘어나지도 않았지만 말이오. 다만 금연을 결심하는 사람이 하나 둘 늘어났을 뿐이오. 때문에 말보로 리스트를 작성하는 작업도 어려웠지만 길에서 담배를 나누어주거나 말보로 리스트에 오른 대상을 직접 찾아가 담배를 공급하는 작업도 어려워지고 말았소. 마침내 어느 날, 뉴스에서 건강보험지원예산이 대폭 삭감되었다는 보도가 나왔을 때 황공은 코웃음을 쳤소.

“담배값 인상으로 거두어들인 세금을 건강보험 국고지원 예산에 쓰겠다던 그 당당한 선언문의 행방을 알고 싶군.”

“그러면 그 돈은 어디로 간 걸까요?”

나를 상대로 체스를 두던 황공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소. 그는 바둑을 더 좋아했지만 상대인 내가 바둑을 두지 못하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체스를 두던 참이었소.

“내가 그걸 어떻게 아나?”

“어디 짐작가는 데라도 없으십니까?”

“돈의 행방은 추측을 허용하지 않는다네.”

더 이상 훌륭할 수 없는 답변이었소.

그날 저녁 악이 내 방으로 찾아왔소. 나는 잠시 그녀와의 정사를 재개할 생각에 가슴이 설레었지만 그녀는 여느 때처럼 내 침대로 기어 들어오는 대신 머뭇거리며 의자에 걸터앉는 것이었소.

“표정을 보니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악은 고개를 내저었소. 잠시 후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지.

“차라리 간곡하게 할 말이 있었다면 좋으련만.......”

그녀의 웃음은 너무나도 써서 웃는 표정이라기보다는 씁쓸하게 일그러진 표정에 더 가까워 보였소.

“오늘 뉴스, 보지 않았죠?”

“아, 못 봤어요. 그건 왜요?”

“못 봤으면 됐어요.”

그녀는 일어서서 방을 나갔소. 나는 그녀의 느닷없고 무의미하며 허무하게 끝난 방문에 잠깐 현기증이 날 정도로 어이가 없었지만 별달리 복잡하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소. 오랜 시간이 지난 이제 와서 생각하면 그녀는 특유의 예민한 직감으로 급박하게 다가온 나와의 이별을 읽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그게 아니면 그녀가 언급한 문제의 뉴스 때문에 내가 받을 충격을 미리 짐작했었는지도 모르지.

바로 그 다음날 나는 악이 말한 그 뉴스를 보았소.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주요면밀하게 살펴보았지. 그리고 경악과 혼란에 빠졌소. 그 뉴스의 내용에 관해 더 이상 긴 얘기는 하지 않으리다. 아마 내가 황공과 나눈 대화를 듣는다면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을 거요. 나는 그 보도가 끝나고 다음 보도가 시작된 바로 그 순간에 황공의 방을 향해 뛰어갔소.

“무슨 일인가?”

황공은 그리 불쾌해하는 기색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놀란 듯했소.

“뉴스 보셨습니까? M. L(M. L 마크가 찍힌 모든 담배를 가리킨다)에 관한 뉴스 말입니다.”

“보았네. 왜 그러는가?”

“중지하셔야 합니다.”

“뭘?”

“말보로 리스트 프로젝트요! 보셨으면 아실 거 아닙니까? 그 담배가 앵벌이들의 손에서 판매되고 있다는 것 말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돌아가야 할 담배가 아니었습니까? 언제부터 그게 앵벌이들의 강매 물품으로 사용되었단 말입니까?”

당신이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르니까, 애시당초 했던 맹세를 깨고 그 보도의 내용을 대충 말해주지. 말 그대로 지하철역에서 구걸을 하는 앵벌이들이 M. L, 즉 우리들의 담배를 팔고 있었다는 내용이었소. 그들이 그 담배를 어디에서 공수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뻔했소. 아마도 말보로 리스트에 오른 사람들 중 돈이 궁한 극빈자들이 무상으로 제공받은 M. L을 팔면서부터 시작되었을 거요. 그러나 내가 이러한 일련의 사실을 낱낱이 다 설명한 후에도 황공은 태평한 표정이었소.

“자네가 왜 화가 났는지는 알겠네. 하지만 난 그애들한테 그 담배를 나눠준 적이 없어.”

“그애들에게 담배를 나누어 주고 말고가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담배가 악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문제 아닙니까? ”

“그게 바로 어쩔 수 없는 필요악이라는 거야.”

“아이들이 담배를 팔아도 괜찮다는 말입니까? 그렇게 해서 번 돈을 어른들에게 빼앗겨도 괜찮다는 겁니까?”

황공은 내가 그의 부하로 일하게 된 이래 처음으로 내게 역정을 냈소.

“그 애들이 굶어 죽는 것보다는 백 번 천 번 낫지 않나? 담배를 팔든 껌을 팔든, 심지어는 마약을 팔든, 그 애들은 살아야 하는 아이들 아닌가? 다른 일을 할 힘도 없는 아이들이 그깟 담배 좀 판다고 해서 세상이 뒤집어진단 말인가?”

“그애들뿐만이 아닙니다! 말보로 리스트에 오른 사람들 가운데서도 그런 식으로 M. L을 비싸게 팔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지 누가 안단 말입니까? 뉴스에서 보자니 M. L은 그 불분명한 유통경로와 무상 공급 담배라는 특징 때문에 인기가 높아서 다른 담배들보다 비싸게 팔린다죠? 이런 식으로 가다가 언제 무슨 문제가 불거질지 어떻게 안단 말입니까?”

“그래서 내가 나의 위대한 임무를 여기에서 중단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그런 뜻이 아니라........”

