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스Ⅱ-9

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

by Kalsavina

# 9

이 말을 들은 순간의 강윤의 심정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신기하다’였다. 어떤 놀라움이나 충격보다 앞선 첫 번째 심경은 바로 신기하다는 감정이었다. 서커스단에서 공 위에 올라가 자유자재로 춤추는 삐에로를 보는 어린아이들이 느끼는 그 ‘신기한’ 놀라움 말이다. 강윤은 너무나도 신기했던 나머지 박수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박수를 치는 대신 자신의 등을 점령한 채 움직이지 않는 민효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최대한 애쓰며 되물었다.

“네가 김민효가 아니면 누구란 말이야?”

사실 민효에게는 엄연한 호적상의 본명이 있다. 민효라는 이름은 강태규 박사가 그녀에게 지어 준 이름이므로 민효는 본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그걸 따지자고 민효가 강인에게 구태여 자신이 누구인지를 다시 확인시킬 필요나 이유는 없지 않은가. 민효는 강윤의 등을 안았던 손을 풀고 그의 어깨를 잡아 그를 돌려 세우려 했다. 강윤은 순순히 그녀에게로 돌아서서 물었다. 그런데 그는 눈앞에 선 민효의 비논리적인 언행을 접하면서 아까까지만 해도 불쾌했던 기분이 깡그리 가시고, 뭔가 모르게 유쾌한 기분이 되어 있었다. 민효의 목소리에서 언제나 느껴지던 일종의 경계심 같은 것이 사라져서 그런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면 갑작스런 해요체의 경어 사용 탓일 수도 있다. 이런 기분에 남자들은 여자들에게서 존댓말을 요구하는지도 모르지. 이제 웃는 낯으로 그녀를 쳐다보는 그에게 민효는 자신의 왼손 손바닥을 내밀어 보였다.


Da Naidy


이 글자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강윤은 그녀가 의도를 모를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이라고 치부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장난기가 발동한 나머지 그녀의 뻔뻔스럽고도 엉뚱한 장난에 동조하려고 마음먹은 참이었다. 그러나 이 글자를 본 순간 그의 얼굴에서 미소는 사라졌다. 그 글자는 그에게 낯선 글자가 아니었다. 그는 언젠가 누군가 다른 사람의 손바닥에서 이 글자를 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게 누구였더라?

“기억 안 나요?”

따지듯이 묻는 민효에게 기억나지 않는다고 대답하려던 순간 그는 극적으로 그게 누구의 손바닥에 있던 글자인지를 기억해냈다.

“그 꼬맹이. 그 꼬맹이의 왼손에 있던 글자야. 그 꼬맹이 이름이야.”

“맞아요. 그녀는 그걸 보는 순간 내 이름이라는 걸 알았어요.”

“그녀라니? 그녀가 누군데?”

“김민효요.”

강윤의 기분이 몹시 이상해졌다. 전혀 생각도 못한 순간에 포르노 잡지의 한 장면이나 여자의 누드를 접했을 때와 비슷한 당혹스러움이 그의 머리를 쳤다. 이건 장난이 아니다. 자기가 자신의 이름을 남의 이름을 부르듯 말한다. 남을 가리키듯 자신을 가리킨다. 이러한 행위를 장난이라고 칠 여자가 아니다. 민효는 몹시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눈을 본 강윤은 흠칫 놀랐다. 그녀의 눈동자가 여느 때보다 훨씬 옅은 색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새까만 동공이 도드라져 보였다. 렌즈라도 낀 것일까?

“아직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어요?”

“아니, 아니. 모르겠어. 잠깐만, 이쪽으로 와.”

그는 무작정 거실로 나갔고 민효가 그 뒤를 따랐다. 저녁이면 으레껏 켜게 되어 있는 형광등에 장식용 샹들리에까지 켠 그는 환해진 불빛 속에서 그는 민효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녀가 콘택트렌즈 따위를 끼지 않는다는 사실쯤은 잘 알지만 그렇다면 저 투명하게 옅어진 눈동자 색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아무리 보아도 그 눈동자는 렌즈에 가리워진 눈동자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강윤은 민효의 왼손을 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이 잡듯 살폈다. 펜으로 쓴 글씨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문신이라고도 하기에도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 게다가 민효가 손바닥에 굳이 이런 문신을 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강윤은 명령조로 민효에게 말했다.

