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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lsavina Dec 24. 2017

옛날이야기 할머니

옛날이야기 할머니



우리 동네에는 말이죠. 두 눈이 멀어버린 할머니가 한 분 살고 계세요.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할머니가 우리 동네에 사는 건 확실하지만 우리 동네의 어느 집에 사는지는 잘 몰라요. 한 번도 그 할머니의 집을 가 본 적이 없으니까요. 그리고 아무도 그 할머니의 집을 궁금해하지 않았으니까요.

우리는 그 할머니를 ‘옛날이야기 할머니’라고 불렀어요. 왜냐하면, 매주 일요일 오후만 되면 어김없이 지팡이를 짚고 마을 어귀에 있는 옛날 우물터 곁 나무의자에 앉아서 우리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거든요. 솔직히 말해서 그 얘기들이 한결같이 재미있기만 한 건 아니었어요. 옛날얘기 할머니의 얘기는 처음에 재미있게 시작했던 얘기도 점점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할머니의 장황한 잔소리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우리들 중 그 넋두리를 이해하는 애들은 별로 많지 않았을 거예요.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지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작고 약한 부족의 어린애들과 여자들을 그렇게 무참히 학살하는 건 아니 될 말이었어. 그 벌을 받아서 그 영화롭던 왕국은 멸망하고 그토록 아름답던 왕궁의 터전은 잿더미로 화해 버린 거야. 모두 부처님의 뜻이지. 신은 사라졌다고, 혹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들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단지 인간의 우매함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야......아, 나로서는 가슴아픈 일이다’

이런 식으로 이어지는 얘기들을 누가 귀담아듣겠어요? 이런 식으로 혼자 중얼거리는 할머니의 모습은 숫제 보이지 않는 어른을 상대로 열심히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여서 우리들의 기분이 종종 언짢아질 때가 있었어요. 하지만 할머니의 얘기 중에는 그래도 꽤 재미있는 얘기들도 간혹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일요일 오후만 되면 종종 할머니의 얘기를 들으러 가곤 했어요. 특히 먼 옛날의 철기군 얘기라든지 대륙을 종횡무진으로 누비며 적을 무찌르고 영토를 넓혔던 위대한 대왕 이야기, 용맹한 장군들의 무용담이나 장군을 사랑하는 예쁜 공주 이야기 등은 귀담아 들을 만했지요.

할머니는 비록 눈이 멀긴 했지만, 무척 상냥하게 웃으시는 분이었어요. 지금은 얼굴에 주름살이 많이 져 있어서 보기 흉하지만, 어쩌면 젊었을 때는 예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가끔 들긴 했어요. 가끔 계집애들은 할머니의 얘기를 듣고 있으면 슬퍼진다며 흐느껴 울기도 했는데 전 걔들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더라구요. 전 왕과 장군이 나오는 이야기만 좋아했지 여자애들이 좋아하는 선녀이야기나 사랑이야기는 질색이었거든요. 그날도 전쟁놀이에 지친 우리는 모두 우물터로 몰려가서 나무둥치에 앉아 계신 할머니의 얘기를 귀기울여 들었어요. 그날따라 할머니의 얘기는 정말 재미있었어요. 멋진 장군을 죽이기 위해 자객이 등장했고, 왕은 간신에게 속아 장군을 유배보내는 대목에서는 다들 주먹을 불끈 쥐고 정말로 간신을 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화를 내며 떠들었어요. 이제 배도 고프고 해서 집에 슬슬 들어가려던 참에 할머니는 여느 때와 달리 알맞은 시간에 얘기를 끝내시고는 다른 얘기를 꺼내셨어요.

‘이제 너희들 집에 갈 시간이구나. 마지막으로 좀 다른 얘기를 해 볼까? 아주 재미있고 색다른 걸로 말이다.’

솔직히 그 얘기가 얼마나 색다르고 재미있을지는 잘 몰랐지만 어쨌든 우리들 중 몇몇은 그대로 집으로 가 버리고, 나를 포함해서 호기심이 많은 몇몇 아이들만 할머니 발치에 그냥 남아 있게 되었죠. 할머니는 웬일인지 그날따라 조금 슬퍼 보이셨어요. 자꾸 한숨만 지으면서 보이지도 않는 감긴 눈으로 먼 산을 보시던 할머니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정면을 보시는 거였어요. 꼭 누군가가 할머니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처럼요.   

‘너희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니?’

‘그럼요. 옛날이야기 할머니잖아요!’하고 우리들은 신나게 외쳤죠.

‘그것 말고, 내가 정말로 누구인지, 아니 내가 정말로 옛날에 누구였는지 알고 있니?’

