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
# 2
재차 말하지만, 그 주사위를 접한 사람들 사이에서 주사위 자체는 단 한번도 심각하게 논의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주사위 관리자(편의상 주사위를 가지러 왔던 선글러스 남자를 그렇게 지칭한다)가 그 주사위와 함께 맡긴 정체불명의 계집아이, 다 나이디(Da Naidy)에 대해서도 거의 논의된 바가 없다. 그녀에 대해서 아무런 설명을 하고서는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들을 이해하기가 불가능할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다 나이디에 대한 이야기로 서두를 시작해야 한다.
―그 아이의 왼손 손바닥을 봐. 왜 내가 그 아이를 다 나이디라고 부르는지 알 거야.
이것은 언젠가 민효가 강인에게 했던 말이다.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그가 냉동고를 그득하게 채우고 있던 아이스크림, 자신의 죄책감이 말소되지 않은 것을 보고 화가 나서 민효를 찾으러 갔다가 그녀가 다 나이디와 함께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다. 민효가 시키는 대로 그가 다 나이디의 왼손을 들여다보았을 때 그가 본 것이 무엇이었겠는가?
Da Naidy
바로 나이디의 이름이었다. 언뜻 보아서는 영어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그 이름을 다 나이디라고 발음한 것은 민효였다. 왜냐하면 목욕을 시키려고 발가벗긴 어린애의 손바닥에 감청빛을 띤 문신처럼 박혀 있던 그 글자를 처음 발견한 사람이 그녀였으니까. 그녀가 그게 어린애의 이름이라고 믿은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어떤 아름답고 이국적인 소설 속의 여주인공의 이름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실제로 은하는 나이디의 손바닥에 박힌 글자가 나이디의 이름일 리는 없다고 민효에게 말했지만, 민효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바다의 요정들의 이름을 은하에게 일러줌으로서 논란의 여지를 없앴다.
“너, 다나이드(danaide)라는 이름 기억해? 물론 그건 벌을 받아 나비가 된 요정을 가리키는 의미였지 어떤 특정한 사람의 이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글자와 비슷하잖아.”
다 나이디가 그 아이의 이름이건, 아니건 작명가가 아닌 은하는 어린애의 이름짓기에 친히 관여할 의사가 별로 없었다. 그리하여 누가 인정했다 할 것도 없이 그 아이의 이름은 다 나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름을 손바닥에 새긴 아이라니, 독특하지 않느냐’고 은하는 나중에 자신의 애인이자 디 아이 셀의 기타리스트인 김진호에게 말했다. 비록 그 독특한 이름을 불러 주는 사람이 민효 이외에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말이다.
그러나 이름보다 더욱 독특한 것은 그 이름의 주인, 즉 다 나이디 자체였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그 몸무게, 어린아이답지 않은 표정과 까만 눈. 그리고 조용한 태도. 민효는 다 나이디를 귀여워하기는 했지만 나이디가 어린아이 특유의 깨물어 주고 싶은 귀여움을 지녔기 때문에 그녀를 귀여워한 것은 아니다. 민효는 나이디가 자신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녀 자신도 어린 시절, 한 자리에 몇 시간이고 머물러 인형을 끌어안고 있거나 그림책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얌전한 아이였으니까. 그러나 나이디는 어린 시절의 그녀와 비교할 수 있는 아이가 아니었다. 나이디는 거의 자폐아에 가까웠던 것이다. 자폐아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처럼 조용하고, 그처럼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있으며, 그처럼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무관심할 수가 있단 말인가.
실제로 민효는 그녀가 자폐아일 가능성을 의심했었지만, 이내 코웃음을 치며 체념했다. 설령 자폐아라 한들 그게 어떻다는 거야? 그게 내 책임이 아닌 이상, 내가 신경쓸 이유는 없지. 그러니까 민효가 다 나이디를 자상하게 돌본 것은 사실이지만, 나이디가 여느 아이들처럼 시끄럽고 분탕질 치기 좋아하는 활달한 아이였다면 그처럼 자상하게 돌보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결국 그녀는 어느 늦은 초겨울 저녁 자신의 집에 들른 은하에게 자신의 견해를 조심스럽게 토로했다. 은하는 근심보다는 호기심에 어린 눈으로 나이디를 오랫동안 관찰했다. 나이디는 낡은 카펫이 깔린 마루에 앉아 꿈쩍도 않고 브라운관의 명멸하는 불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강인은 다 나이디에 대해 무관심했다. 하기야 늘 밖에 나가 있는 그로서는 다 나이디와 그리 자주 맞닥뜨릴 기회가 없었으므로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민효는 언젠가 다 나이디가 자신에게 맡겨지기까지의 자조치종을 강인에게 털어놓으려다가 그만둔 적이 있었다. 그녀는 창가를 서성이며 뇌까렸다. 강인은 아마 내가 베이비 시터 아르바이트를 새로 시작했다고 생각하고 있거나, 아니면 보육시설에서 어린애를 일정 기간 맡아 돌보는 봉사활동이라도 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 그녀는 거울에 자신의 목을 비추어 보았다. 목을 울긋불긋하게 물들였던 새파란 멍 자국의 가장자리가 누렇게 변했다. 상처가 아물어간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끈질기게도 오래 남아 버티고 있다. 이건 강윤이 찍은 낙인이야. 나는 이걸 없애지 못해. 그녀는 낙담과 체념이 뒤섞인 마음으로 강윤을 생각했다. 그 역시 나이디에 대해 무관심하긴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나이디의 손바닥에 적힌 글씨를 보고는 피식 웃을 정도의 여유를 보여 주었다. 게다가 너무나도 조용하고 연약하여 인형이나 다름없어 보이는 그 아이를 목에 올려 목마를 태우기까지 했다. 아버지가 딸에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반면 강인은 어땠던가. 다정하고 자상했던 그가 지금은 얼마나 무신경하고 몰인정한가. 몰인정하다는 표현은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면 뭐라고 할까. 그저 세상으로부터 등을 돌렸다고만 할까. 아니면 세상의 어떤 것도 그와 무관한 건가? 민효는 강인이 변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그러나 섬뜩한 기분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어린아이는 물론이고 이제는, 주위의 모든 것을, 그야말로 모든 것을 거부하려 드는 것 같아. 인이는 아무것도 내게 보여주지 않지만, 난 알 수 있어. 그애의 가슴 속에 있던 무거운 덤프트럭이 초고속으로 돌진하기 시작한 거야. 얼마 안 가서 그의 마음을, 그 가녀리고도 잔인한 영혼을 치어 버릴 테고, 그는 혼자 소리지르며 괴로워할 거야. 그래도 절대 나를 부르는 일은 없겠지. 민효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눈물이 날 만큼 세게. 그러자 눈물이 솟아났다. 그녀는 자신이 강인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