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
# 8
같이 술을 마시자고 하지 않나, 내가 보고 싶었다고 하지 않나, 뭔가 꿍꿍이가 있지 않고서야 이런 행동을 할 리가 없다. 그렇다면 무슨 꿍꿍이속인가? 점점 증폭되어 가던 강윤의 의혹은 그녀를 따라 1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모종의 공포로까지 발전했다. 그는 그녀를 따라 식당으로 들어갔지만 식당에는 온기라고는 하나도 없었고 음식 역시 없었으며 그렇다고 음식을 만들려던 흔적조차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강윤은 급기야는 그녀가 혼자 매일같이 집에 틀어박혀 있다가 드디어 미친 게 아닌가라는 상상마저 하기에 이르렀다.
“김치 찌개가 어디 있어?”
“지금부터 만들려고 했어.”
“너 지금 누굴 놀리냐?”
“그렇게 말하지 마. 너한테 전화는 일단 했지만, 뭐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서 우왕좌왕하다가.....”
“닥치고 갑자기 안 하던 짓 하는 저의가 뭔지나 말해.”
처음에는 고함을 지를 생각이었지만, 그의 입에서는 오히려 침착한 목소리가 나왔다. 말 그대로 그 침착함의 연장선과도 같은 침묵이 짧게 흘렀다. 갑자기 냉정함을 찾은 강윤과는 반대로 민효는 완전히 냉정함과 침착함의 화신이 된 듯 전혀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어설픈 손놀림으로 도마와 칼을 꺼내고 냉장고에서 돼지고기와 김치를 꺼냈다. 흐트러뜨린 머리를 핀으로 올려 묶고 앞치마까지 능숙하게 두르는 품은 정말로 요리를 시작하려는 사람의 그것이었다.
“우리 나이디는 어디에 있지? 아까 전에 보니까 텔레비전 옆에서 자고 있던데, 네가 좀 깨워서 데리고 올래? 아무래도 그 아이, 말은 안 해도 집이 너무 조용한 게 싫은가 봐. 항상 텔레비전 근처에서만 맴돌고, 텔레비전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서는 잠을 자려고 하질 않으니 말이야. ”
다 나이디, 그 아이는, 어쩌면 내가 본 또 다른 민효와 연관이 있을지도 몰라. 그녀는 강인을 상대로 이야기하는 민효가 아니었어. 거실에서 강인에게 말하는 민효와 식당에서 혼자 계란을 먹는 민효를 동시에 본 그 날의 일과 연관이 있을지도 몰라. 그날 민효는 그 아이가 처음부터 식당에 있었다고 말했고, 그렇다면 그날 내가 본 식당 안에서의 민효는 민효가 아니라......그러나 생각만 머릿속에서 이어질 뿐 말은 나오지 않았다.
강윤은 몸을 돌려 거실로 비척비척 걸어갔다. TV 근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애가 없어, 그는 식당으로 들어서며 중얼거렸지만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게 말했기 때문에 침을 두어 번 삼키며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 좀 더 큰 소리로 말했다.
“그 아이가 없어.”
“누구?”
“네가 데려오라고 했잖아. 다 나이디. 그 쪼그만 계집애.”
“난 데려오라고 한 적 없는데?”
“그럼 내가 잘못 들었단 말이야?”
“아마도.”
“어이 없네. 어느 쪽이 정신이 나간 건지 모르겠어. 너야, 나야?”
잠시 후, 슬리퍼 스치는 소리가 나고, 강윤의 등에 따뜻한 손과 뺨과 머리카락의 감촉이 느껴졌다. 이렇게까지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을 느낄 수 있었던 적이 없다. 축축하고 냄새나는 그 어두운 방에서, 억지로 그녀의 목을 붙잡아 입에 갖다 대었을 때도, 그 목은 이처럼 따듯하고 부드럽지 않았다. 아니 따뜻하고 부드럽긴 했지만, 진심으로 자신에게 온전히 열어준 그런 체온이 아니었다. 지금은 다르다. 자진해서 나를 등 뒤에서 끌어안지 않았나. 제아무리 그녀가 나를 불쌍히 여겼다 할지라도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다. 그러나 단순히 연민 때문에 한 행동이라면, 나는 주저 없이 이 손을 뿌리쳐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안 돼. 그러나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여느 때보다 더욱 가냘프고, 여느 때보다 이상하리만치 촉촉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도, 내가, 김민효라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