우리는 무슨 뜻인지 몰라 고개를 갸우뚱거렸어요. 옛날이야기 할머니가 옛날에 다른 사람이었을 수도 있었다는 걸 우리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걸 전 그때서야 깨달았죠. 할머니의 다음 이야기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이없고 황당무계한 얘기였어요.

‘나는, 사실은 한 나라의 공주였단다. 지금은 멸망해버려서 존재하지 않는, 옛 왕국의 공주였지.’

어른들이 들으시면 아마 할머니를 미친 사람 취급했을 거예요. 아무리 멸망한 나라의 공주라고 해도, 어떻게 공주였던 사람이 지금 이렇게 눈이 먼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서 우리들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겠어요? 저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어떤지 몰라도 한 계집애가 할머니에게 이렇게 물었어요.

‘할머니가 공주라면, 왜 눈이 멀어 버렸어요? 그리고 왜 이런 곳에서 살고 계신 거예요? ’

할머니는 소리없이 웃으셨어요.

‘그러고 보니, 너희들에게 멸망한 나라의 왕족들이 어떻게 되는지 아직 들려준 적이 없구나. 어린 너희들에게는 너무 참혹한 이야기지.’

솔직히 말해서, 참혹하게 사람을 죽이는 전쟁 이야기도 서슴지 않던 할머니가 그렇게 말씀하실 줄은 몰랐어요. 아마 할머니도 그 생각을 하신 모양이죠?

‘아마 너희들은 어려서 잘 모를 거다. 전쟁터에서 사람들이 서로 죽이고 죽는 것과는 또 다르게 참혹한 얘기니까......멸망한 나라의 왕족들은 말이다. 정복자들에게 살해당하거나, 노예가 되거나, 혹은 먼 나라에 강제로 끌려가야 한단다......’

‘할머니가 정말 공주였나요?’ 드디어 정말 우리가 묻고 싶었던 질문을 내 친구가 할머니에게 서슴없이 던졌습니다.

‘그래, 너희는 아마 믿지 않겠지만 말이다......내 눈이 왜 멀었냐고 물었더랬지.....글쎄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까. 한쪽 눈은 내 업보 때문에 멀어 버렸고, 한쪽 눈은 나라가 멸망하는 바람에 정복자들에게 끌려가 모진 고초를 겪고 이렇게 되어 버렸단다. 참으로 긴 세월이었지.’

‘할머니가 공주라는 증거를 대 보세요!’

우리는 신이 나서 할머니를 몰아세웠어요. 아무도 할머니의 고백을 믿지 않았으니까요. 할머니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시더니, 곁에 세워 두었던 지팡이를 더듬어 짚고는 힘들게 몸을 구부려 땅바닥으로 손을 가져가셨어요.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흙바닥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그건 아주 간단하면서도 아주 이상한 모양의 그림이었어요. 커다란 동그라미 안에 여러 개의 소용돌이가 있는 듯한 그림이었죠.

할머니는 여느 때보다 훨씬 낮고 이상하리만치 야릇한 어조로 말문을 여셨어요.

‘화려하고 웅장했지만, 중상모략과 암투가 가득한 곳이었지. 마치 천국을 가장한 지옥과도 같은 그런 곳이었지. 먹을 것 입을 것 어느 것 하나 부족하지 않았어. 보석도 많았다. 아름다운 치마도 많았어. 그렇지만 그 어느 누구도 행복해하지 않았다. 왕궁은 바로 그런 곳이었다......’



나는 그 아름답지만 위험했던 왕궁의 수많은 여인들 중에서도 단연 별난 존재였다. 일찍부터 다른 여인을 시샘하는 법과 분을 바르는 법, 왕과 권세를 가진 남자들에게 아양을 떠는 법을 배운 다른 후궁들이나 공주들과 달리 나는 일찍부터 세상을 떠도는 알 수 없는 허망한 슬픔을 먼저 익혔으니까. 어쩌면, 내 어머니가 일찍 버림받고 돌아가셨다는 사실 때문에 특히나 더 그러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나는 나의 심약하고 우울한 기질이 순전히 내 피를 타고 흐르는 혈통 탓이었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글과 그림을 익혔다. 다른 공주들이 나보다 먼저 배워 익힌 춤이나 노래, 악기 등을 나는 그들보다 잘 다룰 수 없었다. 남 앞에 자신을 드러내는 재주는 일찌감치 내게 없었던 거지. 나는 내가 아닌 다른 무엇인가를 내 대신 내세워야 했다. 나는 아름다운 후궁들과 공주들의 부채에 그림을 그려주기도 했고 그들이 정인에게 줄 아름다운 시를 대신 써 주기도 했지. 그들은 내게 고마워했고 나를 경계하는 마음을 갖지 않게 되었지. 그 덕에 나는 궁중에서 벌어지는 여인들의 암투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단다.

