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추적당하는 M. L
# 14 추적당하는 M. L
악이 과로로 병원에 입원했소. 2차 말보로 리스트 프로젝트를 준비하면서 담배를 준비하고, 말보로 리스트에 오를 후보자들의 신상을 직접 입수하고 파악하는 작업을 진두지휘했던 그녀의 몸이 결국 그녀의 의지를 버텨내지 못한 거요. 악의 입원으로 말미암아 2차 말보로 리스트 프로젝트에 차질이 생겼으므로 자연히 프로젝트는 잠시 미뤄졌소.
“차라리 잘 되었어요. 요즘 들어 매스컴에 너무 자주 노출되고 있어서, 당분간 이 작업을 보류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거든요.”
그녀와 진한 섹스를 나눈 후 담배를 꺼내 물 때면 그녀는 항상 자신의 라이터를 꺼내 내담배에 불을 붙여 주곤 했소. 그래서 나는 그녀를 농담삼아 ‘라이터 전담반’이라든가 ‘라이터팔이 소녀’라든가 하는 별명으로 불렀소. 라이터 전담반은 자신을 보살피느라 병실을 떠나지 못하는 나를 향해 웃어 보였소. 그녀의 웃음치고는 그 웃음이 너무나도 쓸쓸해 보여서 나는 잠시 목이 메었소. 참으로 이상한 얘기지만, 나는 머지 않아 이 아름다운 아가씨와 이별하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소. 그렇다고 악이 죽을 거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오. 악 역시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었던지, 두 손을 가슴 위에 반듯하게 모으고는 나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소.
“당신, 영원히 내 옆에서 공짜 담배나 나눠주고 매달 나오는 월급이나 챙기며 평생을 살 생각은 아니겠죠?”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악은 말을 이었소.
“그래요. 당신은 그렇게 살면 안 돼요. 당신의 눈을 보면 알 수 있죠.”
사실이었소. 그때쯤 해서 나는 내 직업(말보로 리스트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임무를 내 직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에 대해 회의를 느끼기 시작하고 있었소. 엄밀히 말해서 직업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을지 모르지만 매달 정해진 일을 하고 월급을 받는다면 그건 분명 직업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일 아니겠소? 구체적으로 정확히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았느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소. 단지, 조금씩, 가슴 깊은 곳에서 착잡한 마음이 목구멍을 타고 차오르기 시작하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했을 뿐이오. 그것은 흡사 향수병과도 비슷한 종류의 것이었소. 귀양을 가 유배지에서 몇 개월을 산 죄인이 그 유배지에서의 생활에 점차 익숙해지고, 이제 드디어 확실하게 정착하고 적응하게 되었다고 생각한 순간 자신이 왔던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느끼게 되는 거요. 내가 바로 그런 죄인이었소. 그때쯤 해서는 나를 둘러싼 상황에 대해 염증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스스로 느끼고 있었소. 악은 나보다 훨씬 예민했던 거요. 나 자신조차 분명히 깨닫기 힘들었던 내 의사를 그녀는 먼저 깨닫고 있었으니 말이오.
“내가 어떻게 해서 이 일을 하게 되었는지 알아요?”
악은, 나와 만난 후 처음으로 자신의 과거에 대해 입을 열었소. 나로서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지. 한 여자의 순수하고 솔직한 과거지사를 듣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소. 하물며 악과 같이 보기 드문 여성의 과거를 듣는다는 것은 더욱 그랬지. 그녀는 아주 어릴 때 사창가에 버려진 계집애였소. 어쩔 수 없이 그 길로 접어들고 말았지만 그 생활에 완전히 젖어들기 전에 천운으로 황공을 만나게 된 거요. 황공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거금을 주고 사창가에서 빼낸 그녀를 자신의 양녀로 삼았소. 어리고 예쁘니 애첩을 삼았어도 별 문제 없었으련만, 어찌된 셈인지 양녀로 삼은 거요.
