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 말보로 리스트 16

#16 담배비 쏟아지다

by Kalsavina

# 16 담배비 쏟아지다



그로부터 몇 년 동안, 미친 사람처럼 닥치는 대로 아무 일이나 하며 세상을 떠돌아다녔소. 내가 여자가 아닌 남자라는 사실에 진심으로 하늘에 감사하며 살았던 기간이었지. 여자들이 눈 뜨고 못 볼 꼴을 당하는 걸 너무나도 많이 본 기간이었으니 말이오. 나는 단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모면할 수 있었던 숱한 능욕들을 여전히 기억하오. 또한 그렇게 정처없이 떠돌던 내 앞에 평쳐졌던 그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들을 눈물겹도록 선명하게 기억하오.

이제 내 이야기는 거의 끝나가고 있소. 그러나 나는 당신에게, 당신도 익히 아는 그 사건에 대해 반드시 당신에게 이야기할 필요를 느끼오. 당신은 아마 오래 전에 세간의 화제가 되었던 그 담배들, ‘M. L'이라는 금박 마크가 붙었던 담배들을 기억할 거요. 어쩌면 당신 자신이 하나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지. 그 담배들의 공급이 중단된 후로 그 금박 마크가 붙은 담배갑이 고가에 거래되었다는 사실을 들은 바 있소. 정작 그 담배들을 세상에 퍼뜨린 장본인인 내 손에는 그 담배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데 말이오.

그 후로 가끔, 황공과 악의 행방이 궁금할 때가 있었다오. 그러나 궁금하다 하여 그들의 행방을 다시금 찾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소. 만약 황공이 그럴 마음을 먹었다면, 나를 찾아낼 수는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내가 먼저 그를 찾아낼 수는 없었던 거요. 때때로 나는 그 옛날 비내리는 기차역에서 나를 구했던 황공의 모습을 바로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올릴 때가 있소. 그 기억이 그처럼 선명하게 내 어깨를 짚고 달아나면 나는 울음을 터뜨리고 싶은 기분이 되어 버려요. 왜냐하면 그럴 때면 여지없이 그들이 그리워지기 때문이오.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야.

그런데 얼마 전, 그들이 아직도 살아 있으며, 여전히 말보로 리스트를 작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대사건이 일어났던 거요! 그렇소! 바로 맞췄소! 전국의 주요 도시에 동시다발적으로 뿌려졌던 그 담배비 사건 말이오! 다행스럽게도 그 당시 D시를 걷고 있던 나는 그 담배비를 온 몸 가득히 맞는 행운을 누렸소. 정부에서는 아직도 그 담배비를 살포한 헬리콥터들의 행방을 찾지 못하고 있다고 들었소. 아마 못 찾을 거요. 황공이 얼마나 주도면밀한 사람이며 그의 수양딸인 악이 얼마나 뛰어난 두뇌를 가진 그의 충실한 보좌관인지 그들은 모르오. 그러나 당신은 그 담배비를 기억하겠지? 손에서 떨어져 나온 하얀 손가락 같은 가지각색의 담배들이 수천 개피, 수만 개피, 아니 수억 개피씩 세상을 향해 떨어져내리던 그 진풍경을 말이오. 그것은 길고 가늘고 하얀 눈이나 다름없지 않았소? 그렇소. 그것은 담배비일 뿐 아니라 담배눈이기도 했지. 눈조차 뜨지 못할 정도로 온 세상을 하얗게 만든 그 담배 비가 쏟아져 내리던 날, 나는 하늘을 향해 목청껏 외쳤소. 나는 여기에 있으며, 당신을 그리워하고 있노라고. 그러나 헬리콥터에 타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악은 한번쯤 내게 손을 흔들어 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소. 뭐? 너무 멀어서 보지 못했던 것이 아니냐고?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러나 아무리 몇백 미터 상공이라 해도 악이 나에게 손짓을 했다면 내가 그걸 보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

하하, 당신, 내 이야기를 제법 주의깊게 듣고 있었구려. 그래요. 그 말이 옳소. 악은 다른 방법으로 내게 손을 흔들어 보였소. 어쩌면, 어쩌면 악 역시 나를 사랑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소. 나는 황공을 떠나온 이래 처음으로 웃어 보였소.