하지만 자유로운 시절은 오래 가지 않았어. 내가 자라 열 다섯 살이 넘어 성숙한 여인으로 대접받기 시작하자 왕은 다른 모든 공주들에게 그랬듯 나 역시 정략 결혼의 제물로 만들려 했어. 다른 많은 공주들과 달리 나를 데려가려는 남자는 없었다. 나의 심약하고 우울한 기질보다는,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나의 얼굴 때문에 그들은 나를 피했다.

그러나 오로지 한 사람, 나를 아내로 달라고 청한 한 사람이 있었다고 들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왕은 그에게 나를 주지 않았다. 왕은 그의 신분이 공주인 나를 아내로 맞기에는 너무 천하다 했다. 나는 그가 누구인지 몰랐고 알고 싶지 않았다. 내게는 이미 마음에 둔 남자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마음에 두었던 그에게는 불행히도 아내가 있었다. 그저 명분상의 아내가 아닌, 지극히 금슬좋고 다정한, 사랑하는 사이인 아내가 있었던 게지. 그래서 나는 비탄에 잠겨 두문불출하며 왕궁 내외부의 사람들과 일체의 교제를 끊었다. 다만, 왕궁에서 벌어지는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만 그를 볼 수 있다는 희망에 마지못해 참석하곤 했지.

그러다 마침 나의 몸종으로부터 그가 신심이 깊어 종종 절을 찾곤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는 오로지 그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에 가끔 그 절을 찾아가 부처님께 무릎을 끓고 엎드려 한없이 염주를 헤아리곤 했지. 사실, 나의 가슴 속에는 희망은 없었다. 끝없는 절망뿐이었다. 가도가도 끝없는 절망 말이다. 한 가슴 속에서 죽음과 사랑이 동시에 외나무다리를 건너고 있었어. 죽음은 왼쪽에서, 그리고 사랑은 오른쪽에서 외나무다리를 건너다 한중간에서 부딪친 거지. 나는 날이 갈수록 죽음이 조금씩이나마 사랑을 밀어내고 제 갈 길을 가려는 걸 느끼고 있었지. 어느 날 나는 마침내 죽기로 결심하고 절의 뒷마당 한 켠에 홀로 쭈그리고 앉아 연초를 피우고 있었다. 그 연초는 당에서 들여온 것으로 왕족 남자들만이 피울 수 있는 것이었지만 나는 내 신분과 재주를 적절히 이용해 약간을 구해  요긴하게 쓰곤 했지. 그렇게 홀로 죽을 길을 모색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아무도 보지 못하리라 믿었던 내 예상을 깨고 누군가가 내 손에서 연초를 낚아채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내게서 연초를 빼앗은 자의 얼굴을 응시했지. 바로 꿈에서도 잊은 적 없는, 내가 사모하던 그가 내 앞에 있었지.

‘공주님께서 이런 걸 즐기시면 안 됩니다.’하고 그가 말했다.

‘무엄하구나. 당장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지 못할까!’하고 나는 얼결에 고함을 질렀다.

‘용서하십시오. 공주님을 걱정하는 마음에 무례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네까짓 것이 왜 내 걱정을 한단 말이냐?’ 나의 입은 나의 마음이 원하는 것과 정반대의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 연초는 여인들의 몸에 좋지 않다고 들은 바 있어 그렇습니다.’하고 그가 대답했다. 나는 당황한 한편 그의 앞에서 달뜨는 나의 속내를 들키고 싶지 않았기에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나 돌아갈 채비를 했다. 돌아갈 채비라고 해 봐야 몸종 하나를 이끌고 말을 탄 것이 전부였기에 아무래도 공주의 신분으로서는 초라한 행색이었고 그건 결코 그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 나를 따라왔고 나는 짐짓 지엄하게 그에게 명했다.

‘따라오지 말라. 문아와 더불어 혼자 돌아갈 것이다.’

‘안 됩니다. ’

‘네가 정녕 죽고 싶은 게냐?’

‘죽이신다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만에 하나 공주님이 그렇게 가시다가 무슨 일이라도 당하시면 문아가 공주님을 지켜드리지는 못할 겁니다. 제가 바래다 드리지요.’

