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스Ⅰ-6

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

by Kalsavina

# 6



쌍둥이의 부모님이 되시는 강태규 박사 부부가 작년 말 일본으로 떠났을 때 쌍둥이들 중 어느 누구도 따라가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부모의 법적인 보호를 받을 나이를 훨씬 넘어섰으므로 제각기 따로 비자 신청을 해야 했는데, 둘 다 비자 발급을 받지 못했다. 정확하게는 못 받은 것이 아니라 안 받은 것이다. 원인은 부모를 따라갈 생각이 전혀 없었던 두 쌍둥이의 강력한 의지였다. 이로 인해 하마터면 집안에서 큰 싸움이 일어날 뻔했는데, 그 핵심이 된 것은 생부를 여읜 지 얼마 되지 않은 민효의 거취 문제였다. 강인은 노골적으로 무조건 한국에 남아 있겠다고 했고, 강윤은 굳이 부모에게 맞서려 들지 않았지만 그 역시 강인과 마찬가지로 남아 있으려 할 것이 뻔했다. 강태규 박사 부부는 이미 자신들이 남겨두고 가는 집에 그녀가 계속 살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두겠다고 했지만 어느 누구도 그 말에 합의하지 못했다. 민효는 이렇게 큰 집에서 혼자 사느니 차라리 원룸이라도 얻어 따로 나가 살겠다고 했고, 강인은 그 말을 들은 순간 민효의 뺨을 내리쳤다. 얼마나 세게 내리쳤는지 몸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강 박사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너희들, 혹 같이 잔 거냐?”

강인은 주저없이 ‘예’라고 대답했다. 이번에는 쌍둥이들의 어머니가 기절초풍할 차례였다. 그러나 민효는 자신이 그간 친엄마나 다름없이 따랐던 쌍둥이들의 어머니로부터 원망어린 시선을 받기 전에 그 자리를 떴다. 일 주일 후 강 태규 박사 부부는 단 둘이, 그러나 매우 외롭게 아들들의 배웅을 받으며 출국했다. 공항에서 돌아오는 길에 택시 안에서 민효는 강인에게 물었다.

“넌 따라갔어야 했어. 윤이 너도 그렇고.”

강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강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너 때문에 안 간 거 아냐. 언젠가는 가게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야. 아직은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어. 단지 그 뿐이야.”

옆에 있던 강윤은 그 말을 듣고 그게 어디까지 진심인지 의심스러워했다. 그러나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또한 여전히 집에 들어오지 않고 자신만의 공간에서 자신만의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 의도는 명백했는데, 이제 분명히 단 둘이 되어버린 두 사람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의도였다.

그러나 단 둘이 남게 되자 그들의 관계는 오히려 악화되었다. 처음에는 두 사람 다 무엇이 자신들을 갈라놓았는지 몰랐다. 여전히 강인은 다정했고 필요할 때는 아낌없이 민효를 만족시켰다. 그러나 민효는 강인이 변했음을 알았다. 그리고 자신도 변했다. 인정하기 싫은 현실이 눈앞에 드러났다. 너무 일찍 서로에게 싫증이 나 버렸다. 민효는 ‘너 때문에 남은 게 아니었다’는 강인의 말을 다시금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지금도 아름다운 멜로디만 보면 그걸 자기 것으로 만들어 그에 합당한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내는 데 혈안이 되곤 했다. 그는 확실히 여자보다는 음악을 사랑했다. 아무래도 그는 안을 수 있는 존재보다는 안을 수 없는 존재, 구멍이 있는 존재보다는 구멍이 없는 존재를 더 사랑한다고 민효는 생각했다. 또한 부모님이라는 공통된 견제의 대상이 없어지자 잠자리에서 일부러 신음소리를 죽일 필요도 없어졌다. 그러나 막상 거리낌없이 서로를 안게 되자 그리 큰 신음소리가 나오지도 않을 뿐더러 매우 조용하고 싱겁게 끝난다는 사실을 깨닫고 두 사람 모두 당황했다. 민효는 대부분의 연인들이 어떤 이유로 헤어지게 되는지 그 이유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강인이 그녀를 안으려고 하자 그녀는 피임약을 가져오겠다며 그의 팔을 뿌리치고 밖으로 나간 후 자신의 방으로 가 문을 잠가 버렸다.

그 후 한동안 두 사람 모두 서로의 몸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럼으로서 그들은 서로를 보다 냉정하게 관찰할 기회를 얻었을 뿐더러 각자 스스로를 되돌아볼 여유도 얻었다. 그러나 시간이 다소 오래 걸렸다. 그러나 그 오랜 시간 동안 민효는 자신이 잊고 있었던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에게는 강인을 마음대로 조종할 힘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굴욕스러웠지만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서 강인이 장유경과 맺은 협상에 대해 고백했을 때 그녀는 마음대로 하라는 말 한 마디만 했을 뿐이었다. 어쩌면, 하고 민효의 의식이 팔을 타고 내려갔다. 어쩌면 나는 강인의 기억을 읽을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러면 나는 보복의 기회를 얻는 거야. 이 주사위를 강윤에게서 빌릴 수 있었던 건 행운이야.

