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
# 5
쓸데없다는 걸 알면서도 분노가 치솟았다. 눈앞에 있는 민효의 침착한 목소리는 이상하게도 어떤 하소연이나 눈물 이상으로 강윤을 분노하게 했다. 그러나 머릿속에서 수증기가 끓건 용암이 끓건 간에, 평정을 잃지 않고 있는 여자 앞에서 마구잡이로 난폭한 행동을 취한다는 것은 그 여자를 완전히 무시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강윤은 민효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연 폭언이나 난동을 휘두르고픈 충동을 억제하게 되었다. 반대로, 한편으로는 알 수 없이 애절한 마음이 명치를 타고 가슴으로 올라왔다. 그는 눈 앞에 있는 민효를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느꼈는데 이것은 성욕과는 분명히 무관한 욕망이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가엾다거나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아니었다.
깍지 낀 손가락을 신경질적으로 돌리는 강윤을 보며 민효가 말했다.
“화내지 마.”
강윤은 손을 탁자 아래로 내렸다. 그제서야 강윤에게서 풍기는 술 냄새를 맡은 민효는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취했어? 커피 타다 줄까?”
“필요없어. 술 다 깼어.”
“그러면, 내 말 좀 들어줘. 제발, 인이나 다른 사람들한테는, 아무 얘기도 안 들은 걸로 해 줘. 응?”
“그게 말이 돼?”
고함을 지를 생각이 없었음에도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민효의 안색이 순식간에 새파래졌다. 그는 나오는 대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넌 그 자식 애를 지웠는데.......그 자식은 딴 여자랑 자고.......누구든지 그 자식을 때려줘야 돼.......그런데 나보고 그냥 참으라고? 내가 참으면, 네가 때릴래?”
‘내가 참으면, 네가 때릴래?’라는 말을 듣자 민효는 입을 손으로 막고 웃었다.
“그래 내가 때릴게. 내 부탁 들어줄 수 있지? 이번만큼은, 정말 모른 척 해 줘. 응?”
본래 민효의 애원에 약했던 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야 어떻게 되든 지금 당장은 고개를 끄덕여줘야만 했다. 그러나 막상 고개를 끄덕이고 나자 어색한 분위기가 두 사람을 감쌌다. 둘 다 마땅히 할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강윤은 일어서서 버릇대로 담배를 찾으려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역시 담배 대신 손에 잡힌 것은 딱딱하게 각이 진 주사위의 감촉이었다. 그는 화를 내며 주사위를 바닥에 내던졌다.
“도대체 담배는 어디에 가고 이 따위 쓸모없는 것만 들어있는 거야?”
바닥을 또르르 구른 주사위는 민효의 발을 감싼 슬리퍼에 맞고 멈추었다. 민효는 주사위를 주워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이거 어디서 난 거야? 그냥 장난감은 아닌 거 같은데........?
순간 민효의 머릿속에서 미약한 섬광이 반짝였다. 그리고 주사위는 강윤의 기억 일부를 민효에게로 복사했다.
“그냥 길 가던 사람이 나한테 준 거야. 그냥 버려. 대단한 것도 아냐.”
“그래.......”
민효는 주사위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잠시 후 그녀는 자신없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길에서 죽고 있던 사람한테 받은 게 아니고?”
“맞아. 죽어가고 있었어.”
“이게 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라고?”
“그렇게 말하더만. 아, 바보! 뭔가 이상하다 싶더니!”
강윤은 벌떡 일어서서 민효의 팔을 잡았다.
“내가 그 얘기를 언제 너에게 했지?”
“나한테 말한 적 없어. 그냥, 이 주사위를 쥐고 있었어. 네가 길에 누워 있는 사람을 내려다보는 장면이 떠올랐어. 그리고 그 사람이 이걸 네게 줬어. 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라면서.”
강윤의 눈길이 민효의 하얀 손바닥 위에 얹힌 주사위로 옮겨갔다. 그가 기억하기로도 그는 이 주사위에 대해 한 번도 민효에게 말한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때 이후로 민효를 만난 것은 오늘이 처음이니까. 그렇다면, 그의 기억뿐 아니라 민효를 몹시 보고 싶어했던 마음도 그녀에게 전달되었을까? 그리고 내가 보여주고 싶어한 기억들도 모두 복사되어 그녀에게로 옮겨갔을까?
“또 다른 건? 또 다른 건 떠오르지 않았어?”