결국 그와 나는 함께 산을 내려와 궁으로 향했다. 그와 나란히 말을 모는 동안 나는 정신이 아득했고 마치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지. 그와 나는 서로 약속이나 한 듯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너무나도 아찔했던 나머지 나는 몇 번이나 말에서 떨어질 뻔했다. 나는, 여전히 내 가슴 속에서 죽음을 몰아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애써 죽음을 부를 필요가 없었다. 이미 왕궁의 내부와 외부에서 걷잡을 수 없이 종말의 어둠이 시시각각 몰려들기 시작했으니까. 그날 이후 나는 병들어 사경을 헤매게 되었고 몇 년간을 약으로 버티며 지냈다. 내 몰골은 병으로 인해 흉해졌고 나는 더 이상 어느 누구에게도 나를 드러내 보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왕궁은 적군의 거친 손에 의해 열렸고, 무자비한 참살과 약탈이 이어졌지. 왕은 여인들을 버리고 홀로 도망쳤다. 여인들은 무자비하게 욕을 당하고 죽어갔다. 나 역시 단지 공주라는 이유로 약탈자들에게 머리채를 잡힌 채 끌려갔고 벌겋게 달아오른 칼에 한쪽 눈을 잃었지.



할머니의 이야기는 거기에서 더 이어지지 않았어요. 어느 새 넋을 잃은 채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계집애들을 내버려두고 우리 사내애들은 먼저 집으로 돌아와 버렸지요. 집에 돌아온 저는 투덜거리면서 어머니께 옛날이야기 할머니가 한 얘기를 했어요.

‘늙은이가 기어이 노망이 났군.’ 하고 어머니가 말했어요.

‘그러게 왜 그 늙은 할멈을 졸졸 따라다니는 거니? 너도 이젠 어린애가 아니니, 그런 옛날 얘기에나 마음을 쓰는 것보다는 훨씬 어른다운 일을 해야지. 그렇게 노닥거릴 시간 있으면 가서 글공부나 더 열심히 해!’

역시 어머니는 어쩔 수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저는 그냥 그 일을 잊기로 했어요. 그런데 그날 밤에, 어른들의 수군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깬 저는 이상한 얘기를 듣게 되었어요. 다름아닌 아버지가 하신 얘기였어요.

‘담웅이가 그런 말을 듣고 왔단 말이지.’

‘네. 아무래도 그 할멈, 마을에서 쫓아내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괜히 애들한테 나쁜 물만 들이는 것 같은데......’

‘하지만 애들을 해치거나 괴롭히진 않잖아. 나이도 있는데 굳이 불쌍한 눈 먼 노인에게 그렇게 가혹하게 대해선 안 돼. 그보다, 가만 있자. 옛 왕조가 망하고 새 왕조가 들어선 지 벌써 오십 년이 넘었으니까.......’

‘당신까지 왜 이래요? 당신도 애들이나 그 노파 말을 믿는 거예요?’

‘아냐. 그 정도 세월이 흘렀으면 설령 공주가 있었다 해도 지금까지 살아 있을 리 없지. 살아 있다면 꼬부랑 할망구일 테고.’

‘그럼요!’

어머니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맞장구를 치셨어요. 하지만 본의 아니게 자는 체하며 어른들의 얘기를 엿들어 버린 저는 왠지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어요. 바로 아버지가 하신 마지막 말씀 때문이었지요.

‘공주가 살아 있다면 꼬부랑 할망구일 테고.’

할머니의 이상한 이야기가 있고 나서 얼마쯤 지났을까, 아마 달포나 지난 어느 날이었을 거예요. 그날은 무지하게 더운 날이었어요.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를 정도로요.

저와 제 친구들 몇몇은 어른들 몰래 글방으로 가던 발걸음을 돌려 계곡으로 물놀이를 하러 갔어요. 정말이지 너무 시원하고 재미있었어요. 한참을 정신없이 놀다가 한창 내리쬐던 뙤약볕도 어지간히 기울 만하고 어른들의 꾸지람이 걱정되기도 하고 해서 우리는 계곡을 벗어나 산을 내려왔어요. 그런데 산을 다 내려와 마을로 들어올 즈음 해서 맛있는 오디를 따먹기도 하고 산토끼를 쫓기도 하다 보니 그만 친구들과 길이 갈라졌지 뭐예요.

처음에는 친구들을 찾을까도 생각했지만, 그냥 집에 돌아가기로 마음먹고 야트막한 언덕을 따라 천천히 내려가던 제 귀에 불현듯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어요. 정확히 말하면 누군가의 흐느끼는 울음 소리였죠. 한순간 귀신이 아닌가 싶어 등골이 오싹하더라구요. 하지만 보기보다 담력이 있는 저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조심스럽게 접근해갔죠. 소리는 뜻밖에도 길가에 있는 작은 개울 쪽에서 나고 있었어요.

그 개울가에는 마을 어르신들이 겨울에 곡식을 저장해두는 창고로 쓰던 작은 오두막이 있었는데, 지금은 여름이라 텅 비어 있을 때였죠. 바로 그 오두막 앞에서 저는 뜻밖에도 옛날이야기 할머니의 모습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어요. 더 놀랐던 건 할머니가 혼자가 아니셨다는 거였죠. 할머니의 앞에 어떤 할아버지가 무릎을 꿇고 앉아 할머니에게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던 거예요. 저는 인기척을 내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오두막 뒤 수풀 쪽으로 숨어들었어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모습이 더 잘 보이고 두 사람의 목소리도 더 잘 들리는 곳으로요.