“볼펜 가지고 와서, 내 손바닥에 이것과 똑같이 쓸 수 있어?”

민효는 즉시 그의 명령을 따랐다. 강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잡고 그 위에 글자를 쓰려고 애쓰는 민효의 모습을 잠시 안쓰럽게 쳐다보았다. 이 내가 여기서 너와 이렇게 미친 짓을 하고 있어도 나는 이제 화나지 않아. 이렇게라도 내 손을 잡아주는 게 다행일 뿐이야. 강윤의 손바닥에 어설픈 알파벳이 삐뚤빼뚤하게 씌어졌다. 강윤은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자신의 손바닥을 들여다보다가 다시 민효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는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미소지었다.

“이제 알았어. 네가 그 꼬맹이로군?”

“맞았어요. 내가 다 나이디에요.”

“하지만 네가 왜 민효의 모습을 하고 있을까?”

“그 주사위 때문에요.”

“그 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 하지만 그 주사위는 사람의 기억만을 복사하잖아?”

“나 자신을 복사하기도 하죠.”

“이해 안 되는데.”

“그럴 테지요. 아마 설명해도 모를 거예요.”

민효, 아니 다 나이디는 강윤을 데리고 다시 2층으로 올라갔다. 그녀는 조용히 강인의 방문을 열었고 영문을 모른 채 나이디를 따라 강인의 방을 들여다 본 강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강인의 침대 위에 또 다른 민효가 누워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강윤과 나이디가 선 문쪽으로 돌아누운 채 입을 반쯤 벌리고 잠든 모습은 그의 눈 앞에 선 나이디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이거야말로 진짜 쌍둥이로군.”

“저 사람이 진짜 민효예요. 늘 나를 재우지 못해 안달을 했죠. 내가 자고 있는 게 그녀로서는 편할 테니까. 하지만 오늘은 내가 그녀를 재워 버렸어요. 어떻게 재웠는지는 묻지 말아줘요.”

“너, 지난번에 강인과 민효가 싸운 날, 식당에서 날 봤었지? 그때 넌 계란을 먹고 있었던가?”

“아하.”

나이디는 조용히 강인의 방을 물러나와 문을 닫으며 말했다.

“그때는 시기가 안 좋아서 당신에게 내가 누구인지 알리지 못했죠. 당신 형이 있었기 때문에.”

“도대체 어떻게 한 거지? 네가 어떻게 민효의 모습이 될 수 있지?”

“그 주사위는 내 인격을 누구에게든 옮길 수 있어요. 더 정확히 말해서, 나는 어떤 다른 사람의 인격을 빌리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당신이 본 진짜 다 나이디의 모습도 원래의 내 모습은 아니에요. 나는 그저 어린 여자아이, 그것도 자폐증이 있는 여자아이의 몸을 빌렸을 뿐이에요. ”

“그럼 너의 진짜 모습은 뭔데?”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미안해요. ”

갑자기 민효가 강윤에게 안기려 했으므로 강윤은 그녀를 피해 한 걸음 물러섰다. 그녀는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을 짓고 두 손으로 뺨을 감싸며 외쳤다.

“당신이 사랑하는 여자의 몸과 정신을 빌리면, 당신이 날 안아줄 줄 알았는데.”

“내가 사랑하는 여자인지 아닌지 네가 어떻게 알아?”

“그야 내가 주사위 담당자에게 끌려 여기 온 날, 당신이 여기 들어섰을 때 금세 알았는 걸요. 일부러 민효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썼잖아요. 게다가 그녀도 당신의 마음을 알고 있는걸요. 게다가 당신들 둘은.....”

강윤의 혼란스러운 마음의 틈새를 다 나이디의 한 마디가 날카롭게 비집었다.

“같이 자기까지 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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