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
# 4
강인의 성대에 이상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그 말에 대한 민효의 입장을 구구절절이 표명하는 작업은 일단 뒤로 미루도록 한다. 다행히 용환은 나중에라도 자신이 강인을 병원에 데려가 보겠다는 말로 충격이 가져다주는 혼수(昏睡)의 나락에서 민효를 구해냈다. 그래서 민효는 자신의 무질서한 혼란은 접어둔 채 처음 약속대로 두 번째 용건에 대해 듣기로 했다.
“최근에 인터넷 검색 해 보았느냐고 물었는데, 그건 왜죠?”
“.......전에 진호하고 은하 씨한테 들은 말인데, 이상한 사람이 왔다 갔다고 들었어요. 그 사람이 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라는 말을 했다고 들었는데......”
“그래요. 그건 왜 묻죠?”
“최근에 인터넷에서 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를 찾는다는 광고를 보았어요. 별 것도 아닌 짧은 광고였는데 사람들 관심이 대단하더라고요.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도 모르고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도 아무도 모르더군요. 다만 남의 기억을 복사해서 그 주사위를 건네받는 사람들이 차례대로 여러 사람의 기억을 읽을 수 있다는 애매모호한 이야기만 들었어요. 그런데 은하 씨 말이.....”
용환은 잠시 뜸을 들이느라 말을 삼켰다.
“그 주사위, 민효 씨가 가지고 있을 거라고 했어요. 원래 강윤이 가지고 있어야 하는 건데, 그걸 민효 씨한테 줬을 거라면서.”
사실 그랬다. 민효는 어렵사리 그녀의 손에 되돌아온 주사위를 강윤에게 돌려주었지만 그는 오랫동안 그녀를 쳐다보다가 ‘그냥 네가 갖고 있어’라고 말했던 것이다. 주사위뿐 아니라 돈도, 그리고 어린 볼모(이런 표현을 써도 된다면)도 고스란히 민효가 맡고 있다. 민효는 그 이야기를 은하에게 숨기지 않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은하는 진호에게뿐 아니라 디 아이셀 멤버들이 다 모여 있는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떠벌렸을 것이 뻔했다.
민효는 고개를 돌려 얌전히 인형을 안고 카페트 위에 엎드려 있는 다 나이디를 가리켰다.
“그 이상한 사람이 말하기를 그 주사위의 진짜 주인은 저 아이라고 하더군요.”
분명히 나이디를 데려온 선글러스 남자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러나 전적으로 믿을 말은 아니었다. 자폐아로 추정된다는 사실만 제외하고는 흔하디 흔한 계집아이일 뿐이다. 아니지, 자폐증이 있는 어린애라면 오히려 저런 장난감이나 다름없는 주사위의 주인이 되기에 오히려 적합하지. 기억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떠넘긴다는 사실만 빼고는.
“그럼 제가 저 아이한테 이걸 빌려가도 되느냐고 물어야 된다는 겁니까?”
“말하자면 그렇죠. 그게 안되면 강윤을 불러서, 이걸 용환 씨한테 빌려줘도 되느냐고 물어볼 도리밖에 없어요. 내가 이걸 가지고 있긴 하지만 빌려줄 권한은 내게 없으니까.”
용환은 자리에서 일어나 카펫 위에 있던 다 나이디를 안아올린 후 그녀를 안고 다시 소파에 앉았다.
"꼬마 아가씨. 미안하지만 아가씨의 주사위를 내가 가져가도 되겠어요?"
"잠깐만요. 미안하지만, 용환 씨에게 왜 그 주사위가 필요한지 내가 아직 묻지 않았어요."
용환은 나이디를 팔에 안은 채 의아해하는 눈초리로 민효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이내 픽 웃으며 대답했다.
“그 주사위가 진짜로 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라면......거짓말, 살인, 강간, 아니 설령 그게 선의의 거짓말, 정당방위, 화간이었다고 해도, 어쨌든 은폐된 사실을 헤집을 때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지 않겠어요?”
“그렇죠. 그래서 그런 의도로 그 주사위를 악용한 결과 실제로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었고요.”
용환은 이 말을 못 들은 체하기로 작정한 것이 틀림없었다. 다 나이디를 안은 채로 그녀의 볼을 꼬집기도 하고 손가락으로 간질이기도 하며 어르느라 근 5분여 가량의 시간을 소비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나이디를 내려놓은 그는 천장을 향해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어떤 사람의 기억을 알고 싶어서 그 주사위를 필요로 하는 거예요. 그 사람을 아주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는데, 최근에 다시 만났죠. 무척 미워했던 사람이었어요. 내가 미워할 만한 이유가 충분한 사람이었어요. 그는 내게 진실을 얘기한다고 하지만 나는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던 거죠.”