할아버지가 마침내 고개를 들고 말했어요.

‘이런 곳에 계실 줄 몰랐습니다. 아니, 살아 계시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살아 계신 줄 알았다면 어떻게든 찾았을 텐데.....’

‘그대는 돌아가야 하오.’ 할머니의 목소리는 슬프기 짝이 없게 들렸어요. 얼마간 울음이 섞인 목소리였죠. 어른들이 말하는, ‘비통하고 침통한’ 그런 목소리였어요.

‘어찌하여 나를 찾은 것이오? 왜 나로 하여금 그대에게 이토록 망측스러운 꼴을 보이도록 하는 것이오? 다른 것은 몰라도 이토록 꼴사납게 늙은 모습은 정말이지 보이고 싶지 않았건만.......’

할머니의 말투는 우리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때와는 사뭇 다른 어조였어요. 묘하게도 옛날의 장군들이나 쓸 법한 그런 말투를 쓰고 계셨죠. 할아버지 또한 할머니처럼 묘하게 고풍스러운 말투를 썼구요.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마치 큰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어쩔 줄 몰라하며 거듭 머리를 조아렸어요.

‘마마. 부디 소인이 마마를 모셔갈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아니된다 하지 않소.’ 할머니가 고통스럽게 흐느꼈어요.

‘지금 이 순간이 내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순간인지 그대는 모를 거요.’

‘하오나 마마. 마마를 모실 수 있는 그날을 영영 잃었다는 자책감에 오십사 년을 죽은 목숨처럼 살아왔나이다. 일찍이 죽으려고 했으나, 목숨이 모질어 부질없는 모든 욕망을 버린 채 지금껏 떠돌며 살아왔나이다. 하오나 마마, 부처님의 자비가 무심치 않아 옛 백제의 거룩한 영광을 잊지 않는 자들을 찾았사옵니다. 그들이 마마를 결코 이렇게 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나이다.’

‘그대는 아직 욕망을 버리지 못하였음에도 욕망을 버렸노라고 거짓을 말하는구려.’ 할머니가 씁쓸하게 들리는 웃음소리를 내며 말씀하셨어요.

‘욕망을 버렸사옵니다. 마마가 살아계신 것을 알기 전까지는, 욕망을 버리고 살았사옵니다. 살았으나 살았다 한 것이 없나이다. 하오나 마마, 마마를 뵙고 나서야 제가 이 모진 목숨을 이어올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았나이다. 마마!’

할아버지가 낮게 오열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부디 신의 청을 거절치 마시옵소서. 신은 마마를 모시고자 육십 년 이상을 기다려 왔나이다. 마마, 붕어하신 선대 전하께 마마를 달라고 청한 이가 누구였다고 생각하시나이까?’

‘뭐라고? 그럼 그대가?’ 할머니가 흠칫 놀란 듯 되물었어요.

‘그럴 리가. 정녕, 나를 아내로 달라 청했다는 그 단 한 사람의 사내가 바로 그대였단 말이오?’

‘그러하옵니다. 공주마마.’

공주마마라는 말을 들은 순간 전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어요. 옛날에 공주였다는 할머니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던 걸까요?

‘그대는 아내가 있는 몸이었소. 정실 아내가 있었단 말이오.’

‘마마. 그녀는 분명 제 아내였고 저는 그녀를 아꼈나이다. 그러나 그것은 저에게 지극했던 한 여인을 차마 저버릴 수 없었던 애처로운 마음에서 비롯된 연민이었을 뿐, 결코 애(愛)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나이다.’

‘그럼 선대 왕께서 나를 허락하셨다면 그녀를 어찌하려 했소?’

‘아뢰기 황공하오나 그녀를, 그녀를 죽이려 했사옵니다. 결코 후실의 자리로 내몰리는 것을 용납할 여인이 아니었기에, 그녀를 죽이지 않으면 내쫓을 수 밖에 없었나이다. 하여 괴로운 마음에 몇 번이나 부처님을 찾아가 빌고 또 빌었나이다. 마마. 마마께서는 그 먼 옛날 운설사 뒷마당에서 사내들이나 피우던 연초를 그 고운 입에 물어 피우고 계셨나이다. 그 모습을 보았을 때 신의 괴로움이 어떠했는지를 아신다면 마마께서 이처럼 매정하시지는 못할 것이옵니다. 다른 사내들의 눈에는 어떠했는지 모르나 제게는 어떤 장신구도 노리개도 없이 흔연한 모습으로 앉아 계시던 마마가 그 어느 선녀보살보다 아름다웠나이다. ’

‘그대가 공연히 나를 놀리는구려.’ 할머니는 더 이상 울지 않으셨어요.