민효는 고개를 흔들었다. 강윤은 잠시 멍하니 민효를 쳐다보다가, 별안간 주사위를 쥔 민효의 손에서 주사위를 낚아챘다. 그러자 민효가 한 대 얻어맞은 듯한 표정으로 강윤을 쳐다보았으므로 강윤은 엉겁결에 다시 주사위를 민효에게 내주었다. 그녀는 주사위를 감싸쥐며 강윤을 힐난하듯 바라보았다.
“왜 갑자기 준 걸 도로 뺏는 거야?”
“내가 언제 그걸 너한테 줬냐?”
“어쨌든 바닥에 던진 거잖아? 내가 주웠고. 넌 이걸 버리라고 했으니까 네가 이걸 나한테 버린 거야. 그러니까 이건 내 거야. 이리 줘.”
“이껏 게 뭐가 그렇게 대수라고 그래?”
툴툴거리면서도 강윤은 주사위를 민효에게 내주었고 그녀는 신기하다는 듯 주사위를 손바닥 위에 놓고 들여다보았다. 단 이번에는 다시 주사위를 가져가려는 강윤의 기습공격에 대비해 손을 둥글게 오므렸다.
“누가 그걸 도로 뺏아간대? 난 그냥........네가 그 주사위에 대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몰라서......”
강윤은 좀 더 면밀하게 주사위를 살펴보고 싶었다. 혹 쉽게 알아보기 힘든 암호가 주사위에 새겨져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혀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 아예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는 투덜거리며 덥수룩하게 긴 앞머리에 덮인 이마를 주먹으로 두들겼다. 민효는 희색이 만면한 얼굴로 강윤을 쳐다보며 말했다.
“너 굉장한 걸 가져왔어.”
“뭐야?”
“이 주사위. 정말로 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야.”
조금 전, 귀신같이 자신이 주사위를 얻어 온 경위를 알아맞춘 민효의 기상천외한 마법은 과학적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단 하나, 정말로 인간의 뇌에 담긴 기억을 복제하는 기능을 가진 기계가 주사위의 형태로 발명되었는데, 그것이 어쩌다가 실수로 그의 손 안에 들어온 것이라면 그럴 듯한 설명이 된다. 그러나 강윤에게는 그런 식의 추리를 믿을 만한 몽상가적 자질이 부족했다. 결국 그는 그 주사위가 기억을 복사한다는 주장은 허무맹랑하다고 단정지었다.
“농담 그만해. 그 주사위가 그렇게 좋으면 가지라구. 난 필요없어.”
“정말 이거 나한테 주는 거야?”
“왜 사람 말을 못 믿어? 속고만 살았어? 하긴 인이한테는 속았지? 사랑한다고 말해놓고 그런 짓을 했으니까. 그거 너 가져. 난 안 속일 테니. ”
민효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강윤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이내 그 눈초리는 평상시의 침착하고 온화한 눈빛으로 되돌아왔다. 그녀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으며 강윤에게로 다가섰다.
“윤아. 인이는 나한테 아무것도 숨긴 게 없어. ”
강윤은 잠시 자신이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망설였다.
“아니, 잠깐만. 난 그 소문이 사실인지조차도 몰랐어. 너한테 사실 확인을 하려던 건 아니었지만 강인이 없으니까......”
“그만해. 그것 때문에 화내거나 그러지는 않아. 네가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잖아? ”
강윤이 대답하지 않자 민효는 강윤의 왼손을 잡았다. 주먹 쥔 손가락을 하나하나 잡아 편 후 평평해진 손바닥 위에 자신이 쥐고 있던 주사위를 올려놓았다. 자신도 모르게 긴장한 강윤은 몇 분간 뚫어져라 손바닥을 들여다보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주사위에서 불꽃이 튀거나 자신의 머릿속에서 파열음과 불꽃이 튀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도대체 이 조그만 게 뭐가 어떻다는 거야?”
“그건 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야.”
가슴을 펴고 당당히 대답하는 민효에게 강윤은 짜증스럽게 쏘아붙였다.
“같은 대답 두 번 듣자는 게 아니야. 내 말은, 그래. 이게 그런 물건이다 치자. 그래서 뭐 어쩌라구?”