“하지만 그 주사위는 우리가 원하는 기억을 선택해서 보여주지 않아요. 누구의 기억인지 헷갈릴 정도로 불확실하고 극히 단편적인 기억의 일부만 보여줄 뿐인걸요. ”
그러나 강윤은 자신의 손을 거쳐간 주사위를 통해 자신의 거짓말을 금세 알아차리지 않았던가. 그건 그렇다 치고 내가 다시 한 번 이 주사위를 남의 손에 맡긴다는 게 과연 옳은 걸까. 용환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유감이지만, 그래도 내겐 그 주사위가 필요해요. 만약 내가 간절히 원한다면 내가 원하는 기억을 보여줄 거라고 생각하니까. 사실 내가 읽고 싶어하는 기억은 바로 내 기억이니까.”
“뭐라고요? 자신의 기억을 자기가 보고 싶어하다니 그런 말이 어딨어요?”
그러나 민효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영리했으므로, 비록 말은 그렇게 했을지언정 용환이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쉽사리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뇌에 응당 입력되어 있어야 하는데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어떤 사건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는 그 기억을 잊어버렸거나, 아니면 사실과는 전혀 다른 왜곡된 기억을 뇌에 저장해 두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녀는 최대한 간결하게 자신이 짐작한 바를 용환에게 들려 주었고 용환은 입을 약간 벌려 감탄을 표시했다.
“정확해요. 나는 분명히 a였다고 기억하는데, 실제로 확인한 결과 b가 옳았다는 그런 식이에요. 민효 씨가 그걸 이해할 줄 몰랐어요.”
“내게도 비슷한 일이 있었으니까.”
“비슷한 일이라고요?”
“예. 하지만 용환씨가 말하는 것과는 좀 틀린 경우에요. 나는 어느 쪽이 맞는지 알 수 없어 갈팡질팡한 거니까. 확신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요. 이를테면 이런 거죠. 오래 전에 어떤 친구와 농구 시합을 했는데, 그 친구가 3점 슛을 넣어서 아쉽게 졌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 친구가 까까머리 중학교 동창이었는지 아니면 더벅머리 고등학교 동창이었는지 전혀 생각이 안 난다. 뭐 이런 거죠?”
용환은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그런 것과도 좀 달라요. 사람의 행동은 하다 못해 지금처럼 커피잔을 잡는 이런 상황에서도 열 가지 서른 가지의 의미를 갖는 법이잖아요. 나는 그런 의미들 가운데서 지금 내 머릿속에서 삭제된 의미를 복원하려고 하는 거예요. 어떻든 민효 씨가 내 말을 이해해 줘서 정말 고맙게 생각해요. ”
“그렇다고 해도 주사위를 빌려 주는 건 별개의 문제예요.”
이 때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용환이 내려놓은 상태 그대로 카펫 위에 앉아 있던 다 나이디가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민효를 향해 걸어온 것이다. 용환은 다 나이디를 못 본 것인지 아니면 보고도 못 본 척한 것인지 간곡하게 민효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어릴 때 본 어떤 숫자를 기억해내지 않으면 안 돼요. 그건 내 사랑, 내 원한, 내 복수와 관련된 것들이니.”
민효가 눈살을 찌푸렸고, 그와 동시에 다 나이디는 민효의 무릎에 자신의 손을 가져다 댔다. 그제서야 민효는 잊고 있던 사실을 생각해내고 웃으며 말했다.
“참 이상해. 전에 그런 얘기 들은 적 있어요? 이 아이 손바닥에 이 아이 이름이 씌어 있다는 이야기, 들은 적 있어요? 은하나 진호씨가 그런 얘기 안해요?”
그렇게 말하며 거듭 소리내어 웃으면서 민효는 용환이 쪽으로 다 나이디의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다 나이디의 이름은 왼손에 새겨져 있었지만, 왼쪽 손을 재빨리 분간해내지 못했던 민효는 무의식중에 다 나이디의 양손을 모두 펼쳐 보였다. 순간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의자에 앉은 상태에서 상체를 뒤로 젖히며 입을 막았다. 용환 역시 그녀의 그런 반응에 놀라며 나이디의 손바닥을 쳐다보았다.
나이디의 이름은 전과 다름없이 왼손 손바닥에 그대로 새겨져 있었다.
Da Naid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