‘나는 더 이상 공주도 아니고 아름답지도 않다오. 나는 이미 세간의 천민, 늙을 대로 늙어 쭈그렁 할머니가 되어버린 지 오래라오.’

‘신 역시 늙어 주름살이 얼굴을 덮었고 사내 구실을 못한 지도 어언 십 년이 넘었나이다. 허나, 공주마마를 생각하는 마음만은 그 먼 옛날, 열 일곱 피가 끓는 젊은 사내였던 시절과 한 점 다름이 없나이다. 부디 신을 버리지 마시옵소서.......’

그쯤해서 저는 이미 날이 완전히 저물어 버린 것을 깨닫고 슬그머니 오두막에서 물러났어요. 물론 생각 같아서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었지만, 더 이상 늦는다면 아버지께 호되게 꾸지람을 들을 것이 분명했거든요.

사실, 그날 밤 호되게 꾸지람을 듣고 회초리로 종아리를 두 대 맞아야 했어요. 글방을 빼먹고 친구들과 멱 감으러 갔다고 말이죠.



그날 이후로는 어쩐지 할머니의 모습을 잘 볼 수가 없었을 뿐더러, 설령 가끔 먼발치에서 할머니를 본다 해도 어쩐지 곁에 다가가기가 쉽지 않았어요. 사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저는 옛날이야기 할머니가 정말로 옛날에 공주였다는 허무맹랑한 얘기를 그렇게 쉽게 믿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하지만 결국은 어쩔 수 없이 다른 친구들과 옛날이야기 할머니 곁에 가서 다시 예전처럼 옛날 얘기를 듣게 되었어요. 옛날이야기 할머니는 한층 여위고 수척해진 모습이었고, 또 전에 없이 종종 먼 산을 보며 슬픈 표정을 짓곤 했어요. 늘 그러시긴 했지만 이번에는 어쩐지 색다르게 한층 슬픈 기색이 얼굴에 가득했어요. 뭔가 말 못할 서러움을 많이 간직한 것 같은 느낌이었죠.

그런데 왜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따라가지 않았을까요?  분명 할머니 역시 할아버지를 많이 사랑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에요.

‘할머니, 궁금한 게 있어요.’하고 한 계집애가 할머니에게 물었어요. 할머니는 그 날도 재미있는 얘기를 많이 해주셨지만, 이상하게도 늘 재미있던 얘기들이 그날은 오히려 할머니의 한숨보다 재미있지 않았어요.

‘뭐가 궁금하니?’

‘한쪽 눈은 나쁜 사람들 때문에 잃어버리셨다고 했죠? 그럼 업보라고 했던 그 다른 쪽 눈은 어떻게 잃어버리신 거예요?’

‘난 또 뭐라고.’ 할머니가 자애롭게 웃으셨어요.

‘그건 말이다......설명하기가 좀 힘들구나.’

‘말할 수 없나요?’

‘말할 수 없는 건 아니지. 그래, 간단히 설명해 주마......내가 병을 핑계로 자리에 누워 있으며 어떻게든 결혼을 피하려 기를 쓰긴 했지만, 왕실에서 결혼하여 아이를 낳지 않은 여인은 여인으로서의 대접은커녕 사람으로서의 대접조차 변변히 받을 수 없었단다. 왕은 몇 번이나 진노하며 나를 여느 다른 사내의 후궁으로라도 들이려고 애를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마침내 왕은 내게 말했지. 왕이 맺어주는 사내와 혼인을 하든, 아니면 한쪽 눈을 내놓든 결단을 내리라고 말이다. ’



