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
# 9
강인은 아이스크림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가 이따금 집에 돌아가면서 아이스크림을 사 들고 들어가는 버릇이 붙은 것은 순전히 민효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매번 그에게 아이스크림을 요구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자진해서 뭔가 그녀의 품에 선물을 안겨주어야만 양심의 가책이라 부를 만한 감정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성이 위선적이지 못한 그는 속으로는 ‘양심의 가책’을 생각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적어도 유경의 아파트에 들렀다 집에 가는 날이면 반드시 아이스크림을 사 들고 들어가서 민효에게 안겨주는 습관이 머리에 밴 이후로는 자신이 들고 가는 것이 선물이 아니라 독약 혹은 말도 못하게 혐오스러운 쓰레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민효는 웃으며 아이스크림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어찌 된 셈인지 그를 불편하게 할 만한 언행을 삼가려는 태도를 보였다. 그녀는 좀 더 멀리 떨어진 위치에서, 사랑은 고사하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위치에 서서 그를 살펴보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 강인의 판단은 옳았다. 그러나 해롭지는 않을지언정 사람을 비참하고 쓸쓸하게 만드는 태도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 나이디가 나타났을 때, 강인은 그 자리에 없었다. 그가 초인적인 인내심을 가지고 자신의 곤혹스러운 입장과 주위 사람들의 비난을 감수하며 얼굴을 찡그리고 있을 때 민효는 집에서 은하와 함께 식탁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 곁에는 은하의 애인이자 디아이 셀의 기타리스트인 진호가 같이 있었다.
강인이 과연 그 주사위를 내게 돌려줄까? 그리고 내게 돌아온 주사위가 내가 알지 못하는 강인의 비밀들을 낱낱이 내게 전해줄까? 그녀는 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의 효능에 대해 손톱만큼의 회의도 갖지 않았다. 왜냐? 내가 이미 확인했으니까. 나 자신 오래 전에 기억의 전이를 직접 겪었고, 강윤 역시 그랬으니까. 초자연적 현상이라는 게 별 거야? 우리가 겪은 일들이 우리 인생을 달라지게 하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조금이나마 우리를 도와 주기는 했어. 앞으로도 그럴 거야. 우리? 우리가 누구야? 나와 강인. 그리고 강윤. 어째서 항상 강윤을 우리의 외접원 밖으로 밀쳐내지 못하는 거야? 그건 그애가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지. 그리고 난 그걸 허용하기 때문이지. 하지만 난 최소한 그애랑 안 잤어. 그런데 강인은 뭐야. 이번 일만이 아니라 어떤 일을 앞에 두고서도 나보다는 음악이 먼저였지. 정확하게 말하면 자기 가치증명이 목적인 거야. 어릴 때부터 지는 걸 싫어했지. 한 번 꼭지가 돌아 버리면 어떤 사람도 못 당해냈지. 그러니까 이번에도, 내가 져 준다고? 져 줄 순 있지. 하지만 순순히 져 주진 않을 거야. 그러니까 무사히 주사위를 가지고 내게 돌아와 주길. 주여 저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난 기독교 신자가 아니지만, 이번만큼은 신이 널 시험에 들게 해야겠어. 네가 날 시험에 들게 했으니까.
“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민효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은하의 커다란 눈이 깜박이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제서야 그녀는 자신이 느닷없이 찾아온 친구 커플과 차를 마시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
“아무것도 아니긴, 너 지금 강인 생각하고 있지?”
“너 귀신이다. 역시 못 속이겠어.”
그러나 민효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은하가 알면 그녀는 친구가 미쳤다고 생각할 터였다. 민효는 진호에게 커피잔을 내밀며 물었다.
“그런데 지금, 레코딩 때문에 바쁘지 않아요? 용케 은하랑 만날 시간을 냈네.”
“레코딩이 아니라 라이브 공연 때문에 바빴어. 그런데 오늘 저녁에, 얘가 강인 때문에 화가 나서 K클럽을 뛰쳐나와 버렸거든. 할 수 없이 다들 막는 걸 뿌리치고 은하를 쫓아와 버렸어. ”
강인 때문에? 민효는 눈을 크게 뜨고 대답을 채근했다. 진호가 은하의 입을 막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강인이 요즘 몸이 안 좋은지 목소리가 영 맛이 갔더라구. 기분도 안 좋아 보이고. 그런 참에 은하가 한 두 마디 네 얘기를 했더니 강인이 ‘그렇게 걱정되면 내 앞에서 주절대지 말고 본인한테 찾아가서 물어 보지.’ 그 말 듣고 은하가 화가 나서 알았다고 말하고는 바로 이리로 뛰어온 거야. 난 얘 따라왔고.”
은하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덧붙였다.
“너희들 싸웠니? 그애가 너한테 불만이 많은 거 아니야? 아아 신경질 나. 자기가 잘한 게 뭐가 있다고. 노래......”
‘노래 하나 얻어내려고 아무 여자하고나 자는’ 이라는 말이 튀어나오기 전에 은하는 입을 다물었다. 민효는 그 자리에 없는 강인에게 전송 불가능한 텔레파시를 보냈다. 어쩌면 너는 내가 혐오스러워진 건지도 몰라. 자기의 아이를 낙태했다는 말을 학교에서 개근상 받았다는 말만큼이나 그렇게 당당하게 하는 내가 싫지? 그런 나를 매일 위로하고 매일 달래며 제 3의 작업을 진척시키는 것도 피곤하겠지. 민효는 강인의 심중을 어느 정도 꿰뚫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그를 이해했지만 그렇다고 보복을 멈출 생각은 없었다. 내 존재를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면, 그 대가를 치르게 하고야 말겠다고 생각했다.
