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스Ⅰ-10

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

by Kalsavina

# 10


사실 그 질문을 입 밖으로 던지기 전에 민효는 벌써 그 물건의 정체에 대해 정확하게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이 현실로 드러났을 때 그녀는 자신이 그렇게도 침착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스스로를 대견스러워했다.

“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입니다.”

민효가 할 말을 찾는 동안 식당 문간에서 거실을 죽 지켜보던 진호는 은하에게 손가락을 귀 근처에 갖다대고 돌려 보였다. 저 사람 미친 게 아니냐는 뜻이었다. 그는 영문도 모르고 그저 여자친구의 뒤를 따라왔다가 자신이 처한 이 아리송한 상황에 대해 얼마쯤 짜증이 나 있었다. 그러한 짜증은 이내 은하에게도 전염되었지만, 친구와 난데없는 불청객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그녀는 짜증보다는 호기심을 더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주사위 같겠지만, 그런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믿고 싶어하는 사람들만이 믿겠지만......”

“잠깐만요. 그 주사위라는 건, 윤이가, 그러니까 강윤이 몇 주 전에 길에서 죽어가는 사람한테 받은 그, 주사위를 말씀하시는 거지요?”

남자는 놀라움의 표시로 입을 벌려 보였는데 다분히 과장된 표현이었다.

“맞습니다. 아, 강윤 군께 얘기를 다 들었군요?”

민효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너무나 느려서 얼핏 보기에는 그저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녀는 분명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아니오. 이미 그 기억은 복사되어 제게로 들어온 걸요.

“너 이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겠니?”

놀라움과 황당함이 뒤섞인 은하의 목소리가 민효에게 명확한 분별력을 일깨워주었다. 그녀는 하마터면 옆에 있는 친구들을 망각한 채 눈 앞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남자와 본격적인 회담에 나설 뻔했던 것이다. 민효는 친구에게 자신이 이해하는 것들을 애써 설명하지 않기로 했다. 매우 적절한 판단이었다.

“아, 그러니까.......우연찮게 이 사람 물건이 실수로 강윤 손에 들어왔어. 윤이가 전에 나한테 말해줬는데 잊고 있다가 이제 저 사람 말을 듣고 생각해낸 거야. ”

선글러스를 낀 남자는 빙긋 웃었다. 그는 민효의 임기응변 뒤에 감추어진 진의며 숨은 상황을 모두 이해하고 있었다. 적어도 민효는 그렇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주사위를 돌려받으러 오셨군요?”

“그렇습니다만.”

진퇴양난이다. 민효는 강인을 생각했다. 그걸 강인에게 준 게 잘못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하찮은 물건이라 해도 내가 잃어버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으니, 그는 분명 주사위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깟 부탁 하나 못 들어줄 정도로 변하지는 않았다. 강인에게 지금이라도 전화해서 주사위를 돌려달라고 해야 할까? 민효는 자신이 이 낯선 남자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그 주사위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달았다.

“곧 강윤이 올 거예요. 커피 한 잔 드릴까요? ”

“주신다면 감사히 먹겠습니다.”

민효가 거실을 떠나 부엌으로 들어가니 은하와 진호가 황망한 표정으로 그녀를 맞이했다.

“도대체 저 사람 뭐야? 느닷없이 나타나서는 강윤을 만나자고 하질 않나, 뭘 달라고 하질 않나. 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 대체 그게 뭔데?”

“아까 말했잖아. 실수로 저 분 물건이 우연히 윤이 수중에 들어왔다고. ”

“강윤은 언제 온대?”

“오고 있는 중이겠지. 저 사람은 강윤이랑 무슨 관계야?”

“아무 관계도 아닐 거야.”

“우리가 직접 물어볼까?”

은하의 말에 진호는 고개를 내저었다. 만일 그 순간 민효나 은하가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보았다면 아마 배를 쥐고 웃었을 것이다. 이미 저 정체불명의 선글러스 남자를 마피아라 단정지어 버린 진호는 그가 강윤에게서 10그램 코카인을 건네받는 광경을 상상하고 있었다. 영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지만 그는 자신의 상상을 쉽게 떨쳐내려 하지 않았다. 민효는 뜨거운 헤이즐넛 커피가 담긴 잔을 들고 다시 거실로 들어갔다. 진호와 은하 역시 다시 거실로 들어왔다. 두 사람은 낯선 남자에게 적대적인 눈길을 보냈지만 그는 태연했다.

“실례지만 그 옆에 아이는 댁의 아이인가요?”

“아니오. 그게......말씀드리기가.......”

“강윤 아기죠? 그렇죠?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애 엄마는 어디 있어요? 뭐하는 여자에요?”

"은하 너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해? 저렇게 큰 아이가 어떻게 윤이 아기일 수가 있어? 알아보지도 않고 아무렇게나 말하면 어쩌자는 거야? 나중에 강윤이 널 명예훼손죄로 고소하면 어떡할래?“

진호가 다소 심한 면박을 주었기 때문에 은하는 뾰로통해졌다. 민효는 사태를 수습하고자 아이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참 얌전하군요. 이렇게 얌전한 아이는 처음 봤어요. 안아봐도 될까요?”