쉽지는 않았다. 공주의 신분이었기에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나의 영혼의 자유, 정처없이 떠돌던 나의 부박한 예술혼은 그 혼의 주인인 나에게서조차 박대를 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눈은 나의 보잘것없는 생을 펼쳐 보이기에 꼭 필요한 것이 아니었느냐. 도대체 눈 없이 무슨 그림을 그리며 무슨 시를 짓는단 말이냐. 그러다 때마침 왕이 한 장군에게 나를 후궁으로 들일 것을 제의했고 장군 역시 왕가와 돈독한 관계를 맺고저 이에 응했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나는 마침내 각오를 하고 왕 앞에 나아갔다. 출궁하겠노라고, 궁을 나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노라고. 내 예상대로 왕은 진노했고 내 앞에 벌건 인두를 가져다 놓기까지 했으나 몸부림치며 우는 내 눈에 그걸 가져다 대지는 못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공주라는 신분을 벗어던지고 천하디천한 짐승처럼 목놓아 통곡하던 그 순간, 갑작스럽게 이 생에서 보고 듣고 느꼈던 모든 것이 허상이 되어 버리는 허탈함의 극치에 이른 듯했다. 다른 여인네들이 마땅히 누리는 그 모든 쾌락을 나라고 어찌 누리고 싶지 않았겠느냐. 다만 나는 스스로에게 만족하지 못했던 것이다. 스스로에게 만족하지 못하였기에, 고통의 극한으로 자신을 내몰고 거기에서 쾌락을 느꼈던 것이다. 대체 내가 이러한 피를 어디에서 물려받았겠느냐. 나는 다시 절을 찾아갔다. 오색치마 대신 회색 법복을 걸치고 엎드려 울면서 빌었다. 그러나 내가 무엇을 그렇게 지극히 빌고 있는지 나 자신은 몰랐다. 그렇게 밤낮 없이 부처님 앞에 앉아 불공을 핑계삼아 홀로 무아지경을 헤맨 지 삼 년이 지난 어느 날, 나는 한 쪽 눈이 잘 보이지 않음을 깨달았다. 손을 뻗으면 분명히 잡혀야 할 꽃들이 잡혀주지 않았고 길을 걸으며 허위허위 비틀거리기 일쑤였다. 마침내 나는 스스로를 괴롭힌 댓가로 소중한 것을 잃었음을 알았다. 또한 소중한 것을 잃은 그 순간에, 내 앞에 펼쳐질 또 다른 생의 아픔을 보았다. 나는 깨달았다. 고통스러워도, 고통스러워도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너희들이 쓸데없는 것을 알려 하는구나. 이제 집으로 돌아가렴. 나중에 더 재미있는 얘기를 해 주마. ’

아이들은 생각보다 불만족스러웠던 그 날의 얘깃거리에 대해 시시해하며 돌아갔지만 저는 그럴 수가 없었어요. 아무래도 그 할아버지가 마음에 걸렸거든요. 저는 다른 모든 아이들이 제각각 흩어지고 난 후에도 할머니의 곁에 서 있다가 이윽고 지팡이를 짚고 일어서서 걸어가시는 할머니의 뒤를 따라갔어요. 몇 걸음을 걸었을까. 할머니가 갑자기 지팡이를 멈추시고 천천히 제 쪽으로 몸을 돌리셨어요.

‘넌 왜 돌아가지 않고 날 따라오는 게냐?’

두 눈을 감은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은 인자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었지만 제 눈에 얼핏 다른 얼굴이 비친 것 같았어요. 주름이 없고 매끈한 얼굴, 온화하지만 수심에 가득한 낯빛을 한 공주의 얼굴 말이에요. 저는 그만 할머니에게 이렇게 묻고 말았어요.

‘왜, 왜 할아버지를 따라가지 않으셨어요? 할머니는 눈이 안 보이셔서 모르셨겠지만, 할아버지는 정말로 할머니를 데려가려고 울면서 할머니께 지극히 빌었단 말이에요!’

도대체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라고 내가 할머니께 그런 걸 물어본 걸까요? 할머니는 잠시 무척 당황하신 것처럼 입술을 떠셨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으시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셨어요. 아마도 제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느끼신 게지요.

‘얘야. 진정하거라. 비록 눈은 보이지 않는다만, 나도 다 안다. 그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이제는 다 알아. 하지만 너무 늦게 깨달았어. 그게 죄야. 너무 늦게 깨달아 버린 것이.’

‘지금이라도 함께하실 수 있어요!’

‘그래. 그럴 수 있지. 하지만, 지금의 눈먼 나는 그에게는 짐이 될 뿐이란다. 그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 그래, 얼마간은 행복하겠지. 하지만 행복은 항상 다른 손에 꼭 그만한 고통을 쥐고 찾아온단다. 이별과 다른 여러 가지 고통이 또 그와 나를 힘들게 할 거라는 걸 나는 안다.’

할머니는 잠시 한숨을 내쉬고 다시 말씀하셨어요.

‘남은 생이 얼마 남지 않았어. 그도 나도 마찬가지지. 짧은 행복이나마 누려보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다만, 그래. 아가. 나는 아직 공주란다. 비록 공주의 신분을 잃은 지 반백년이 넘어버린 지금에 와서도, 아직 이 가슴 속에서 타오르는 불은 나를 쥐고 놓지 않는구나. 그 먼 옛날, 아니 앞이 보이지 않는 지금에도 어제처럼 느껴지는 옛날에, 천신(天神)을 혹하게 한다는 그림과 저 멀리 중국의 사신들조차 감탄하게 하는 명문장가로 이름을 두루 떨친 어란주. 그러나 워낙 사람을 피하며 몸을 숨기고 지내 실제의 존재 여부조차 의심을 사고 종래에 전설처럼 남아버린 무약공주 말이다. 그 공주의 넋이 나를 아직 잡고 있구나. 이렇게 늙고 추해진 모습으로는, 사랑하는 이에게 갈 수 없노라고.’

