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
# 8
강인은 푹신한 담요가 깔린 공기침대에 누워 천장에 잔뜩 붙어 있는 별 모양의 야광스티커들을 쳐다보았다. 그는 갓난아기들조차도 좋아하지 않을 법한 저런 야광 별을 천장에 걸어 두는 유경의 취향을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하긴 그에게는 장유경이라는 여성 자체가 순수한 몰이해의 대상이었다. 지금 새파란 2인용 공기침대 위에 누운 그의 곁에 매달리다시피 안긴 채 잠들어 있긴 하지만 그는 그녀의 몸에 대해서도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그가 그녀의 아파트에 드나들게 된 것은 순전히 그녀가 그에게 주기로 약속한 어떤 음악 때문이었다. 그는 약 석 달쯤 전 우연히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찾아간 사설 스튜디오에서 그녀와 그녀가 작곡한 음악을 처음 접했다. 그는 그녀의 가냘프고 신비스러운 외모에 대해서는 그다시 신경쓰지 않았지만, 그녀가 손수 한두 소절을 키보드로 연주해 준 그 곡은 그의 근육을 완전히 마비시켰다. 그는 그 곡이 어떤 가락과 리듬과 감정을 가지고 태어날지 점칠 수 있었다. 그 곡을 주는 댓가로 유경이 강인에게 내건 조건의 실체는 이미 K클럽 사람들 사이에서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음을 앞서 말한 바 있다. 그 결과 그는 화려하고 풍요롭고 안락하지만 결코 원하지 않았던 60평짜리 고급 아파트의 거실에 드러누워 왼손으로는 TV리모콘을 쥐고 오른팔로는 자신보다 네 살이나 많은 여자를 안고 있다. 왜 하필 거실이냐 하면 갑갑하고 좁은 방을 싫어하는 강인 때문에 유경이 거실에 이부자리를 만드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기 때문이다. 둘 다 이미 한 차례 일을 치르고 난 후였다. 유경은 섹스 후에 으레 찾아드는 노곤함에 못이겨 잠이 들었지만, 강인은 그리 쉽게 졸음에 몸을 맡길 수 없었다.
강인은 품에 안긴 여자의 머리에서 나는 샴푸 냄새를 맡으며 소리 없이 뇌까렸다. 당신은 아직 이십 대 후반의 나이인 젊은 여자다. 게다가 민효와 비슷한 나이로 보일 정도로 어려 보인다. 천재 작곡가의 딸이었고, 부모로부터 돈과 미모와 재능을 물려받았다. 당신은 너무 손쉽게 원하는 것을 손에 넣지 않았나? 대중음악 작곡가로서의 명성, 음악에 대한 천부적인 감각, 그리고 원하는 남자까지. 강인은 왜 이 누나뻘 되는 여성이 그 많은 사내들을 제쳐두고 자신과 자고 싶어했는지 아직도 잘 알 수 없었다. 당신은 가냘프다. 당신은 내가 안아주면 멋진 신음 소리를 내지만 내가 당신을 정말 만족시켜서 그런 건지 아니면 가짜로 소리를 내는 건지 잘 알 수 없다. 당신의 몸은 지나치게 마르고 딱딱한 몸이다. 게다가 미지근하다. 그렇지만 고상하다. 강인은 민효의 부드럽고 따스한 몸을 생각했다. 침대든 바닥이든 상관없이 어딘가에 눕혀져 있기만 하면 그저 안아버리고 싶은 그런 몸이었다. 그러나 그 몸이 어느 날인가 배신의 조짐을 보였다. 느닷없이 낙태라는 말이 머릿속을 치고 지나갔기 때문에 강인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으로 자신의 이마를 한 대 갈겨야 했다. 민효는 화가 난 거야. 게다가 슬슬 나를 포기하고 싶어하는 거야. 내버려두지는 않을 거야.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유경이 몸을 뒤척였다.
“깼어?”
“아.....나 잠들었었나?”
유경은 잠에서 완전히 깨지 않은 몸을 께느른하게 움직이다가 팔을 뻗어 강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래. 좀 더 자.”
“넌 안 잤어?.......계속 텔레비전만 본 거야?”
