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
# 3
길모퉁이를 접어들었을 때 강윤의 눈에 처음 띈 것은 커다랗게 부풀어오른 비닐 봉지였다. 이런 곳에 웬 비닐 봉지가 있는가 하고 그는 의아해했지만, 그것은 잠깐의 착시였을 뿐 그것은 곧 비닐 종지 이상으로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것은 비닐처럼 윤이 반질반질 나는 검은 옷을 뒤집어쓴 사람이었다.
부랑자이거나 노숙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딱히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강윤은 자신과 남자 사이의 대략적인 발걸음 수를 눈으로 재어 보았다. 약 스무 발짝. 그런 후 강윤은 자신이 서 있는 곳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곳은 8차선 도로에서 4차선 도로로 꺾어들어 단독주택 지대로 갓 들어가는 길목이었다. 강윤은 단독주택으로 접어드는 대신 다른 길로 갈라져 버스 정류장으로 이어지는 지름길을 따라갈 작정으로 이 골목에 들어온 것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부랑자가 하룻밤을 해결하기에는 너무나도 부적당한 골목이었다. 어쩌면 갑자기 강도나 그 비슷한 재난을 당했거나 몸이 아파서 쓰러진 사람인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자 그가 쓰러진 사람에게로 다가가 그를 일으키기까지는 단 2분의 망설임도 필요하지 않았다.
쓰러진 사람은 담벼락에 몸을 바싹 붙인 채 벽 쪽으로 등을 돌리고 누워 있었다. 강윤이 그에게 다가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돌아누운 그를 땅에 등이 닿도록 반듯이 눕혀 그의 얼굴을 확인한 일이었다. 그는 거무스름한 얼굴에 게슴츠레한 눈과 무엇으로 얻어맞은 듯 뭉개진 모양의 코를 한 남자였다. 누가 보아도 영락없는 노숙자의 모습이었지만, 강윤은 직감적으로 그가 단순한 노숙자가 아님을 알아차렸다. 그는 자신의 몸을 다루는 강윤의 태도에 일말의 저항이나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가늘게 뜬 눈을 조금 더 크게 뜨고 강윤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강윤은 그를 병원으로 데려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그를 병원에 데려가야 할 것 같았다. 그런 강윤의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그는 까칠한 수염으로 덮인 입을 열었다. 그가 입을 열자 구린내가 확 끼쳐왔다.
“나를 이대로 내버려 두게. 자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남자의 음성은 굵고 낮았으며, 듬직한 맛이 있었다. 목소리만 들어서는 한창 중년의 나이를 걷고 있는 사람이리라 짐작되었다. 그러나 막상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니 기껏해야 30대 초반 정도의 나이로 짐작될 만큼 젊은 남자임을 알 수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그의 얼굴을 꽤 밝게 비추었기 때문에 날이 어두워졌다는 것은 그의 얼굴을 살피는 데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달이 떴군.”
강윤은 하마터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볼 뻔했다. 아직 달이 뜨기에는 이른 시각이었다. 강윤은 남자를 다시금 쳐다보았다. 가늘게 뜬 눈이 장난기를 가득 담고 강윤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 조롱섞인 듯 묘한 눈빛이 강윤에게 상상할 수 없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그는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강윤은 언젠가 영화에서 이런 눈빛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사람의 눈은 영화 속 등장인물의 눈과는 틀리다. 그의 눈은 영화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확실하게 자신의 죽음을 말하고 있다.
그는 문득 놀란 듯 입을 약간 벌리며 강윤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갑작스러운 생기가 돌았다.
“그래.......이제야 찾았군. 하필이면 내 생의 마지막 순간을 넘기는 순간에 찾아낸 거야. 표적은 없지만 난 알 수 있어. ”
“.....무슨 뜻입니까?”
“안심하고 주사위를 맡길 사람을 찾았다는 뜻이야. 그래, 이렇게 죽어가는 나를 그냥 지나쳐가지 않고 내게로 왔다는 사실보다 더 확실한 표적이 어디 있겠어. 자네에게라면 안심하고 여왕을 맡길 수 있겠어. 난 절박해. 난 지금 죽어가고 있다고. 하필이면 이런 순간에 자네를 만나다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병원으로 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강윤이 그를 억지로 부축해 일으키려 하자 사내는 강하게 반발했다.
“아니야. 내 명이 다한 거야. 부탁이니 병원에 데려가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마. 난 아파서 죽어가고 있는 게 아니야. 그보다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내 청바지 왼쪽 호주머니를 뒤져 보게나.”
강윤은 시키는 대로 사내가 입고 있는 청바지 왼쪽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뭔가 딱딱한 사각형의 물체가 손에 잡혔다. 강윤은 그것을 꺼내 손바닥에 들고 들여다보았다.
“주사위야.”
사내의 설명 없이도 강윤은 그것이 주사위임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언뜻 보기에도 부루마블 게임 따위를 할 때 흔히 쓰는 장난감 주사위로는 보이지 않았다.
“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야. 자네가 맡아 주게. 그리고 지체없이 여길 떠나. 자넨 내가 죽는 걸 보아서는 안 돼.”
사내의 말에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있다고 느낀 강윤은 주사위를 자신의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설령 사내를 거역한다 한들 길에서 죽어가는 불쌍한 사람의 유품 하나를 이 손으로 따뜻하게 잡아주지 않는다면 그건 미안한 노릇이었다. 그러나 강윤은 지금 여기에서 죽으려고 하는 이 정체불명의 사내의 의지를 완전히 확신하지 못했다.
“얼른 이 자리를 떠나. 떠나기 전에 한 가지만 더 말해 두겠네. 자네는 지금 자네가 처한 상황이나 내가 자네에게 한 부탁 때문에 난감해할지도 모르겠네. 그리고 어쩌면 내가 맡긴 그 주사위 때문에 앞으로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난감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 주게. 그 주사위는, 아무에게나 가치가 있는 물건이 아니야. 내가 자네에게 그 주사위를 맡긴 것은, 자네가 그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어서 가게. 자네의 행운을 빌겠네.”
그래도 강윤이 얼른 떠날 생각을 하지 않자 그는 호통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가라니까 !”
강윤은 그제서야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몇백 미터를 걸어가도록 강윤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다만 속으로는, 자신이 겪은 일련의 사건들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의혹이나 당황스러운 마음을 갖지 않는 자신에 대해 매우 놀라고 있었다. 한편 뒤를 돌아볼 엄두가 도통 나지 않아서 그저 고개를 숙이고 걷기만 했다. 그는 버스 정류장으로 통하는 골목을 놓치는 바람에 엉뚱한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몇 걸음을 걷던 그는 문득, ‘이게 아닌데’라고 중얼거렸다. 그 다음 그는 돌아서서 사내가 누워 있던 곳으로 있는 힘을 다해 뛰어갔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약이라도 먹은 사람처럼 다리의 힘이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멈춰서서 후들거리는 다리를 가누며 숨을 몰아쉬었다. 아직도 심장병의 그림자는 그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고 있음을 그는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때에 종종 느끼곤 했다.
그는 갑자기 달을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달은 구름에 반쯤 가려진 채 떠 있었다. 마치 웃고 있는 입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