선글러스 남자는 커피만 홀짝거릴 뿐 대답이 없었다. 은하는 용기를 내어 희고 보송보송한 어린아이의 볼을 손가락으로 찔러 보았다. 아이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은하를 빤히 쳐다보다가 갑자기 손을 내밀었다.

“어머 귀여워.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가벼울 수가 있지?”

민효는 아무래도 진호와 은하가 있는 한 이 아기를 데려온 선글러스 남자와 제대로 대화할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은하가 아기를 안아들고 어르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주의가 아기에게 쏠리는 통에 민효는 선글러스 남자와 대화하기가 한결 편해졌다. 민효가 낯선 남자와 둘이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을 눈치챈 진호는 TV를 켠 후 부엌으로 들어갔다. 쇼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코미디언의 다소 듣기 거북한 웃음소리가 적막한 허공을 잠식했다. 선글러스 남자가 커피를 식히는 동안 민효는 곁눈질로 그를 보며 자신이 그에게서 알아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를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실례지만, 여러 가지 궁금한 점이 많군요.”

“예. 무엇이든지 물어보십시오.”

“그 주사위가 댁의 것이 아니라면, 원래 누구의 것이죠? 그리고 그걸 강윤이 가지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아셨어요?”

선글러스는 다소 겁을 먹은 공손한 태도로 커피를 홀짝홀짝 마셨다. 그러는 동안 어느 새 은하는 아기를 안아 어르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남자는 은하가 안고 있는 아이에게로 잠시 눈을 돌렸다가 차분한 태도로 대답했다.

“첫번째 질문에 대답해 드리자면, 그 주사위의 주인은 저 아이입니다. 두 번째로, 그날 강윤 군이 담당자에게서 주사위를 받았을 때 그의 뒤를 밟았습니다. ”

“믿을 수 없어요.”

“믿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어차피 과학적으로 증명할 길이 없는 현상에 대해서는 믿거나 말거나 두 가지 선택밖에 할 수 없지요. 제가 돌려받아야 할 주사위만 해도 그렇지요. 그 주사위가 기억을 복사한다는 사실을 증명할 만한 과학적인 근거는 어디에도 없거든요. 믿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믿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믿지 않을 겁니다. 강윤 군이 아가씨께 이 주사위를 어떻게 해서 얻었는지 설명하지 않았던가요?”

“안 했어요. ”

“그런데도 주사위 담당자가 죽은 걸 아셨군요.”

“윤이에게 주사위를 준 사람이 주사위 담당자인가요?”

“그렇습니다. 본래 그 주사위는 주인이 없지요. 다만 일정 기간 동안 그 주사위를 맡아 가지고 있는 담당자가 있을 뿐이지요. 아무튼 놀랍습니다. 이런 곳에서 그 주사위의 진가를 아는 사람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주사위 담당자가 강윤 군에게 주사위를 맡기기로 결정한 건 실수가 아니었어요. ”

“그럼 그 주사위는 윤이 건가요?”

“지금은 그렇습니다. 하지만 오래 가지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저는 다음 주사위 담당자가 나타날 때까지 그 주사위를 보관해야 하니까 강윤 군에게서 그 주사위를 돌려받아야 합니다.”

은하는 TV볼륨을 한껏 높였다. 진호는 부엌 문틀에 기대어 건성으로 TV에 시선을 보내면서 이따금 미심쩍은 듯 민효와 정체불명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너무 이해하기 힘든 말씀을 하시는군요.”

“반드시 이해하셔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

은하가 갑자기 반색을 하며 일어서더니 현관 쪽으로 달려나갔다. 용케도 현관문에 매달린 종이 딸랑거리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곧이어 은하를 옆으로 밀치다시피 하며 강윤이 들어왔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민효에게 시선을 고정시켰고, 그 다음으로 자리에서 일어선 진호와 낯선 남자를 쳐다보았다. 어린애는 소파 등받이에 가려져 강윤이 있는 곳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민효는 갑자기 당황했다. 나는 이 사람이 왜 강윤을 찾아왔는지 알지만 정작 당사자인 강윤은 영문을 모른다. 그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까?

선글러스 남자는 강윤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강윤은 약간 얼떨떨한 태도로 그 인사를 받았다. 곧이어 그는 진호에게 눈을 돌렸다.

“민효가 쓰러졌다며?”

“아냐. 내가 거짓말한 거야. 너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어서 오라고 부른 건데, 갑자기 장난이 치고 싶어져서 말이지.”

“그런 걸 가지고 장난치면 어떡해. 진호씨.”

진호는 강윤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강윤 역시 진호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자신을 속인 친구에게 화를 내는 것보다는 더 중요한 용건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강윤은 선글러스 남자에게로 눈을 돌렸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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