민효는 수저를 놓고 강인의 까칠한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최근 몇 주 동안 두 사람이 같이 저녁을 먹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때문에 둘 다 이따금 고개를 들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시선을 얼른 떨구는 것도 나름대로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빚어내는 행동이었다. 민효는 자신이 강인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저지른 한 가지 거짓말과 몇 가지 작위적인 행동들에 대해 생각했다. 또한 강윤을 설득해서 자신의 수중에 넣은 그 주사위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어떻게 그런 주사위가 강윤의 손에 들어온 걸까? 아니 그건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 건 이걸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거다. 내가 이걸로 강인의 기억을 읽을 수 있을까, 아니면 강인이 내 기억을 읽을 수 있을까.

“엄마랑 아빠는 잘 지내시는지 몰라.”

“잘 지내실 거야. 말썽꾸러기 아들들도 없으니까.”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어제 일본에서 국제전화 왔었거든. ”

“네가 받았어? 너 어제 집에 몇 시에 들어왔길래?”

“초저녁에. 넌 어제 어디 갔었는데?”

“은하한테 갔었어. 그래, 받으니까 뭐라고 하셔?”

강인은 갑자기 심각한 표정으로 민효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피식 웃었다.

“받았더니 대뜸 너랑 결혼해서 오라고 하시더라. 올해 안으로.”

강인은 밥이 반이나 남은 숟갈을 놓고 방으로 올라갔다. 생각 같아서는 이대로 침대에 누워 한숨 자고 싶었다. 그러나 석 달 전부터 질질 끌고 있는 빚을 받아내려는 강박증이 그를 다시 일어서게 했다. 강인은 몇 푼 안 되는 비상금을 챙기고 핸드폰 밧데리를 갈아끼웠다. 목욕을 하고 나갈까도 생각했지만 어차피 행선지는 고급 욕실이 있는 아파트인 만큼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급한 발걸음으로 현관을 향하던 그는 갑자기 발을 멈추고 부엌 쪽을 바라보았다. 의자 등받이를 꽉 붙들고 말없이 선 민효의 옴쭉달싹도 하지 않는 뒷모습이 그의 발을 붙든 것이다. 단정하게 손질이 된 머리카락이 맵시 있게 곱슬거리는 뒤통수에서 묘하게도 분노와 고독이 얼핏 비쳤다.

그는 민효에게로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몰래 안았다. 물론 진심에서 우러나온 행동이었지만 얼마쯤은 계산적인 의도가 없지도 않았다.

“그 여자한테 가는 거지?”

그 말과 동시에 민효의 입에서는 한숨이 터져나왔고 강인의 팔에 감싸인 가슴은 부풀어올랐다가 천천히 내려앉았으며 그녀의 가슴 앞으로 맞잡힌 강인의 팔뚝에 그녀의 한숨이 내려앉았다. 강인은 대답 대신 그녀의 목에 입술을 비볐다.

“아직도 아기 생각해?”

“말 돌리지 마. 그 여자한테 가는 거 아니야?”

“용환이한테 가는 거야. 알잖아. 지금 마무리 작업하고 있는 거. 그 녀석 너 많이 보고 싶어하는데, 아무래도 낌새가 수상해서 나 모르게 너 만날 생각하지 말라고 단단히 못을 박았지. 그래서 그 자식이 여기에 안 오는 대신 내가 나가야 하는 거지. 알았지? ”

강인의 거짓말에 속아 줄 바보는 어디에도 없었다. 작업 때문에 만나는 것이라면, 충분한 음향 설비가 갖추어진 스튜디오가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날 이유가 없다. 민효는 잠시 후 강인의 팔을 풀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며칠만 가지고 있다가, 내가 달라고 할 때 돌려줘. 잃어버리지 마. 알았지?”

민효가 강인에게 내민 것은 다름 아닌 주사위였다. 강윤의 손을 거쳐 결국 민효에게로 넘어간 문제의 ‘기억 복사기’였다. 그것이 이제는 민효의 손을 거쳐 강인에게로 넘어갈 판이었다.

강인은 약간 아연한 기분으로 주사위를 받아들었다. 그는 적어도 ‘한 번만 꼭 안아 줘’라든지,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올 때 맛있는 거 사 사지고 와’ 등의 진부하고 애교섞인 부탁을 기대했던 것이다. 적어도 그녀의 태도는 영락없이 그런 부탁을 할 분위기였는데, 왜 당치도 않은 장난감 같은 주사위를 내밀며 소중히 간직하라고 신신당부하는 걸까? 그는 넉살 좋게 웃으며 주사위를 눈높이에 맞춰 들어올린 후 한쪽 눈을 찡그리며 자세히 살펴보는 시늉을 했다.

“뭐야 이거? 몰래카메라? 아니면 도청장치?”

“강인!”

두 사람은 한순간 서로의 얼굴을 주도면밀하게 살폈다. 민효는 강인의 얼굴에서 의심을 읽었고, 강인은 민효의 얼굴에서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을 읽었다. 이내 평정을 되찾은 얼굴로 민효는 손을 내밀었다. 주사위를 돌려달라는 뜻이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가져가지 마. ”

“아니야. 가져갈게. ”

그는 재빨리 주사위를 호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민효는 ‘잃어버리지 마, 알았지?’라고 신신당부하며 강인을 배웅했다. 핸드폰을 꺼내들며 바삐 집을 나서는 강인의 등을 치며 그녀는 마지막으로 주의를 주었다.

“정말 잃어버리면 안 돼. 그리고, 올 때 아이스크림 사 오는 거 잊지 마.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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