‘할머니는 바보예요!’

전 정말이지 옛날이야기 할머니를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그토록 할아버지를 사랑하면서, 왜 할아버지에게 갈 수 없다는 걸까요? 저는 그만 돌아서서 뛰어가 버렸어요. 길에 나앉은 조약돌이며 자갈돌을 있는 힘껏 걷어차면서 말이죠.



그로부터 또 달포가 지나고, 다시 달포가 지나고, 또 다시 달포가 지났어요. 저는 더 이상 옛날이야기 할머니를 찾지 않게 되었어요. 그 대신 아버지를 도와 소에게 여물을 먹이고 밭일을 하고. 글방에서 스승님이 주신 당대의 고서를 읽기 시작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대낮부터 책을 뒤적이던 제 앞에 저보다 세 살 아래인 남동생이 헐레벌떡 뛰어들었어요.

‘형, 그 얘기 들었어?’

‘무슨 얘기?’

‘옛날이야기 할머니가 떠났대.’

갑자기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어요.

‘언제?’

‘몰라. 조금 전에 골목에서 들었어. 한 식경쯤 전에 할머니가 우물가에서 애들한테 그랬대. ’이제는 내가 떠날 때가 된 것 같구나. 얘들아. 그동안 고마웠다. 내가 없어도 너무 섭섭해하지 마라. 시간이 약이니. 이별은 금세 잊혀진단다.‘ 그러더래?

드디어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따라가기로 결심한 걸까요? 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무작정 옛 우물터로 내달렸어요. 왠지 할머니를 만나야만 할 것 같았어요. 또 왠지 만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구요. 할머니가 우물가에 계시지 않는 걸 안 저는 재 너머로 가는 길이 이어지는 뒷산을 향해 힘껏 뛰었죠. 역시 제 예상대로 할머니는 느린 걸음으로 걷고 계셨고, 그래서 아직 제 발이 미치지 못하는 곳까지는 가지 못하고 계셨어요.

‘할머니, 어디로 가세요?’

할머니는 등에 조그마한, 아주 조그마한 봇짐을 이고 계셨어요. 담웅이구나, 왜 그 동안 할머니에게 안 왔니, 이런 말씀을 하실 줄 알았는데 할머니는 다만 고개를 흔드시며 이렇게 말씀하실 뿐이었어요.

‘글쎄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는 나도 모르겠구나.’

‘할아버지는요? ’

‘그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얘기하지 말거라.’ 주름지고 쪼그라든 얼굴을 한 할머니가 괴로운 듯 말씀하셨어요.

‘이미 다 안다고 하지 않았니. 지금으로부터 몇십 년도 더 전에, 나는 보았단다. 그와 나의 운명을. 그와 나는 이승에서 맺어질 인연이 아니란다. 너는 이제 내가 누구인지를 아느냐?’

‘그럼요......공주마마.’

마지막 ‘공주마마’라는 말은 입속에서 맴돌 뿐이었지만, 그래도 저는 그렇게 대답해 드렸어요. 할머니는 잠시 웃어 보이시고는 다시 뒤돌아서서 느린 걸음으로 걸어가셨어요. 할머니를 다시 붙잡을까도 생각했지만, 할머니의 웃음에서 옛날 불에 탄 뒷산 절에서 본 그슬린 부처님의 미소가 보여서였을까요. 저는 더 이상 할머니를 잡을 수 없었답니다.



―다음 뉴스입니다. 충남 대둔산 부근에서 골프장 확장 공사를 하던 인부들이 삼국 시대의 인물로 추정되는 여성의 미이라를 발굴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김의석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어제 저녁 일곱시 사십분 경, 막바지 착굴 작업을 하던 포크레인이 땅을 파던 중 둔탁한 바위가 나타났습니다. 이 바위 아래 다름아닌 옛 삼국 시대의 미이라가 숨어있었던 것은 인부들로서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아유, 깜짝 놀랬지유. 삼베에 둘둘 말려있었는데 그게 썩지도 않고......자세한 것은 방사성 동위원소를 이용해 연대 측정을 해 봐야 알겠지만, 현재로서는 삼국시대의 백제 여성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국내에서 발견된 미이라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머리카락과 이가 그대로 남아 있을 정도로 상태가 양호하여 추후 고고학계의 보물이 될 것으로 기대되는 미이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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