당신도 알다시피 그날 전국의 TV와 신문을 비롯한 주요 매스컴들은 그야말로 담배비 사건 때문에 발칵 뒤집어졌소. 심지어는 외신들조차 이 사건을 상세히 보도했고 개중에는 ‘천정부지로 뛰어오른 담배가에 대한 화려한 반란’이라고 제법 정확하게 황공의 의중을 짚어 낸 매체도 있었지. 그러나 그건 그저 피상적인 대답일 뿐이지. 10년만에 처음으로 담배값이 폭락할 것이라는 주장 역시 제법 그럴듯한 설득력을 가지고 심심챦게 떠돌았소. 그러나 오래 전에 인구에 회자되었던 그 M. L이 이번의 담배비와 연관이 있으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더군.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나간 일을 너무 쉽게 잊어버리는 거지. 그러나 간혹 예외도 있긴 했소. 바로 말보로 리스트에 올랐던 사람들, 황공에 의해 담배뿐 아니라 인생의 쓴맛을 음미하는 행복을 지킬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소. 나는 지금도 가끔 길을 걷다가 말보로 리스트에 올라야 할 대상과 마주칠 때가 있소. 한없이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담배를 입에 문 사람들이지. 그들의 표정은 보통 사람들과 달라요. 그들은 과거 자신들이 영영 잃어버릴 뻔했던 담배를 그들의 손에 다시 쥐어주려고 노력했던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 마찬가지로 그들의 머리 위로 쏟아졌던 담배비가 누구의 손에 의해 뿌려졌는지도 잊지 않고 있소.

그리고 나는, 꿈을 꾸었소. 꿈 속에서 나는 악을 보았소. 악은 환하게 웃으며 나를 헬리콥터에 태웠소. 악은 내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악이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를 잘 알 수 있었소.

―당신이 조금만 더 오래 나와 함께 했다면, 이 헬리콥터를 타고 말보로 리스트 프로젝트의 완결판이나 다름없는 이 작업을 끝낼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악과 더불어 헬리콥터 위에서 세상을 내려다보았소. 실로 장난감 같은 세상이었지. 악은 내 마음을 환히 꿰뚫고 있다는 듯 생글생글 웃었소. 자, 봐요. 하늘에 비하면 이처럼 보잘것없는 세상에서, 몇 푼의 돈에 얽매여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을 봐요. 그들에게 담배비를 뿌리며 외쳐 봐요. 잘 살아 보라고. 담배 없이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서, 그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아 보라고.

무한 개의 길고 하얀 담배들이 끝없이 아래로 떨어져내렸소. 담배들은 하늘을 가로지르는 구름 속에서 저절로 생겨난 구름의 자식들 같았소. 나는 하늘로 올라온 담배 연기가 한데 모여 구름을 만들었고, 그 구름은 자신들이 땅에서 가지고 올라온 인간의 폐 속의 노폐물들을 고이 간직하고 있으리라 여겼소. 그 노폐물이 무엇이겠소? 바로 당신의 폐 속에 들어있던 가래침, 슬픔과 고통의 응어리들이 아니오? 당신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담배 연기가 하늘로 가지 않으면 도대체 어디로 가겠소? 결국, 그 응어리들은 구름 속에서 다시 담배로 환원되어 전생에 자기가 왔던 땅으로 돌아가는 거요. 그것이 바로 내가 헬리콥터에서 내려다본 세상 위로 쏟아지는 담배였던 거요. 나는 끝없이 펼쳐진 세상을 하염없이 쳐다보았소. 참으로 아름다운 세상이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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