진호와 은하는 거실로 자리를 옮겨 비디오라도 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민효의 제의에 따라 거실로 나갔다. 때맞추어 현관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잡상인일 거라고 추측하며 민효는 인터폰을 집어들었다.
“실례지만, 강윤 군 계십니까?”
인터폰 스크린 안에는 웬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 희미해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강윤이나 민효 또래의 청년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강윤의 이름을 말하는 걸로 봐서는 분명 강윤과 아는 사람일 것이다. 민효는 잠시 이 사람을 집 안으로 불러들일까 말까 망설였다.
“내가 있으니까 괜찮아. 하지만 여자들끼리만 있을 때 낯선 사람을 집에 들이지 마.”
남자로서의 보호본능으로 절반쯤 무장한 진호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틀림없이 강윤에게 전화를 걸거나 혹은 초인종을 무시했을 것이다. 민효는 정원으로 나가면서 왜 작년에 부모님(강태규 박사 부부)의 일본행을 앞두고 집을 팔자는 말이 나왔을 때 강 박사가 이 낡은 집을 그냥 내버려두기를 고집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파트로 옮기는 편이 나았을 텐데.
문을 연 그녀와 정면으로 마주친 사람은 검은 양복을 입은 여윈 중년 남자였다. 키는 중키였고 푸른 선글러스를 썼으며 어린 계집아이를 안고 있었다. 민효는 외판원들을 상대할 때 흔히 취하는 냉담한 태도를 취했다. 예의가 어긋나지 않을 정도의 적당히 냉담한 태도였다.
“강윤을 찾으시나요? 그앤 지금 여기 없어요.”
“지금 댁에 안 계십니까?”
육중한 철문을 사이에 두고 푸른 선글러스와 짙은 다갈색 눈동자는 서로를 탐색했다.
“꼭 그를 만나야 하나요? 실례지만 그와는 어떤 관계이신가요?”
“관계랄 것은 없고.......그분이 맡고 계신 물건을 돌려받으려고요. 대단히 실례입니다만 잠깐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혼자 계신 게 아니라면......”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집 안에는 진호가 있으니 괜찮을 것이다. 더구나 어린애까지 데리고 있는 사람이 나쁜 짓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녀는 계속 미심쩍하면서도 그를 안으로 불러들였다.
거실로 들어온 남자는 의아해하며 자신을 살피는 두 남녀에게 그 이상의 태도를 기대할 수 없을 만큼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품 안에 어린애를 안은 채로 고개를 구부렸기 때문에 그 때마다 몸이 앞으로 아슬하게 휘청거렸으므로 민효가 옆에서 부축을 해야만 했다. 낯선 남자를 부축한다는 것은 껄끄러운 행동이었지만 아이가 다치는 것보다는 나았다. 인사는 둘째치고 애부터 내려놓으라는 은하의 대답이 아니었던들 그는 언제까지고 아이를 안고 있을 태세였다.
“실례지만 강윤이 댁의 소지품을 갖고 있단 말이죠? ”
“제 소지품은 아니지만 중요한 물건입니다.”
민효는 뒤에 있던 은하를 돌아보며 말했다.
“강윤한테 전화해서 안 바쁘면 집으로 좀 오라고 해 줄래?”
“바쁘다고 하면?”
“바빠도 오라고 해. 급한 일로 찾는 사람 있다고 해. ”
“흠, 뭐.......”
진호는 근엄한 얼굴로 핸드폰을 열었다. 다른 건 몰라도, ‘민효가 말이지.......’라고 말하면 만사를 제쳐두고 뛰어오겠지. 뭐라고 할까? 민효가 쓰러졌다고 할까? 그게 좋겠군. 진호는 두 여자를 피해 부엌으로 들어갔고 민효는 이 집의 두 번째 여주인다운 태도로 그 남자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실례지만 그 선글러스를 벗으셔도 될 것 같은데요.”
“아니오. 안 됩니다. 제 건강상 눈이 빛을 바로 받으면 문제가 많거든요 .”
은하와 민효는 눈살을 찌푸리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민효는 그 말을 믿기로 했고 은하는 조금 더 상황을 살펴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민효는 싱크대에 달린 찬장에서 커피와 코코아를 꺼냈다. 은하는 선글러스 남자의 옆에 앉은 아이를 신중하게 관찰했다. 서너살 가량 되어 보이는 계집아이였다. 짧게 깎은 머리와 묘하게 어린아이답지 않은 검은 눈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특이해 보이지 않는 어린애였다. 아이가 입고 있는 셔츠에 새겨진 곰을 보고 은하는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지극히 어린아이다운 옷이었다.
그 때 진호가 다가왔다.
“강윤 지금 이리로 올 거래. 꼼짝말고 기다리래.”
그러자 푸른 선글러스가 말했다.
“그거 다행입니다. 당사자가 없으면 제가 아무리 설명을 드려도 안 믿으실 테니까요.”
“무슨 설명요? 혹시 이 애가 강윤 딸이라든가 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얘길 하시려는 건 아니겠죠?”
그 말을 한 것은 은하였지만 사실 그 발상은 민효와 은하의 머릿속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생겨난 것이었다. 아니 옳게 표현하자면 민효 쪽이 좀 더 빨랐다. 그녀는 푸른 선글러스를 집안에 들일 때부터 아이의 존재에 대해 불안해하며 이모저모로 아이의 정체를 추측했던 것이다.
푸른 선글러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 건 아닙니다. 계속 말씀드렸지만 강윤 군이 아주 중요한 물건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그걸 돌려받으러 온 겁니다.”
“그 물건이 대체 뭐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