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
# 11
“너, 정말 다 잊어버린 거야?”
“뭘 말이야?”
민효는 울어서 충혈된 눈으로 강윤을 노려보았다.
“내가 너한테 한 짓.”
“네가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데?”
앙칼지게 반문하는 민효의 목소리가 강윤의 허황한 의식을 둘로 갈랐다. 알았다. 다 잊어버렸구나. 일부러 잊어버린 척 한 게 아니었어. 정말로 다 잊어버린 거야. 부분적인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처럼 다 잊어버렸어.
“내가 널 죽였잖아.”
거듭 말하거니와, 강윤에게는 완곡어법을 구사하는 언어적 재능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직설법을 썼다가는 민효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갑자기 심한 두려움을 느꼈다. 그래서 억지로 머리를 짜내어 만든 대답이 ‘나는 널 죽였다’는 엉뚱한 문장이었다. 불행히도, 민효는 자신의 의식 속에서 삭제된 기억의 핵심을 비껴 우회적으로 접근하려는 강윤의 의도를 금세 간파했다.
“그래, 넌 벌써 날 죽였어. 그렇다면 어떻게 죽였는지 다 얘기해. 그 피가 내 피란 말이지? 그렇지? 그런데 내가 불사신이라서 다시 살아나서는 네가 날 죽였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너한테 대들고 있단 말이지?”
“야!”
이제는 더 이상 완곡어법을 쓸 수 없었다. 강윤은 자신의 서투르고 분별력 없는 말솜씨 따위에 더 이상 연연해하지 않고 단 한 마디로 간단하게 고함쳤다.
“내가 널 덮쳤어. 됐어? 그래도 모르겠어?”
민효는 강윤의 한 말의 뜻을 얼른 파악하지 못했다. 그러나 강윤의 대답을 머리로 받아들여 정리하는 몇 초 동안 그를 쳐다보는 희고 둥근 얼굴에서 핏기가 차츰 가시기 시작했다. 보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그녀의 입이 멍청하게 벌어졌다. 무표정한 얼굴로 입만 반쯤 벌린 그 모습은 거의 질식 직전에 다다른 사람의 표정과 흡사했다.
강윤은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표정을 보자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로서는 다행스럽게도, 민효는 이내 그를 쳐다보던 눈을 감아 버렸다. 눈꺼풀이 닫히기가 무섭게 속눈썹 사이로 눈물이 폭포수처럼 한꺼번에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민효는 두 손으로 뺨을 감쌌다. 얼굴을 가린 채 민효는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비록 격렬한 오열은 아니었지만 상처입은 짐승의 절규에 상당히 근접한 울음소리였다. 강윤은 여전히 한 발자국도 발을 떼지 못하고 그녀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사실대로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 망각했다면, 망각한 채로 내버려뒀어야 했다. 그걸 끄집어낸 건 다 나이디다. 그렇게 생각하면, 방금 전까지 일어났던 그 기괴하고 초현실적인 상황은 아주 간단히 정리된다. 그리고 지금 나는 이렇게 있으면 안 된다. 강윤은 이십 센티 정도의 간격을 두고 민효의 옆에 앉았다.
“내가 잘못했어.”
민효가 입을 열지 않자 그는 창자가 조여드는 심정으로 무작정 아무 말이나 주워섬기기 시작했다.
“내가 바보였어. 등신에 천치같은 놈이었어. 나한테 무슨 말을 해도 좋고, 무슨 짓을 해도 원망 안 해. 여기서 당장 죽으라면 죽을 수도 있어.”
때늦은 용서는 소용이 없었다. 민효는 자신의 얼굴을 가렸던 손을 천천히 떼어냈다. 그녀의 얼굴은 심한 모멸감과 자기 혐오로 일그러져 있었다.
“나는 기억 못 해. 기억이 하나도 안 나. 아무리 떠올려 보려고 해도 소용이 없어. 백치처럼 깨끗해. 난 네 말 인정 못 해.”
“인정 안 해도 좋아!”
그러나 난 인정하지 않겠다는 네 의사를 인정할 수 없어. 그게 강간이었다면, 순간의 욕망을 참지 못한 배설이었다면, 그건 간단하지. 서로 인정하지 않으면 그만이지. 그게 아니었으니까 문제지. 넌 날 싫어하지도 않았어. 강인만 아니었으면, 빌어먹을 강인만 아니었으면 넌 나한테 악착같이 달라붙을 수도 있었고.
“만약 사실이라면, 난 어떡하라고? 네 말이 사실이라면, 난 사람도 아니야. 무슨 뜻인지 알아?”
“글세. 뭘까.”
“형제와 붙어먹은 거지. 형제와 놀아난 거라고.”
“그런 말 하지 마!”
“그럼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
허공을 찢고 또 찢는 그녀의 격앙된 목소리가 송곳처럼 강윤의 고막을 쑤셨다. 민효는 갑자기 일어서서 문을 열고 휘청거리며 뛰쳐나갔다.