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
# 10
그 얘기는 안 하기로 했다. 둘 다 깨끗하게 잊어버리기로 했다. 이 얘기를 이제 와서 다시 꺼냈다면, 그건 둘 중에 하나다. 민효가 미쳤거나, 아니면 민효가 정말로 김민효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었거나.
투명한 눈동자 가운데 떠오른 새까만 동공이 심술궂게 빛났다. 그제서야 강윤은 확실히 저 탈색된 눈동자의 소유자가 김민효가 아니라는 사실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당신이 들어왔을 때 내가 왜 저 소파에 앉아 있었다고 생각해요?”
민효는 살롱 한 켠을 점유한 소파를 가리켰다. 강윤의 눈에는 거대하고 흉물스러운 자신의 죄과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걸 치운다는 건 더 끔찍한 일이었다. 그걸 치웠다가는 저절로 그 뒤에서 벌어진 일들이 보일 것 같았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이 거기까지 닿지 않게 하려고 강윤은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다 나이디는 그런 그의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을 괴롭히려는 게 아니었어요.”
그녀는 강윤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진짜 민효는 지금껏 그 일을 잊어버리고 있었어요. 잊어버리려고 애쓴 게 아니라, 진짜로 잊고 있었단 말이에요. 당신 형이 그녀를 어떻게 설득했는지 몰라도 그녀는 자신이 당신과 잔 적이 없다고 믿고 있었어요. 불가사의한 일이에요.”
강윤은 황급히 눈을 비벼 눈물을 닦았다.
“말도 안 돼.”
수치와 슬픔을 감추기 위한 대사가 고작 ‘말도 안 돼’라니. 이런 바보가 있나.
“이제 곧 그녀가 깰 거예요. 시간이 없으니까, 자세한 얘기를 할 수는 없어요. 오늘 그녀가 전화로 당신을 부른 이유는, 자기가 지금껏 잊고 있었던 일을 갑자기 기억해냈기 때문이에요. 그 얘긴 아마 그녀가 당신에게 직접 하겠죠. 내가 당신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따로 있어요. 난 당신을 사랑해요.”
강윤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사랑한다는 말이 이렇게 소름끼치게 들릴 수도 있구나. 그것도 내가 꼭 그 말을 듣기를 바랬던 여자에게서 그 말을 듣고 있는데도.
“당신이 길에서 죽어가던 주사위 담당자를 도와 줬을 때, 그가 당신에게 주사위를 맡긴 걸 감사하게 생각해요. 그렇지 않았다면 만나지 못했을 텐데.”
다 나이디는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이제 곧 그녀가 깨어나면, 당신을 많이 괴롭힐 거예요. 그걸 막아 주고 싶었는데, 그러질 못해서 미안해요.......”
강윤은 난감하게 그녀를 지켜보았다. 훌쩍훌쩍 울던 그녀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다 말고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자신의 손등에 묻은 눈물을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그녀는 갑자기 자신의 옆에 선 강윤에게로 눈을 돌렸다.
어느 새 그녀의 눈동자는 본래의 검은 눈동자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지?”
“뭐?”
강윤 역시 덩달아 눈살을 찌푸렸는데,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보며 놀라는 모습은 서로의 눈에 다소 우스꽝스럽게 비칠 정도였다.
“난 네가 올라오는 걸 못 봤는데.....”
“못 봤다고? 네가 날 끌고 올라왔잖아?”
“내가?”
민효는 자신의 가슴을 자기 손으로 가리키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강윤은, 처음에는 갑자기 달라진 그녀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내 그녀의 말투가 경어체에서 반말로 바뀌었음을 깨달았다. 그렇군, 알았어.
“왼손 좀 잠깐 보여 주겠어?”
민효가 대답하지 않자 그는 민효의 왼손을 잡고 억지로 손가락을 폈다. 놀랍게도 그녀의 손바닥에 있던 나이디의 이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강윤은 놀란 나머지 그녀의 손바닥을 놓지 않고 계속해서 굵고 가는 그물망을 형성한 그녀의 손금만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민효는 잠시 후 강윤의 손을 뿌리쳤다.
“그만해. 손목 부러지겠어. ”
정말로 아팠는지 손목을 문지르는 그녀에게 강윤은 본격적인 용건을 제시했다.
“전화로 날 부른 건 네가 맞지?”
“그래.”
이미 민효의 말투는 아까의 다소곳한 말투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평소에 익히 구사하는 그런 친근한 말투와도 거리가 멀었다. 이건 화가 났을 때의 말투다. 갑자기 아까 다 나이디의 말이 생각났다. ‘그녀가 당신을 괴롭히려 할 텐데......’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네가 널 ‘그녀’라고 부르다니. 내가 널 사랑한다는 걸 네가 안다고 말하지 않고, ‘그녀가 안다’고 말하다니. 그건 그냥 장난이라고 해도 내게는 가혹해. 그런데다가 빌어먹을 장난도 아니야. 설령 이게 과학적으로 근거가 없다고 해도, 민효가 정신분열증에 걸렸거나 다중인격자가 되어 버린 거라면 그거야말로 큰일이지. 그러나 그 순간 아버지 강태규 박사의 후배인 신경정신과 의사가 떠올라 강윤은 황급히 생각을 멈추었다.
“할 말 있다고 했던가? 네가 급하게 날 찾았다는 건 알겠는데, 왜 찾았지?”
“물어볼 게 있었거든.”
되돌아오는 민효의 목소리는 금세 꺼질 듯 작고 희미했다.
“오늘 용환이가 왔다 갔었다는 거 알아?”
“용환이? 이용환?”
“응.”
“그 자식이 와서 뭐라 하데?”
“주사위를 빌려 줬는데, 그가 네 기억을 읽은 것 같아. 그는 그게 내 기억도 아니고 강인 기억도 아니라고 했어. 그렇다면 그 유경이란 여자 기억일 수도 있겠지만 그 여자 기억일 리가 없어. 바로 우리 집 저 소파에 관한 기억이니까. 그건 네 기억이야.”
민효는 꽃무늬가 흐드러진 소파를 가리켰다. 소파를 쳐다보던 강윤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졌다.
“그 소파가 뭘 어쨌다고......”
“그 소파 아래 피가 흥건하게 고여 있었대. 그게 누구 피냐고 묻더라구. 난 대답을 안했지만......”
민효는 갑자기 돌아서서 도망치듯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뒤따라 들어온 강윤은 침대에 걸터앉아 소리내어 우는 민효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벽을 주먹으로 쳤다. 민효는 울음을 그치지 않고 한 마디 한 마디 짜내듯이 외쳤다.
“난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 하지만 넌 알아.......그러니까 네가 대답해. 우리가 무슨 짓을 했는지. 용환이가 너의 어떤 기억을 보았는지 말하란 말이야.......”
그러나 강윤이 그걸 말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건 그 자신도 잊고 싶었던 기억이 아닌가.
그러나 대답해야 할 단 한 가지 진실이 여기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