“그렇게 돈이 궁하다면, 비싸게 팔아 돈 좀 챙기라지. 이봐. 다른 사람도 아닌 자네가 그런 식으로 말할 줄은 정말 몰랐군. 자네가 어떻게 해서 나를 따라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잊었단 말인가?”

그의 질문은 나의 분노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소. 그러나 나의 침묵 탓인지 그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소. 아니오, 알았을 거요. 알면서도 그 역시 나의 분노를 외면해야 했는지도 모르지. 그는 마침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한 갑의 M. L을 보며 입을 열었소.

“길에서 담배를 파는 어린아이들도, 공짜로 받은 담배를 길에 들고 나가서 비싸게 받고 파는 사람들도 모두 먹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지. 생사를 가르는 배고픔 앞에서 선과 악의 대결은 무의미하다네. 자네는, 내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나?”

“일단은 M. L의 공급을 중단하셔야 합니다. M. L이 악용되는 걸 원하신 건 아니지 않습니까?”

“세상에 완벽한 제도라는 건 없네. 어느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어. 하지만 난 예정대로 말보로 리스트를 계속해서 작성할 거네. ”

“그리고 계속해서 담배로 세상을 구원하실 테구요?”

황공은 빈정거리는 내 말투에서 내 마음을 읽은 것이 분명했소. 그는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가 양 팔을 넓게 벌려 책상의 모서리를 짚었소. 황공의 양 팔과 머리가 기묘하게 균형잡힌 이등변삼각형을 이루었소. 그 모습을 본 나는, 어떤 의미에서는 내 생명의 은인인 황공을 이렇게 배신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그만 용서를 청하고 다시 내 본연의 자리인 말보로 리스트 프로젝트의 총 책임자로 되돌아갈 마음을 먹을 뻔했소. 그러나 아! 두 번씩이나 나를 구원했던 은인. 그는 나를 구했던 1년 전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나를 어떻게 구해야 할지 알고 있었던 거요.

“지금까지 자네는 나를 위해 애써 주었네. 그리고, 최근 들어 자네가 나의 말보로 리스트에 대해 회의를 품고 있다는 것을 난 이미 느끼고 있었다네.”

그 때의 그는 진실로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 나오는 쉰들러 역의 배우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소. 어둡고 예민하며 사업가적 기질이 뛰어나고 약삭빠르지만 기본적으로 정의로운, 그리고 나이먹은 남자 말이오.

“그래도, 내 눈앞에서 사라질 생각은 하지 말게. 무슨 뜻인지 알겠나? 내가 이렇게 자네를 쳐다보고 있는 한, 자네는 떠나서는 안 된다는 거야. 정 떠나려면, 내가 자네를 보고 있지 않는 그 순간에 떠나.”

황공이 내게 한 말의 첫 마디는 ‘떠나지 말라’는 강요를 함축하고 있는 듯이 들렸소. 하지만 그의 마지막 말은 ‘떠나도 좋다’는 허락처럼 들렸소. 결국 선택은 그의 대답에 대한 첫 번째 해석을 따르느냐 두 번째 해석을 따르느냐에 달렸소. 나는 두 번째 해석, ‘즉 떠나도 좋다’는 해석을 택했소. 그러나 나는 그의 면전에서 하직 인사를 하고 씩씩하게 떠나서는 안 되는 거였소. 나는 비겁하게 도망쳐야만 했던 거요. 황공이 씩씩하고 명예로운 하직을 허락하지 않고 오로지 도망만을 허락했기 때문이오.

그로부터 1주일 후, 나와 악을 태울 차가 호텔 앞에 멈춰섰소. 나는 내가 1년 8개월을 몸담아 온 황공의 아지트, 깊은 산 속의 좁은 평지에 세워진 거대한 호텔을 마지막으로 올려다보고는 두 번 다시 타지 않을 그 차에 올라탔소. 나는 여느 때처럼 불투명한 특수유리로 에워싸인 채 두통을 앓는 사람처럼 얼굴을 찡그리고 나의 회한을 감추었소.

탈출 자체는 어렵지 않았소. 그러나 그 탈출의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만은 나로서는 무리요. 그 이유를 알고 싶소? 맞았소. 제대로 맞췄소. 악이 문제였소. 악과 이별을 다시 떠올리는 것만큼 몸서리가 쳐지는 것은 없소. 나는 내가 마지막으로 본 악의 표정을 기억하지 못하오. 아니 정확하게 악과 이별한 마지막 순간이 어떠했는지도 전혀 기억할 수 없소. 나는 그저 자유를 만났다는 착각에 휩싸인 채 정신없이 내달렸고, 정신없이 내달렸고.......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내가 1년 8개월 전 서 있던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던 거요. 황공을 만났던 바로 그 자리 말이오. 바로 그 도시의 그 기차역 안에 서 있었던 거요. 바깥으로부터 들려오는 빗소리가 잠시 허공을 휘돌던 내 정신을 내 머리에 붙잡아 고정시켰소.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소? 나는 악으로부터 탈출했소. 내가 사랑했던 어여쁜 아가씨의 이름이 아닌, 진정한 의미에서 내가 1년 8개월 동안 헤어나지 못하고 허우적거렸던 악(惡)으로부터 도망친 거요. 이제 와서 나는 내가 행했던 그 많은 일들, 말보로 리스트를 작성했던 그 일련의 작업들이 진정한 악이었음을 깨닫고 있소. 그러나 후회는 없소. 왜 후회가 없느냐는 질문에 굳이 변명을 붙여야 한다면, 아마 그것은 황공이 단언했듯 ‘필요악’이었기 때문일 거요. 그리고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 나는 더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소. 어쩌면 나는 내가 떠나온 악, 그 아름다운 아가씨를 사랑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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