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
# 5
문제가 된 것은 나이디의 왼손 손바닥이 아닌 오른손 손바닥이었다. 여기에서 명심해야 할 것은, 몇 번이나 나이디를 목욕시키고 옷을 갈아입혔던 민효가 나이디의 몸 구석구석 어느 곳 하나 살피지 않은 곳이 없다는 점이다. 그런 그녀가 나이디의 깨끗한 오른손 손바닥을 살피지 않고 지나쳤을 리 만무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순간 나이디의 오른손 손바닥에 씌어진 글의 의미를 그녀가 얼른 알아채지 못한 것도 당연한 것이다.
원하는 사람에게 원하는 기억을.
민효와 용환 두 사람 모두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다 나이디, 이제 겨우 네 다섯 살이나 될까말까한 어린아이의 손바닥에 씌어진 글자임에 틀림없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 다소 황당무계하고 지리멸렬하며 게다가 길기까지 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사람의 난처하기 이를 데 없는 입장이다. 적어도, 매번 벌어지는 비정상적인 상황을 접하는 정상적인 사람들의 반응을 진부하지 않게 설명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작업이다. 따라서 민효와 용환이 뜻하지 않은 나이디의 의사를 상상도 못한 방법으로 전달받았을 때 그들의 놀라움을 설명하는 것 역시 어렵다. 일단 두 사람은 그 글씨를 뚫어져라 노려보았고, 서로를 마주보았으며, 그 다음에는 항상 난처한 상황을 무마시키려는 사람들이 흔히 터뜨리는 너털웃음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터뜨렸다. 일단은 그 정도로 그들의 반응을 정리하도록 한다.
민효는 눈가에 손을 가져다 댔다. 자신도 웃음이 나왔지만, 자신이 왜 웃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한참을 웃었기 때문에 뭔가 어리둥절했다. 반대로 용환은 매우 침착하고 온화한 표정으로 민효를 쳐다보고 있었다. 민효는 용환의 표정이 생각보다 밝은 것을 보고 안심하면서도 다소 신기해하며 그에게 질문했다.
“이제 마음놓고 주사위를 빌려갈 수 있군요? 주사위 주인이 허락을 했으니.”
“그래요......민효 씨. 내가 이 아이에 대해 은하 씨한테 말을 많이 들었지만, 실제로 본 것과는 느낌이 다르군요. 은하 씨는 그저 얌전하고 평범한 꼬마처럼 이야기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이 아이를 잠깐이나마 계속 지켜보면서 생각했는데, 오래 전에 tv에서 본 네팔의 아기 여신 생각이 나더군요. 그런 느낌이에요. ”
“네팔의 아기 여신이라고요?”
“그래요. ‘꾸마리’. 혹시 들어 본 적 없어요?”
“꾸마리?”
―꾸마리. 네팔에 추앙받는 소위 살아있는 여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대개 꾸마리는 혈통이 좋고 건강한 계집아이들을 선발하여 여러 가지 시험을 해서 그 시험에 통과하는 아이를 추대하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태어나 네 살 가량 된 계집애들을 대상으로 하는데, 시험으로는 사나운 맹수와 하룻밤을 가둬두는 시험이 흔한 모양입니다. 여하간 여신으로 추대된 꾸마리는 왕은 물론이고 모든 네팔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살지만 초경을 시작하면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새 꾸마리를 모시는 거죠. 일단 꾸마리였던 여인은 그 자리를 물러나고 난 후에도 결혼을 못하고 혼자 살아야 한다고 하던데 자세한 건 모르겠고요. 여하간 첫 생리를 하면 쫓아내야 할 정도라니 꾸마리의 나이가 얼마나 어려야 하는지 짐작할 수 있겠죠? 적게는 세 살. 많게는 열 두어 살 정도로 보는 게 맞겠죠.
“전에 텔레비전에서 보았는데, 흥미로웠던 내용이라 그런지 기억하고 있었어요. 이 아이. 정말 그때 얼핏 본 꾸마리와 상당히 비슷한 느낌이에요.”