“이건 주사위 주인이 너한테 준 거니까, 네 거야. 비록 네가 내동댕이치면서 나보고 버리라고 쏘아붙이기는 했어도 그게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안 이상 이건 네 거야. 너한테서 옮겨온 기억을 보고 알았어. 넌 이 주사위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안 섰지만 이 주사위를 너한테 준 사람에 대해서는 아주 슬퍼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더라. 그러니까 이건, 이 주사위는 네 거야. 너한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이 주사위, 나한테 빌려 줄 수 있어? ”
그러니까 민효가 하고자 하는 말의 요점은, 다른 것은 아무짝에도 쓸데없고 오로지 자신이 팽개쳤던 저 콩알만한 주사위를 자기 수중에 넣는 것(완전히 손에 넣을 수 없다면 임시로라도)만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강윤은 완전히 당황한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어서 민효를 쳐다보았다. 이런 얘기를 하려고 일부러 집에 온 게 아닌데, 난데없이 끼어든 주사위 하나가 모든 상황을 완전히 그의 예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몰고 갔다. 그는 강인이 여류 작곡가와 자고 있다는 뜬소문에 대해 처음부터 사실이 아니라는 쪽에 판단을 두고 있었으므로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난 다음에는 즉시 자신의 집―원룸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사실이라는 민효의 말에 충격받을 사이도 없이 호주머니 속에 새끼악마처럼 숨어 있던 콩알 같은 주사위가 강윤과 그의 눈 앞에 있는 민효에게 아주 곤란한 문제를 안겨준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아주 나쁜 상황만도 아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단서가 있지 않은가. ‘빌려 줄 수 있어?’라는. 그녀는 내게 부탁을 하고 있고 나는 조건을 내걸 수 있다. 그러나 무엇을 조건으로 내걸 것인가?
“가지고 싶으면 가져. 난 필요없어.”
그것으로 당장의 싸움은 일단락된 셈이었다. 그러나 다른 고민거리가 있었다. 눈앞에 있는 민효는 당장은 그가 본의 아니게 간직했던 뜨내기 행인의 유품을 갖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뱃속에는 살해된 아기가 떨어져나간 자국이 흉터가 되어 남아 있을 게 뻔하지 않은가. 그녀에게 그 흉터를 만들어준 형(사실 그에게는 형이라는 개념이 별로 없었지만)은 속 편하게 음악에 탐닉하며 그 음악을 구실삼아 천재적인 여류 작곡가인지 뭔지 하는 여자와 붙어먹고 있다. 그게 현실이니, 그로서는 당연히 외면상 피해자인 가여운 민효의 편을 들어 강인을 응징해야 할 의무가 있지 않은가. 그러나 한편으로는 모른 체하고 있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처음부터 민효가 아닌 강인을 상대로 물었어야 했다. 단도직입적으로 ‘정말 작곡가인지 뭔지 하는 여자랑 자고 있는 거냐?’고 물었어야 했다. 그는 자신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짝사랑했던 소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비록 지금은 소녀라고 불릴 나이를 한참 넘어서 버렸지만, 늘 그를 매혹시켰던 수많은 아름다움들은 해가 갈수록 깊어지고 있었다. 교육과 독학에 의한 습득이라고 해도 스스로가 겪는 거대서사적인 고통들을 사소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능력은 아무나 습득하는 게 아니다. 주위 사람들의 방관과 무관심이 아니었다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덕분에 그녀는 지금도 편히 웃고 있다.
“고마워. 너한테 필요없는 장난감이라 해도. 나한테는 이게 어쩐지 아주 중요한 장난감이 될 것 같아. ”
무슨 뜻이지? 하고 물어보려고 막 입을 연 순간 강윤의 머릿속에 아주 낯선 장면들이 스쳐갔다. 방금 전 그의 손바닥에 올려졌던 주사위를 통해 복사된 민효의 기억이 그의 기억으로 환원되어 나타난 것이다. 그는 자신이 민효가 되어 그녀가 겪은 일들을 자신이 겪은 것처럼 느끼며, 그녀의 기억을 자신의 기억처럼 되살려냈다. 그렇게 해서 얻은 기억들은 몇 안 되는 기억에 불과했지만, 그 몇 안 되는 기억들은 강윤은 경악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는 그 자리에 주저앉을 것처럼 비틀거리다가, 별안간 민효의 어깨를 으스러지도록 잡았다.
“거짓말을 했어?........왜, 왜 그런 거짓말을 해?”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어깨가 아프다는 시늉을 했다. 그러면서 겸연쩍어하는 마음을 창백해진 얼굴에 그대로 드러내 보이며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