꼭 한 번 황공에게 물어 본 적이 있다고 악은 말했소. 왜 저를 데리고 오셔서 딸로 삼으셨나요?하고. 황공은 단지 ‘똑똑해서’였다고 대답했소. 그러나 그럴 리가? 물론 똑똑하기도 했겠지만, 황공에게는 사람을 볼 줄 아는 눈이 있었다고 믿소. 그렇지 않고서야 악을 저렇게 자신에게 헌신적인 여성으로 길러내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니 말이오. 사실 더러운 사내들의 상상이라는 게 으레 그렇지만, 나 역시 황공과 악이 겉으로는 부녀 관계를 가장하면서 밤에는 남의 눈을 피해 침대에서 몰래 구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상상을 한 적이 있소. 아주 자주 그런 상상을 했지. 그러나 악을 품에 안았을 때 나는 그녀가 그처럼 남자에 닳고 닳은 여자가 아님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소. 좌우지간 악은 자신의 과거를 간단하게 털어놓고 나서는 오랫동안 무슨 생각에서인지 눈을 감은 채 울음을 참는 것 같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소. 확실히 그녀는, 나와의 이별을 예감하고 있었을 거요. 설마하니 그 때문에 그녀가 슬퍼했으리라는 생각은 지금도 전혀 들지 않지만 말이오. 그녀는 왜 울음을 참았을까? 아니, 무엇이 그녀를 울고 싶게 만들었을까?
그때 나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소. 그녀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그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통의 여자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어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해 보면 어느 정도는 그녀를 이해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나 그녀는 이미 각오를 하고 있었소.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알고 있었고 그에 맞서려 하지 않았던 거요. 이윽고 악은 눈을 뜨고 이렇게 말했소.
“우리가 벌이고 있는 일, 아니........아버지가 벌이고 있는 사업의 규모가 너무 커졌어요. 아마 담배갑에 M. L이라는 마크가 새겨진 담배들의 유통경로를 추적하라는 정부의 지시가 떨어졌을 거예요. 아버지와 말보로 리스트는 추적당하고 있어요. 만약 발각되면, 아버지는 무사하시지 못할 거예요. 아니, 아버지는 해외로 도피하든 어쩌든 목숨을 부지하시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갈 곳을 잃고 흩어질 거예요. 물론 말보로 리스트 역시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한갓 휴지 조각에 불과한 종이가 되어 버릴 거구요.”
그래서 내가 뭐라고 대답할 수 있었겠소? 악은 가만히 고개를 내저으며 힘없이 말했소.
“나는 악입니다. 그저 악일 뿐이에요.”
이윽고 악이 퇴원했을 때, 나는 드디어 라이터팔이 소녀가 퇴원했다며 조롱조로 그녀를 놀렸고 그녀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경쾌하게 내 정강이를 걷어참으로써 나의 인사에 화답했소. 그녀는 그녀 자신이 병원에서 한 말을 모두 잊어버린 것처럼 보였소. 그러나 나는 잊지 않고 있었지. 적어도 ‘나는 악이다, 그저 악이다’라고 말한 그녀의 말이 유난히 기억에 남았소.
우리가 추적당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소.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추적당하고 있으며 어디까지 추적을 당하고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황공과 나 둘뿐이었소. 여기에서 당신에게 일러둘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소. 바로 내가 황공의 아지트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었소. 우리가, 즉 나와 악이 황공의 아지트를 떠나 거리로 나올 때와 다시 아지트로 돌아올 때는 항상 밖을 내다볼 수 없는 특수 유리창을 단 차를 타고 이동했기 때문이오. 악과 운전사는 밖을 볼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뒷좌석에 앉은 나와 앞좌석에 있는 그들 사이에는 차단막이 있었소. 앞에 앉은 악과 운전사를 볼 수는 있었지만 그들의 앞에 놓인 차의 앞유리는 내게는 거의 보이지 않았소. 항상 그런 차를 타고 이동했으니 황공의 아지트가 정확히 어느 곳에 위치해 있는지 내가 어떻게 알았겠소? 마치,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영리한 알리바바의 하녀가 집의 위치를 알지 못하게끔 장의사의 눈을 가려 집까지 데려오는 것과 같은 트릭이었소. 그러므로 나는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소. 말보로 리스트 프로젝트는 전면 중단되었소. 즉 다시 거리로 나가 극빈자들과 담배를 필요로 하는 절박한 수요자들을 찾는 작업이 중단되었다는 뜻이오.