한결같이 부드럽고 조용한 태도는 걸핏하면 짹짹거리며 시비를 걸거나 칭얼거리는 민효의 태도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적어도 저렇게 온화한 태도와 여성스러운 몸가짐만큼은 민효가 유경이의 반만이라도 닮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낙태라니........강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토록 주도면밀하게 피임에 신경쓰던 민효가 느닷없이 낙태라니? 그는 자신이 이번 일로 해서 민효에게 얼마나 정나미가 떨어졌는지 가늠해 보았다. 그러나 실제로 정나미가 떨어졌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보다는 자신이 응당 가져야 하는 죄책감 때문에 짜증이 났을 뿐이다. 지금 자신의 행동은 틀림없이 잘못되었다. 내 무책임한 행동은 거의 범죄에 가깝다. 그러나 그에게는 더 중요한 열정과 욕망이 있었다.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지 않았어?”
“무슨 소리야. 온 지 몇 시간이나 지났다고 그래.”
“그게 아니라. 너와 내가 약속한 시간 말이야. 이제 거의 다 끝나갈 때가 되었지.”
강인은 유경의 얼굴에 떠오른 슬픈 미소를 보지 못했다.
“아직 멀었어?”
유경은 강인의 품을 파고들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제 곧 태어날 거야. 우리들의 노래......”
유경의 속삭임은 강인의 귓구멍뿐 아니라 머릿속을 들쑤셔놓았다. 노래가 태어난다고? 노래는 만들어져 완성되는 것이지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는 태어나든 완성되든 그 노래가 온전히 자신만의 것이기를 바랬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다. 음악을 만드는 것은 내가 아닌 장유경이다. 그리고 그 음악을 세상에 내보내는 사람은 내가 될 것이다. 유경은 자신이 나와 나눈 섹스의 오르가즘을 ‘희(喜)’라는 단 하나의 단어로 표현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나는 그 음악의 아버지나 다름없고 유경은 명백한 어머니이다. 결국 노래는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다. 그 사실이 강인을 심란하게 했다. 처음으로 유경의 스튜디오를 찾아간 날 그가 들었던 유경의 미발표곡들은 그를 반쯤 미치게 했다. 그는 진심으로 그녀가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다고 생각했지만 그녀에게 반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그에게 자작곡을 주겠다는 약속의 댓가로 내건 조건에 대해 그는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이지적이고 아름다운 이 여자의 어느 구석에 그런 대담한 면모가 숨어 있었단 말인가. 그러나 유경의 제안은 그녀 자신을 뻔뻔스럽게 보이도록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의미에서 강인의 판단은 진실이기도 했다. 그게 바로 강인이 유경의 제안을 수락하고 과감하게 민효를 외면하게 한 이유다. 물론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다은 데 있었지만.
“이제 얼마나 남았어?”
“지금 테이프를 만들고 있어. 아마........다음 주에는 네 손에 쥐어질 거야.”
유경은 강인의 회색 셔츠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강인은 몸을 푸르륵 떨며 상반신을 일으킨 후 유경의 어깨에 걸린 엷은 살구색 슈미즈의 끈을 풀었다. 훅이 끈에 달려 있어 훅만 열면 그대로 끌어내려 벗길 수 있는 슈미즈였다.
TV에서 스콜피온스의 라이브가 흘러나왔다. 갑자기 농구 중계방송이 나타났다. 유경의 뒤통수가 리모콘의 채널 버튼을 누른 것이다. 강인은 리모콘을 침대 아래로 밀어 떨어뜨려 버렸다. 바닥에 깔린 두터운 카펫이 리모콘의 파손을 막았다.
“3점 슛! 네에..... 골대에 맞고 떨어졌습니다. 안타깝군요. 다시 레이업!”
강인은 유경의 체온이 지나치게 낮다고 생각했다. 이 미지근한 체온을 달아오르게 하는 것도 보통 노동이 아니었다. 유경은 강인의 귀에 입을 대고 가쁜 숨을 불어넣었다. 강인의 등이 차츰 빠른 속도로 경련하기 시작했다. 스프링이 들어가지 않은 공기 침대는 삐걱거리지 않았다.
“안타까워.”
“뭐?”
유경은 다시 대답하지 않고 강인의 등을 끌어안았다. 손가락이 파들파들 떨렸다. 강인은 유경의 팔을 조심스레 떼어내며 노곤해진 몸을 반쯤 일으켰다.
“한 번만, 한 번만 더.”
“잠깐만. 물 한잔만 갖다 줘. 얼음 넣어서. 머리 아파.”