“난 꾸마리라는 게 있는지도 몰랐어요.”
“민효씨답지 않은데요. 그처럼 박학다식한 분이 꾸마리를 몰랐다니. 아니 이건 아주 특이한 종류의 잡학다식이니 뭐 몰랐다고 해서 문제될 건 없겠지만요.”
“아니에요. 가르쳐 줘서 고마워요. 그런 게 있는 줄 진작에 알았더라면 내가 개인적으로 알아보았을 텐데.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이 아이 이름에 대해서만 생각했었어요. 이 아이 이름이 그리스 신화의 다나이드에서 따온 것이 아닌가 하고요.”
“제법 설득력 있는 견해로군요.”
이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대화는 갑자기 끊겼다. 그와 동시에 찌부둥한 날씨 탓에 낮인데도 불구하고 켜 놓았던 형광등 불빛이 조금 어두워지면서 그들을 둘러싼 공기의 명도가 조금 더 짙어졌다. 민효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주사위를 가져올게요.”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던 주사위를 꺼내는 동안 민효는 잠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만약, 용환에게 주사위를 건네는 과정에서 불필요한 자신의 기억들, 더구나 결코 알리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 전달된다면? 혹은 그 기억들이 강인, 혹은 강윤, 혹은 유경의 것이라면? 만약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면, 나는 이용환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을까? 적어도, 적어도 내가 한 그 많은 거짓말들, 그것들만은 전달되지 않기를, 복사되지 않기를, 차단되기를.
그러나 민효가 주사위를 건넸을 때, 그녀는 자신이 결코 예측하지 못했던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고 말았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빠른 시일 내에 꼭 다시 돌려주겠다며 주사위를 받아든 용환의 얼굴이 한순간 일그러졌다. 그녀는 그에게 어떤 기억이 전이되었음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누구의, 어떤 기억?
“민효 씨. 미안하지만........본의 아니게, 민효 씨의 기억을 읽었네요. 아니, 이건 민효 씨 기억이 아니군요. 강인 건가요? 강인 것도 아니군요. 도대체 누구의 기억이지?”
“뭐가 기억나요?”
일단 주사위를 통해 남의 기억을 전달받으면 그 기억이 마치 자신의 기억인 양 홀연히 떠오르는 양상을 보인다는 것을 민효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용환에게 ‘어떤 기억을 받았어요?’라고 묻지 않고 ‘뭐가 기억나요?’라고 물었던 것이다.
“이 집에 관한 거군요. 그렇다면 적어도 세 사람 중 한 사람의 기억이겠군요. 강인도 민효 씨도 아니라면, 강윤의 기억인가요? 민효 씨. 혹시 2층에 있는 거실에, 쇠로 된 다리가 달린 보라색 꽃무늬 소파가 있나요? 아주 크군요. 3인용 소파에요.”
“네. 있어요.”
갑자기 민효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보라색 소파? 강윤이 그 보라색 소파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건가? 그건? 그건 뭐지? 갑자기 그녀는 자신이 기억해내서는 안 될 일을 기억해내야만 할 것 같은 불길한 조짐에 휩싸였다.
“벽에 소파를 붙여 놓았군요. 그런데 그 소파를 다른 곳으로 치웠군요. 그 자리에........말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피가 흥건하게 고여 있군요. 거의 소주 한 병을 다 엎질렀을 정도로 많은 양이네요. 그게 전부예요. 내가 받은 기억이 정확한가요?”
“그래요. 그 소파, 지금도 2층에 그 자리에 그냥 놔두고 있어요. 아무도 앉질 않아서 천덕꾸러기 신세이긴 하지만.”
“그럴 리가요. 이건 그냥 느낌으로 전해져 오는 거지만, 뭔가 중요한 의미가 있는 소파 같군요. 비록 소파를 치우고 난 자리 바닥에 피가 있긴 했지만, 그 자리에서 누가 죽거나 다친 것 같지도 않고요. 뭔가 모르게 마음을 아프게 하는군요.”
용환은 부들부들 떨리다 못해 경련을 일으키는 민효의 두 손을 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