전에 악이 말한 대로 말보로 리스트 프로젝트가 전혀 법적인 하자가 없는 행위라면, 도대체 악이나 황공이 정부나 보건 당국의 추적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는 없었을 거요. 또 황공도 악도 그들이 정부의 추적을 겁내고 있는 인상 따위는 추호도 내게 주지 않았으므로 나는 불안한 가슴을 어느 정도는 진정시킬 수 있었소.
바로 그 순간이었소. 바로 그 순간에, 오래 전부터 내 목구멍을 따라 집요하게 올라오던 그 말할 수 없는 감정의 덩어리가 드디어 폭발의 일보 직전에 다다른 거요. 나는 이곳에 완전히 젖어든 채 평생을 이곳에서 썩을 수는 없었소. 드디어 나는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소. 도대체 자신이 오고 가는 길을 모르는 이가 자신을 자유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바보스럽지 않소? 나는 돈을 받으며, 그리고 그 돈에 홀려서. 내 몸을 완전히 황공이라는 한 위대하지만 위험한 사업가에게 예속시킨 채 노예처럼 그의 사상을 현실로 실현시키는 작업을 몇 년간이나 지치지도 않고 수행해 온 거요. 그래요.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은 한 순간이었소. 그러나 그 한순간의 깨달음을 위해 몇 년이라는 시간을 로봇처럼 아무런 자각 없이 일해온 거요. 추적당하는 것은 단순히 M. L이라는 마크가 찍힌 담배들의 유통 경로가 아니었소. 그것은 다름아닌 나라는 인간의 유통 경로였던 거요.
악과 황공이 비밀리에 정부의 추적을 따돌릴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 수 있었소. 그들의 수하에 있는 많은 부하들도 마찬가지였소. 간간히 엿듣는 그들의 대화를 미루어 보건대, 황공은 우리나라를 포함해 전 세계의 모든 담배를 공수하여 보관할 수 있는 시설을 국내에 갖추고 있으며, 그 시설은 극비에 부쳐져 있어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으며 알아서도 안 되는데, 바로 이 시설을 추적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소. 그 곳은 이 곳, 즉 황공의 아지트인 이 거대한 호텔이 있는 곳과는 또다른 먼 곳에 있는 시설이었다는 사실 역시 알게 되었소. 황공과 악은 이 시설로부터 정부의 감시를 따돌리기 위해 또 다른 어떤 트릭을 쓰려는 것 같았소. 아마도 그들은 그러한 사태가 닥칠 것임을 미리 예견하기라도 했던 눈치였소. 아마도 당연하겠지. 뉴스에서 M. L이라는 금박 마크를 언급했을 때 나 역시 맨 먼저 그 생각을 했었으니까.
병원에서 퇴원한 이후 악은 내 방에 오지 않았소. 상당히 아쉬웠지만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소. 악이라는 마약을 끊어내지 않는 한, 나는 황공과 말보로 리스트에 벗어나지 못할 것임을 예감하고 있었으니 말이오. 나는 그들이 어떤 꿍꿍이속을 가지고 일을 추진하든지 신경 쓰지 않는 기색으로 일관했소. 사실 신경쓰고 싶지도 않았소. 나는 호기심이 많은 부류의 인간도 아니었고. 그 머리좋은 악과 황공이 애써 감추려 드는 사실을 캐내야 할 필요를 느낄 만큼 나를 둘러싼 상황이나 내 작업에 대한 애착을 느끼지 않았소. 어느 날, 황공의 부름을 받고 그의 살롱으로 간 나는 악이 황공에게 조용히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소.
“성공한 것 같아요. 아버지. 더 이상 주요 시설을 추적당할 염려는 없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