유경은 내키지 않는 듯 슈미즈를 주워 입고 불을 켰다. 갑자기 주위가 밝아지자 강인은 눈이 부시면서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물을 가지러 부엌으로 들어간 유경은 잠시 후 웃음을 터뜨리며 부엌에서 나왔다. 그녀는 강인에게 물을 내밀며 응석을 부리듯 속삭였다.
“참 이상해. 그렇게 우스운 걸 보게 되다니.”
“우스운 거?”
섹스를 끝낸 후 겸연쩍고 어색한 분위기가 되어 한동안 침묵을 지키거나 TV의 소음을 빌리는 일은 두 사람 모두에게 고역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서로에게 살갑게 ‘어땠어? 좋았어?’ 하고 묻는다거나 다정하게 팔베개를 하고 잠든다거나 하는 일도 좀처럼 없었다. 이번에는 가장 껄끄러운 순간을 한 고비 넘긴 셈이다. 유경은 벌컥벌컥 물을 들이킨 후 컵을 내미는 강인에게서 컵을 받아들어 한쪽 구석으로 밀쳐 놓은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아까 네 옷 세탁기에 넣을 때, 하마터면 주머니 안에 있는 소지품을 빼놓는 걸 잊어버릴 뻔했거든.”
“곤란한데. 기껏 없는 돈 털어서 비싼 지뽀 라이터 샀는데 물 들어가면 못 쓴단 말이야.”
“걱정 마. 라이터라면 얼마든지 새로 사 줄게. 그보다도, 네 주머니 속에 있는 거 다 꺼내서 내 방 화장대 위에 올려 놨어. 근데 참 웃겨. 눈 앞에서 아이스크림 열 다섯 개가 나란히 서서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추는 거 있지? 빈혈이 너무 심해서 내가 헛걸 봤나 봐.”
빈혈 어쩌고 하는 말은 민효가 그녀 자신의 전매특허단어로 쓰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어떤 심각한 경우에도 자신만의 묘한 유머 감각을 항상 간직했다. 반면 유경의 농담은 그 농담이 명백하게 남을 웃기려는 의도일 때조차 너무나도 심각했다. 그러한 유경의 농담은 강인의 웃음을 유발하기는커녕 그를 정색하게 만들곤 했다.
“설마하니.......”
강인은 뭔가 말을 하려다 말고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우리 약속, 다음 주에 지켜지는 거 맞지?”
“한 가지만 약속해 주면......”
“또 무슨 약속? 지금까지 난 성실하게 약속을 이행했는데 또 무슨 약속이야? ”
하마터면 ‘그깟 음악 하나에 무슨 요구조건이 그렇게 많아?’라는 폭언이 튀어나올 뻔했다. 유경은 강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계속 만나줄 수 있어?”
이 요구에 직면했을 때 강인의 판단은 빨랐다. 우선, 그는 유경을 싫어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물질적 풍요로움과 섬세한 내면, 그녀가 자신에게 베푸는 호의, 그녀의 재능과 명성, 그 어떤 것도 당장 내버리기에는 아까운 것들이었다. 그는 잠시 자신의 양심과 대면했지만 딱히 양심에 위배된다고도 할 수 없었다. 단 한 사람, 민효에게만은 죄책감이 들었다. 그러나 이미 모든 것을 이해하고 수용한 그녀이니, 조금 더 자비와 인내심을 기대한다 한들 안될 게 뭔가. 그리고 이러한 모든 이성적인 판단을 넘어선 후 감정적으로 유경을 대했을 때, 그는 다만 그녀를 동정했다. 그는 다른 누구도 알지 못하는 그녀의 측은한 면모를 잘 이해했다. 앞으로도 만나주지 못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 계속 만나줄게. ”
“지금처럼 만족시켜 줄 수 있어?”
“그렇게 할게.”
유경은 강인의 가슴을 손으로 쓸었다. 가늘고 긴 검지손가락을 뻗어 그의 피부와 근육을 탐욕스럽게 훑어내렸다. 갑자기 그녀를 밀쳐내고픈 충동이 치솟는 것을 참으며 강인은 속옷을 주워 입고 일어나 팔로 바닥을 더듬으며 리모콘을 찾았다. 이미 농구 중계 방송이 끝난 화면은 대학 입시의 폐단을 주제 삼아 논쟁을 벌이는 토론 프로그램을 점잖게 방영하고 있었다. 강인의 어깨를 손으로 쓸어내리다 말고 유경이 문득 생각난 듯 중얼거렸다.
“아이스크림 먹고 싶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